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調論]

세상의 모든 시조 - 시조, 이제는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


이정환(시조시인)

 


1.

     ‘오늘의 시조, 무엇이 문제인가? 앞의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할 수 있다. ‘시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시조를 운용하고 있는 시조시인들에게 있을 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곳곳에 시조가 들어 있다. 그래서 시조시인들은 세상을 시조로 읽고, 모든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시조 3장에 담는다. 오늘도 시조시인들은 모두 그런 마음으로 부지런히 세계와 사물과 개인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시조를 불러내어 자신만의 언어로 직조하는 일에 골몰한다. 그러나 과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는 힘 있는 시조, 깊은 울림의 걸출한 시조, 쓰고 난 뒤 곧장 죽어도 좋을 한 편의 시조’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는 이들이 시조문단에 몇이나 있는지 냉혹하게 살필 일이다. 진실로 최후의 한 편을 쓰다가 숨을 거둘 각오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시조시인이 과연 있는가?

 

    시조에 살고 시조에 죽는 그런 놀라운 혼연일체!

 

    아니? 삶이 먼저이지 시조가 그 무슨 대수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런 비상한 시선으로 곧장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한 근성과 필연성 없이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면 그는 과감하게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삶의 한복판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입에 풀칠하는 일에만 전념할 일이다.

    내면의 가장 밑바닥에서 강렬하게 치밀어 올라오는 그 무엇 없이 어찌 피를 찍어 시를 쓴다 할 것인가. 주례사 비평에 사뭇 기꺼워하면서 한두 개의 상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 양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시조시인들은 자기만족, 자기 베끼기를 경계해야 한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을 도려내고 깎아내어야 한다. 예쁜 시조, 단아한 시조, 화려한 시조, 서정일변도의 작품에만 경도되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절박한 시대 상황이나 복잡다단한 내면의 문제, 목전의 민생과 국가의 안위와 다가올 통일조국의 그날을 생각하며 정신적 지침이 될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역사의식을 천착하고 탐구하는 일에 소홀히 한다면 우리가 쓴 작품들은 허공을 치는 말이 될 것이다. 급작스런 소멸을 부르고야 말 것이다.

    시조, 이제는 세계의 중심에 서야 할 때이다.



2.

    시조문단에서 자주 거론되는 일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명칭 문제다.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을 때 ‘시집’이 대세이고 이따금 ‘시조집’이라고 붙인다. 어떤 출판사에서는 ‘정형시집’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이 일은 특정한 한두 사람이 못 박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자유시를 의식하여 ‘시집’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듯한데, 시조문단 전체적으로 ‘시조집’이라고 통일을 기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형식 문제다.

    얼마 전에도 형식에 대한 심도 있는 세미나가 있었다. 이제 웬만큼 논의가 되고 정립된 이상 뿌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형미학의 근간 위에서 무한대의 상상력을 펼칠 여지를 충분히 인정하고, 편협한 몇몇 학자들의 형식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나 논쟁을 지양케 해야 할 것이다. 시조를 위하는 척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논리는 시조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을 현실적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야말로 좋은 작품으로 미적․예술적 성취를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조의 형식적 변주의 한계를 ‘단시조, 연시조, 장시조’로 선을 긋는 것이 옳으리라고 본다. 물론 일각에서 창작되고 있는 ‘양장시조, 단장시조’의 존재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시조로 붙였을 뿐 3장의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1행시, 2행시에 가깝다. ‘단장시조, 양장시조’에 몰두하는 이들의 논리는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지만, 시조의 태생에 대한 전면적 부정일 수가 있다. 축소도 확장의 일환이라고 보는 이의 견해는 궤변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3장의 고수는 꼴통 보수가 고집스레 주장하는 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正論이다.

    현재형의 갈래로서 3장 6구 12음보의 단시조에는 다양한 전개 유형이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 이 유형에 대한 연구가 적잖게 이루어졌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에 시인이 부여하는 틀은 그때마다 언제나 다르게 마련이다. 작품마다 시인의 의도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요는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지느냐가 관건이다. 형식적 장치가 우수해도 내용이 따라 주지 못하거나 내용이 뛰어나도 형식에 문제가 드러나면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흔히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을 두고 형식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아야 한다고 이르는데 옳은 말이다. 정형적 한계와 가능성이 시조를 쓰는 이들에게는 난관이자 매력인데, 이 점을 잘 수용하고 천착하는 중에 새로운 물꼬는 그때마다 트일 것이다.

 

    3장의 틀은 자칫 딱딱한 느낌을 주기가 쉽다. 이 점을 일찍이 간파한 정완영은 3장 중 한 장은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설득력 있는 탁견이다. 그러나 이 말 역시 일괄적용 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예외가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나 내용과 형식의 균형과 조화에 대해 ‘내용적 균질성과 형식적 고전미’를 잘 갖추어야 한다거나 ‘간명한 단시조 형식에 담을 수 있는 시적 심상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을 수 있다는 사실’ 등은 핵심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말이다. 시조는 정형률을 가지고 있지만 늘 새로운 율격 체계의 시조를 창출할 수 있다. 이 점은 시조만이 가지는 매력이다. 물론 이는 정형미학을 훼손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다.


    셋째, 시조문학상이다.

    고 오규원 시인의 말처럼 ‘가끔은 주목 받는 생’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쓰는 사람에게 이따금 격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시조문단은 특정인들(?)의 상의 독식이 유별난 곳이다. 그 제도라는 것이 아주 폐쇄되어 있어 살펴보면 숨 막힐 지경이다.

 

    예를 들어보자.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 후보자 중에 ‘이제니’라는 시인이 있다. 그는 불과 3년 전인 2008년에 등단한 햇병아리 신인이다. 그런 그가 명성 높은 문학상 후보군에 진입해 있다. 등단 30년 넘은 대선배 시인과 어깨를 겨룬다. 그리고 오로지 작품 하나만으로 수상 대상자를 가린다.

     그런데 시조문단은 어떠한가? 일도양단처럼 연도를 못 박고 신인들의 활로를 강압적으로 막는다. 특히 등단 10년 이상 15년 이하에 속하는 시인들에게 격려가 될 만한 상이 전혀 없다. 모순이다. 상이 그 작가의 예술적 성취의 바로미터가 될 수는 없지만, 앞서 말한 것같이 가끔은 주목을 받게 될 때 창작의 열정은 사위어 들지 않기에 고른 격려가 주어져야 하고, 기득권과 같은 ‘연조’에 연연해하지 않을 때 발전에 가속도가 붙게 될 것이다.

 

    시조문학상의 운영 측면에서 볼 때 롤 모델이 될 만한 경우가 중앙일보사 제정 ‘중앙시조대상’과 청도군에서 시행되고 있는 ‘이호우 ․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일 것이다. 엄정한 예심과 본심 과정을 거쳐서 수상자를 뽑는다. 등단 5년 이상 10년 이하는 신인상, 15년 이상은 대상 후보가 된다. 여기서 바로 5년이라는 갭이 보인다. 이 문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문화예술위원회 같은 곳에 지원금을 신청하는 일은 자격 요건이 구비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천하여 문학상 공모에 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운영 방식이 아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면 번거롭더라도 예심, 본심 과정을 거침이 마땅하다. 등단 20년 혹은 30년을 훌쩍 넘긴 이들이 ‘나에게 상을 주십시오.’라고 넙죽 엎드리듯 하는 모양새는 참으로 볼썽사납다.

   

    넷째, 신인 등용이다.

    오래 전 시조문단은 ‘잡초론’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이태극이 주도한 ‘시조문학’지 이야기이다. 지금도 각종 지지로 신인들이 양산되고 있다. 자질 문제를 거론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잡초가 필요하다. 기실 누가 잡초인지 누가 시조문단을 윤택케 하는 풀인지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소위 우수하다는 시인이 때로 어줍지 않은 시를 발표할 수도 있고, 별반 눈에 띄지 않던 이가 명편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작품에 대해 치열한가, 전력투구의 길을 가고 있는가, 남다른 전략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관건일 것이다. 물론 어느 지지로 나오든 잘 검증된 신인이 등용문을 통과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마저도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조 쓰는 인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밖에 ‘동인활동의 활성화, 동시조 창작, 시조 창작교실의 활성화, 시조작품 교과서 반영 문제, 전문 비평가 활동 공간 열어주기, 시조의 세계화 문제, 인터넷으로 좋은 시조 널리 알리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안은 개별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또는 대표성 있는 단체에서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이다.

 

    오래 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네 사람의 얼굴』은 시조문단에 적잖은 파급효과를 끼쳤다. 지난 1980년대 동인활동의 주축이었던 ‘오류’와 ‘80년대’는 오늘의 시조를 있게 한 중요한 한 흐름이 되었던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지엽 외 몇몇의 주도로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선’을 간행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현재 시조문단은 여러 동인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지역마다 시조시인협회가 있어 전반적인 흐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전국적인 단위인 ‘오늘의 시조시인회의’와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시조시인협회의 활성화로 말 그대로 현대시조는 중흥의 때를 맞고 있다. 저변도 상당히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시조 지망생들이 대폭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시조 창작교실’을 각 지역별로 체계적으로 열어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부산 쪽의 어린이시조 운동과 광주에서 발행되는 반 연간 잡지《한국 동시조》의 발간도 ‘동시조’의 활성화에 적잖게 기여하고 있다.

 

    좋은 작품이 꾸준히 양산되어 풍부한 텍스트가 확보된다면 그로 말미암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길이 넓게 열리게 될 것이다.



3.

     서로 엇비슷한 작품들을 내놓아 차별성이랄까, 개성이랄까 그런 것이 묻혀버리는 경향이 시조문단에 적지 않다고 볼 때 새로운 작법과 의외의 목소리를 내는 시인을 보면 강하게 끌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친숙한 것에만 지나치게 의미를 두고 가치 있는 것으로 높여 왔기에 나와 전혀 다른 발화와 육화를 보이는 경우 잘 수용하지 못한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작품의 실례를 들겠다.

 

    염창권의 시조를 보자.


껍질 속은 굴곡이 많은 별빛으로 채워졌다

빡빡한 뇌수처럼 생은 좀체 휴식이 없다

별빛을 헤아려 본다

부유하는 먼지 같은…,


우주는 딱딱한 두개골처럼 소리가 난다

반짝이는 머리통 속 질량은 충분하다

욕정의 신호나 되듯

은밀한 느낌이다.


금기의 강이 있다, 건너지 못하는

미확인의 진실이지만

그들은 서로 잇닿아 있다

별들도 사랑을 나눈다

눈빛을 보면 안다.


호두껍질을 두드려서 잠든 별을 깨운다

기억의 숲 속으로 번개가 지나가듯

어둠이 파동 치며 긁힌다

이젠 추억의 힘이다.

-「호두껍질 속의 별」전문


    「호두껍질 속의 별」은 특이한 매력과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자력을 내장하고 있다. 되풀이해 읽게 한다. 유별난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미학적 성취를 공유하는 즐거움을 준다.

 

    첫 수에서 ‘호두껍질 속’에서 ‘별빛’ 이미지를 도출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껍질속은 굴곡이 많은 별빛으로 채워졌다’라는 대목은 상상력의 놀라운 발현이다. 그리고 호두 속은 정말 뇌수 모양 그대로이기에 ‘빡빡한 뇌수처럼 생은 좀체 휴식이 없다’는 사실에 적극 동의하게 된다. ‘부유하는 먼지’ 같은 ‘별빛을 헤아려 보’는 장면에서도 우리의 눈길은 오래 머문다.

 

     둘째 수에서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미 첫수에서 ‘호두껍질’을 ‘우주’로 보았으므로 첫 수에서 ‘딱딱한 두개골처럼 소리가 나’는 것이다. 이어서 ‘반짝이는 머리통 속 질량은 충분하다’라는 진술에서 밀도 높은 생의 비의를 감지하게 된다. 그것이 ‘은밀한 느낌’과도 같은 ‘욕정’과 연계되면서 다시금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셋째 수는 다른 수에 비해 다소 풀어져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금기의 강’이 가로막고 있어 불가해한 측면을 보인다. 다만 ‘별들의 사랑’을 앞의 ‘욕정’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수가 관건이다. 시의 화자가 ‘우주’ 즉 ‘호두껍질을 두드려서 잠든 별을 깨’우고 있다. ‘사랑을 나눈 별’이 혼곤한 잠에 빠져 있다가 정수리를 치는 강한 울림에 곧장 깨어났으리라. 여기서 종장은 강렬한 인상을 화인 찍듯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어둠이 파동 치며 긁힌다

이젠 추억의 힘이다.


    「호두껍질 속의 별」에서 시의 화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결국 ‘추억의 힘’이다. ‘추억의 힘’이 파동 치며 긁히는 어둠을 헤치고, 우리의 삶을 미래로 이끈다. 끝까지 견지하고자 하는 꿋꿋한 생의 의지와 열망은 ‘추억의 힘’이 추동하는 길과 시간에 대한 부단한 窮究이기도 하다. 이 궁구가 앞으로 더 많은 길을 통해서 깊어지고 넓혀져서 우리 앞에 또 다른 가슴 벅찬 비전과 의미를 안겨줄 것이다. 염창권의 첫 시조집『햇살의 길』에는 곳곳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충돌을 읽는다. 또한 웅숭깊은 존재의 근원을 향한 탐색이 도저하다.「깔링」,「상수리 열매」,「목련나무 아래서」,「21 그램」,「세습적인」,「씨앗의 시간」,「덩굴손」,「검은 새」,「황혼녘에 두계를 지나다」등은 염창권 시조시학의 중핵이다.

 

    지극히 ‘단아한 시조’가 대세를 이루다시피하는 시조문단에서 주류(?)의 문법을 발끈 뒤집는 혹은 뒤집어 엎어버릴 듯한 氣勢의 헌걸찬 목소리는 분명히 또 다른 개성이다. 언제까지 우리끼리 도토리 키 재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4.

    형식적․내용적 매너리즘과의 부단한 싸움 없이 기대할 만한 작품을 창작할 수 없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새로운 탐구 끝에 우리의 시선을 압도하는 명작은 탄생된다. 구체적 실질을 획득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정격의 언어와 고전적 태도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은 시조의 품격과 위의를 지키는 일이라는 유성호의 논지는 주목을 요한다.

 

    또한 유성호가 임채성의 첫 시조집『세렝게티를 꿈꾸며』의 작품 해설에서 ‘우리 정형시단에서 매우 이채롭고, 드물고 우뚝한 모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로운 音域의 발견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근원적·원형적 야성과 기억들을 시적으로 탈환하고 복원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작품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조를 읽는 이들에게 ‘간결하고도 속 깊은 서정적 언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시조시인들의 몫이자 사명이다. 작품 속에 ‘사물과 내면을 유추적으로 상응케 하는 내밀한 상상력’이 선연하게 보일 때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사물의 외관과 내면의 정서를 견고하게 결속시키는 고유한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장경렬은 현대시조의 미학적 가능성에 관한 글에서 ‘절제, 간명, 함축의 공간으로서의 단시조’를 논한 바가 있다. 단시조는 긴장의 시 형식으로서 가장 적절한 시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절제된 언어, 간명한 시적 이미지, 함축적인 시적 진술’을 시조미학의 요체로 보고 시조시인들에게 열정과 정성을 요청한 바 있다. 새겨들을 논지이다.

 

    다음 작품을 한번 살피자.


풋잠과 풋잠 사이 핀을 뽑듯, 달이 졌다

치마꼬리 펄럭, 엄마도 지워졌다

지워져, 아무 일 없는 천치 같은 초저녁

-박명숙,「초저녁」전문


    박명숙은 첫 시집『은빛 소나기』에서 특히 단시조의 전범을 보인 바 있다. 위의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초저녁」에 대한 유성호의 논지를 보자.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와 그 안에 농밀하게 축약된 서사(narrative), 그리고 시인의 암시적인 해석적 개입까지 이 시편은 매우 자연스런 시상(詩想)을 통해 단수 미학의 범례(範例)를 보여준다. 초저녁에 얼핏 든 풋잠 사이로, 그동안 시인의 기억을 지탱하던 핀을 뽑아버리기라도 하듯 ‘달’이 진다. 그 순간 치마꼬리 펄럭이며 ‘엄마’도, 혹은 ‘엄마’에 대한 기억도 동시에 지워져 간다. ‘달’과 ‘엄마’가 동시적으로 지워진 뒤 “아무 일 없는 천치 같은 초저녁”에 홀로 남겨진 시인은 이렇게 이울어가고 지워져 가는 존재자들을 통해, 그리고 ‘초저녁’이라는 소멸 직전의 시간을 통해 소멸 지향의 상상력을 완성하고 있다. 이 시편은 지워져 간 ‘달’과 ‘엄마’, 그리고 홀로 남겨진 ‘초저녁’을 통해 우리 삶의 알 듯 모를 듯한 슬픔을 가득 흩뿌려 주고 있다. 아름답고 애잔하다.

 

     지나치게 장광설을 늘어놓기보다 본령에 충실한 창작을 통해 이와 같은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단시조 창작에 주력함으로써 시조문단을 더욱 두텁게 하고 윤택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수 미학의 심미적 완결성을 위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적 진경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시간이나 공간의 형상을 가장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감각으로 신생시키는 일에 대한 다각도의 노력과 천착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현대시조가 새롭고 개성적인 감각으로 쓰일 수 있는가를 實物的으로 보여주는 일은 온전히 시조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궁극적 생의 형식으로 우리 삶 속에 스미어 있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고 시조를 읽고 쓰는 일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단일한 주체의 확고부동한 신념도 중요하겠지만 복수의 타자가 경험하고 깨달아가는 다른 목소리를 활력 있게 받아들임으로써 미학적 지평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즉 주체와 대상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하고도 섬세한 무늬를 묘사하는 일이다. 다양성과 낯설음의 아이러니가 미학적 주류로 기능하는 복합성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긍정적 요소들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자유시에 대한 실천적 항체로서 현대시조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시조, 이제는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

 

- <대구문학-시야시야 http://cafe.daum.net/cln-daegu/BvhG/1151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0 2018년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심사평 모음 동아줄 김태수 2018.01.04 1374
99 제6회 정형시학 신인작품상 수상 동아줄 김태수 2017.12.14 58
98 현대시와 현대 시조의 의미구조 탐색/박제천 동아줄 김태수 2017.10.07 331
97 제8회 찬강문학상 시조 심사평/본심 심사위원 이승하 동아줄 김태수 2017.09.12 45
96 제8회 찬강문학상 시조 대상/김환수 동아줄 김태수 2017.09.12 72
95 제8회 찬강문학상 시조 우수상/정황수 동아줄 김태수 2017.09.12 291
94 수필 창작 동아줄 김태수 2017.09.09 975
» 시조, 이제는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 동아줄 김태수 2017.09.07 73
92 제38회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시 부문 심사평 동아줄 김태수 2017.08.19 42
91 제15회 의정부 문학상 수상자 발표 동아줄 김태수 2017.07.10 238
90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입상/코리안 뉴스 기사 동아줄 김태수 2017.06.14 118
89 미주한국일보 제38회 문예공모전 수상작 발표 동아줄 김태수 2017.06.10 144
88 21세기문학 신인상 폐지 동아줄 김태수 2017.03.14 92
87 詩의 묘사와 진술 - 손진은 동아줄 김태수 2017.02.13 1367
86 미당문학 신인작품상 선정 기사 모음 동아줄 김태수 2016.10.20 434
85 미당 서정주 토론방 내용 동아줄 김태수 2016.10.15 587
84 시의 외양을 다 갖췄는데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동아줄 김태수 2016.09.09 122
83 한편의 시가 되기까지 동아줄 김태수 2016.09.01 407
82 순수를 꿈꾸며-윌리암 블레이크- 동아줄 김태수 2016.08.03 890
81 시 짓는 법 동아줄 김태수 2016.07.31 6841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44
전체:
1,167,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