여보세요, 詩님 계신가요

2012.03.02 11:12

동아줄 조회 수:424 추천:63

여보세요, 詩님 계신가요



-  김 명 원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귀한 쌀가루 같이 느껴질 싸락눈이 적요하게 퍼붓고 있습니다.

풍경은 하얀 색조 안에 묻히고 하늘이 푸근히 내려와 자신의 몸을 순결히 풀어놓습니다.

오랜만에 말의 문을 잠그고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사색의 스위치를 켭니다.

그리고는 『우이시』로부터 숙제로 받은, 시가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해 봅니다.

정답들이 저 눈발처럼 몰아쳐 준다면, 하고 내심 바라면서 말이지요.



1. 묻는다, 시를 왜 쓰는지



‘나(자아)’를 갖고 있다는 느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적어도 자신을 타인과 혼동하거나 어떤 미분화된 전체와 한 몸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경계가 정해져 있고 고유한 뭔가가 있는 하나의 심리적 실재entity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리적 실재로서의 ’나‘는 스스로 ’나‘임을 자각할 수 있는

경험과 활동과 인식을 통해 포획되는 것이며, 반성하는 순간에 현전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이루는 삶의 전체들에 대하여 대조적으로 존립하면서 변별성을 갖게 됩니다.

이런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 유달리 언어의 고수高手들이 시를 씁니다.

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씁니다.

시 쓰기를 욕망의 대리 성취라고 할 때 이 욕망의 기원은 존재의 결핍(겔렌)입니다.

여러 욕망 중에서도 물질(마르크스)과 리비도(프로이트)를 가장 근원적으로 꼽는데,

시는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결핍감으로부터 상상 속에서 완전한 충족감의

‘나’로 성숙시켜 주는 튼실한 교량 역할을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꿈(욕망)을 언어 형식 속에 구현함으로써,

시를 구하는 독자는 그 시를 읽음으로써, 각자의 심리적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기에 돈이 안 되는 시를 쓰면서도 시인은 자족합니다.

원고료는커녕 열악한 잡지를 구독해 줘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시를 개재하면서도 시인은 행복합니다.

이미 결핍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개념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 자유의 의미를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시의 방에 불을 켜고 시인들은 무수히 일어서고

무수히 스러지는 결핍과 욕망과 채움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다른 삶들과 변별되는 ‘나’인 까닭입니다.



2. 다시 묻는다, 시가 누구신지



가끔 동창 모임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됩니다.

시가 무어냐는 겁니다. 참 난처하지요.

명색이 시인이라면서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궁여지책으로

‘영혼이 먹는 밥’이라고 대답합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 맛 나는 밥을 먹듯, 밥맛이 없어도 밥을 먹어야 하듯이,

정신을 위해서도 밥이 필요한데 그게 시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시가 없이 정신을 견고히 지키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생 시 한 줄 읽지 않고 영혼이 피폐해지지 않았다고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과 가보지 않은 사람이 다르듯이,

신을 느낀 사람과 신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다르듯이,

시의 깊고 깊은 우물 아래로 차디찬 염결성의 두레박을 던져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동질의 정신적 토대를 갖고 있겠습니까?

어떻게 동량의 영혼에 싱싱한 텃밭을 내고 있겠습니까?  



당신이었습니다.

더 갈 곳이 없습니다.

- 박찬일 「북극점」 전문



“당신”이랍니다. “더 갈 곳이 없”답니다.

숨막히는 비장함입니다. 출발과 과정의 지난한 발자국들이 시의 곳곳에 찍혀 있습니다.

고통과 격투했던 흥건한 땀방울들이 시의 곳곳에 적셔져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 막힌 길이었음을 알고 돌아 나오던 체념과

그 때마다 포기하고 싶었던 자책의 한숨이 묻어 있습니다.

마지막 ‘당신’을 얻기 위해 고달프게 쌓아 올렸던 숭고의 의지가

이 시를 “북극점”까지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단 두 줄의 시가 이토록 광활한 삶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힘입니까?

그러니 어찌 시를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자를 구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시를 만난 자는 이제부터 ‘당신’이라는 ‘궁극’을 꿈 꿀 것입니다.

늘 ‘북극점’에 가 닿을 날을 단호히 새기며 지금을 견딜 것입니다. ‘

북극점’에서 내려오지 않을 미래에 가슴 벅찰 것입니다.



적요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내 은하계의 어느 행성에

오색의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나 보다  



적요의 밤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훈...

내가 떠나왔던 아득한 전생의 종루에서

누군가 지금 종을 울리고 있나 보다

- 임보 「적요의 밤」 부분  



새, 그 가벼운 무게로도 휘청!

휘청거리는 가지, 그 은밀한 交信

운명이다. 가지 하나의 떨림으로

一波萬波 깨어나 뒤척이는 나무숲

스스로 몸살을 앓는 그 징벌의 땅에

얼마 후 폭설이 내리고

잔가지마다 눈꽃이 피겠다

- 김석환 「새 」부분  



“잠이 오지 않는” 이유가 “은하계” “행성”에 “오색의 운석이 떨어지”기 때문이랍니다.

밀려오는 향훈”이 “아득한 전생의 종루에서 누군가 종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보다 더 세계와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시가 있을까요?

카오스의 이론은 무질서 속에 배려된 질서의 엄격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란 북경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팔랑이며 날개를 움직였을 때

다음 날 뉴욕에서 폭풍이 일 수도 있다는, 개체가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체란 결국 우주와 연결된 탯줄을 지니고 있다는 간접 표현입니다.

이는 김석환 시인의「새」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새”가 나무 가지에 앉아 “휘청”이자 그 “떨림”으로 “

一波萬波 깨어나 뒤척이는 나무숲”이라니요. 그래서 “폭설”이 내린다니요.

그냥 ‘나’와 그냥 사물이 아닙니다.

지구와 우주와 하나의 연결 고리를 이루는 ‘나’,

아득한 심연의 공동체적 운명으로 결정된 ‘나’와 세상입니다.

이런 심오한 생명적 묶음을 지어주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당위론의 이치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긍정의 질서, 곧 우주 섭리를 수용하는 통로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바람과

하늘에서 오는 바람은 상극이다

그러나 상생이다. 두 바람

공중에서 입맞추게 하라

- 김동호「사람들로부터 오는 바람과」전문



“사람들로부터 오는 바람”과 “하늘에서 오는 바람”이 “상극”이라고 합니다.

생태론자들이 입 모아 외쳐대는 구호가 ‘자연을 억압하고 황폐화시키는 인간’이라는 논리입니다.

김동호 시인은 이런 문제의 핵심을 한 번 마디를 툭 꺾어 표현합니다.

“바람”에 실려 순연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렬히 표출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구를 좀 더 거리를 두어 객관화시킵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자기 집착이 아니라 이해의 관조입니다.

그러하니 “상생”일 수 밖에요. “두 바람/ 공중에서 입맞”출 수 밖에요.

시는 서로 길항하고 억압과 피억압 구조에 있는 것들을 함께 화해시키고

구원하는 변증법적 화로火爐입니다.

그러하니 시 안에서 외면하고 반목하고 증오했던 것들이 다시금 얼싸안고 입맞추게 됩니다.



세상 밀쳐 놓고

딴전 부리는



이다

세상 싸덮는저

막무가내의

밥보자기 ―송준영 「고요」 전문  



눈부시지 않습니까?

언어가 부리는 이미지의 마술이란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일컫겠지요.

“고요”를 이 시만큼 집중적으로 포획해낸 예술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고요”에 이 시만큼 아름다운 호적등본을 입적해 준 시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고요”의 본질을 진하게 느낄 것입니다.

“고요”에 화들짝 화상을 입을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한 번도 의식해 보지 않았고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사물들에 충실하고도 낯선 이름을 붙여주고,

시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 전도체로 태어나게 하는 산파의 역할, 바로 시인입니다.



끊이지 않는 소음 속에 태어나서, 매연으로 뼈를 키운 몸뚱이야,

풀 풀 도시 냄새가 넘치는 아파트에서 평수만큼 묶인 채 여기까지 살아온 거야…

넌 타향에서 바다를 그리워하고…

어긋나게 사는 거야…

이제 너와 난 조금씩 마른 가슴을 열어 꽃 피울 겨울을 함께 살아가는 거야.

―목필균 「동백과 나」 부분



어머니 숯불 다리미

겨울산 산수유 열매처럼

그 꽃불 아직도 일렁이고

매운 손끝

장대산 개꽃의 불타는 목숨

긴 긴 울음보다 질긴 믿음이었지

―배경숙 「어머니의 손」 부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아니 제 자리를 아예 잃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아이들의 교과서에서 ‘종달새’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종달새’는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Red data book의 자료에 의하면 해마다

수 십 종의 꽃들이 새들이 동물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져 갑니다.

날로 쇠약해져 가는 자연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에서나 연명하고 있습니다.

목필균 시인은 이런 현실을 개탄합니다.

바다에서 해조음을 들으며, 해풍에 그을리며,

건강하게 자라야 할 동백이 “소음 속에 태어나”“매연으로 뼈를 키운 몸뚱이”가 된 것을 아파합니다.

허나 시인은 이런 현실에 연약한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습니다.

“너와 난”“마른 가슴을 열어 꽃 피울 겨울을 함께 살아가”자고 제안합니다.

기꺼이 함께 생명의 지반을 키우자고 다짐합니다.

시는 고통을 뿌리로 삼지만 희망을 키워내는 특이한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허기에 시 나무 한 그루를 가슴에 심은 이는

늘 고통의 늪지에서 물을 끌어올려 먹음직스런 희망의 과실을 맛보게 됩니다.

배경숙 시인 역시 이제는 없어져 버린

“숯불 다리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덥혀내고 있습니다.

잊혀진, 혹은 본 적도 없을 “숯불 다리미”가 이 시 안에서 불현듯 제 몸을 뜨겁게 돋구고 있습니다.

얼마나 환한 감성의 온도입니까?

이처럼 시는 잊혀지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언어의 총구로 정확히 겨냥해서

멋지게 포획해 내는 우리 시대 마지막 사냥꾼입니다.



3. 시의 문을 닫으며

이제 퍼붓던 눈이 그쳤군요.

창 가득 은성스런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시는 어쩌면 몰아치는 눈발의 장엄함이기도 하고,

하나의 침묵으로 쌓여있는 설경의 겸허함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는 못 견디게 사무치는 몸부림이기도 할 것이고,

들녘에 버려진 노을 한 줌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는 사라지거나 사라져 간 것들의 명명을 끝까지 보유해주는 언어의 전당포이며,

시는 갇혀 신음하는 것들을 표표히 세상 밖으로 내몰아주는 자유론자의 혁명이기도 하며,

시는 상반되는 것들이 박 터지게 싸우고 다시금 악수하며

새로운 길로 나가도록 지켜보아 주는 변증법적 교사이기도 하며,

고통의 뿌리를 가지고 희망의 열매가 의연히 열리게 하는

신비로운 생명의 수목이기도 합니다.

시는 욕망의 대리 충족이며,

마지막 남은 꿈의 열락이며,

시는 사랑해도 사랑해도 물리지 않는

시인들의 정부情婦 입니다.

오늘도 이런 시를 은밀히 만나, 힘차게 안고 입맞출 수 있어 행복합니다

  

출처 :일산문학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푸른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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