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박인과

- 서울신문 편,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본고에서는 심사위원 등이 금전적인 부분과 인맥 등에 얽혀있다는 '뜬소문'과 함께 신춘문예의 심사에 대한 병폐를 짚어보고자 한다.

'뜬소문'처럼,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신문사와 응모자의 사이에서 신춘문예 당선 조건으로 1,0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거나 지방신문사에서는 5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하는 중개인들이 있다면 정말 한심한 일일 것이고 이러한 일이 정말 있어서 이러한 일에 관련된 심사위원들이 있다면 심사위원의 자격이 박탈되어야 한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은 한국문학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문예지에서 좋은 작품을 뽑아놓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게 해주겠다. 그렇게 되려면 돈을 가져오거나 책을 사야한다."와 같은 강제적인 조건을 붙여 응모자에게 요구하는 일이 있다면 이 또한 한국문학의 우울증을 도지게 하는 것이다. 신춘문예의 당선작으로 뽑거나 문예지의 당선작으로 뽑을 때 혹은 각종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할 때도 단 돈 1만원이라도 강제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상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 박인과의 신춘평론...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 (2)

신춘문예에서 당선작을 뽑기 위해 돈이 오간다면 순수하게 작품을 열심히 쓰고 있는 가난한 응모자들은 모두 들러리들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심사위원이 고정되어 있는 신문사 등의 신춘문예 심사에서 그 심사위원이 아는 자들이나 그 인맥들 중에 있는 자가 당선자로 결정된다면 이 또한 부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당선작보다 더 잘 창작된 작품이 사장될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선한 자들은 또 얼마나 가슴을 태우며 기나 긴 날들을 고통으로 지내야 할 것인가.
문인 등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의 시행에 있어서 신인문학상을 주는 대신 응모자에 대해 어떤 댓가를 지불할 것을 강제적인 조건으로 건다면, 그리고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좋은 작품으로 선정해 놓았다 하더라도 신인문학상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의 퇴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문예지는 사실상 그 운영이 힘들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고 해서 운영이 어렵다고 해서 책을 몇 권을 사줘야 한다거나 기부를 얼마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강제의 조건이 되어서 응모자가 가난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신인문학상에 당선이 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신춘문예 심사위원 등이 금전적인 부분과 인맥 등에 얽혀있다거나 혹은 문예지 등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돈을 뜯는다는 것은 '뜬소문'에 불과하다.

한국의 문단에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많은 부작용의 상황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 필자는 어김없이 여러 곳에서 당선된 신춘문예 작품들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올해는 얼마나 심사를 잘 해서 얼마나 한국문학의 발전에 이 신춘문예가 기여할 것인지를 보는 것에 필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당선작들을 살펴보다가 답답한 상황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서울신문의 신춘문예 결과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시조부문 심사평에 기재된 "세련된 감각적 재단 돋보여"라는 글을 보면서 필자가 정말 답답해 환장하겠다. 도대체 한국문학이 왜 이렇게 흘러갔는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조를 보며 한국의 시조는 신춘문예에 의해 거의 죽었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시조의 그 우람한 체격과 유쾌・상쾌한 흐름과 앞뒤 문맥의 긴밀한 통로가 막혀 있어 동맥경화증 내지는 심근경색증과 같은 원인으로써 시조가 중증 고혈압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을 보면서 시조를 창작한 당선자에게 불만을 토로할 필요는 없다. 창작의 길은 그만큼 어렵고 험난한 것이며, 이렇게 창작한 작자의 노력도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자들에게는 쓴 소리를 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더 마름질 되었어야 했다. 시대적 상황도 고려하여 사대주의적 표현에도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글은 오랜 숙련 끝에 농익어 나와야 하는 발효식품과 같은 것이다. 발효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조를 삼키는 백성은 그대로 동맥경화증을 앓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선자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조는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인데, 그 전문은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은어 떼 고운 등빛에 야윈 땅을 맡긴다.//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이다.

이번 서울신문 시조부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한분순과 이근배이다. 지난 해 심사위원도 한분순과 이근배였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에 대한 심사평은 '세련된 감각적 재단 돋보여'라는 것인데,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 주제로 정한 시점이 과거이나 박제된 이야기로 흐르지 않고 동시대와 교감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은 형상화가 뛰어났다.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라고 극찬하여 적고 있다. 참으로 답답해 환장하겠다.

우선 이 시조는 문법적인 오류가 발견된다. 그리고 시조의 틀을 훼손하고 있다. 또한 기승전결의 과정에서 앞뒤의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엉뚱한 문맥들로 짜깁기되어 서술되고 있다. 시조의 틀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과 엉뚱한 문맥들로 짜깁기 되어 있다는 것은 이 시조의 선자가 말한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는 극찬 일변도의 심사평에 감동할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도대체 우리의 자긍심인 시조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이렇게 시조를 중병에 들게 했는가. 누가 이렇게 시조를 희롱하고 있단 말인가. 한국시조단은 말하라, 분명히 국민과 역사 앞에 말해야 한다. 누가 우리의 시조를 병들게 했는지 분명히 책임져야 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시조를 쓰는 시조인이다. 그런데 한국시조협회 등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다. 한국시조협회 등은 이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말해 달라.

시조는 각 장과 각 구의 힘의 격이 서로 독립되어서 이루어지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우주와 같은 유기체로서 존재해야 시조다운 향과 맛과 빛깔과 그 힘을 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시조가 각 구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자유시처럼 배열된다면 시조의 해석도 달라지고 시조의 고유의 힘의 집중도 파괴되는 것이다. 자유시처럼 배열된다면 초장에서 혹은 중장에서 혹은 종장에서 끝나야 될 해석이 초・중・종장으로 계속 매듭 되지 않은 의미들이 혼란스럽게 연결되어서 원래의 창작 의도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창작하는 자는 구의 구분도 시조의 틀에 맞추어 정확히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조의 각 구의 구분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창작의 행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어야 하고 시조의 틀과 율격이 살아있어야 하고 기승전결이 잘 되려면 기승전결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문맥들이 서로 잘 소통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조는 문맥들의 소통의 맥이 막혀있다.

첫째, 문법적인 오류들을 살펴보자. 자유시에서는 문법적인 오류가 있어도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창작해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조는 극히 엄밀한 문법 체계 속에서 구현되는 철저하고 과학적인 언어의 기능으로 우리의 얼이 정제되어 나타나는 탐스러운 문학 형태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조 창작에 있어서 가능한 한 기본 문법을 틀림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선 이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필자가 누차 지적하듯이 문학적 표현이 문법을 탈피하려면 "그 문장을 독자가 창작자의 의도처럼 해독할 수 있어야 하며 문법을 탈피한 것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더 큰 문학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조는 그렇지 못하고 함부로 문장을 부리고 있다. 문장도 생명체이다. 문장이 잘못 사용되어지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오히려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을 보자. 이 시어에서 전체적인 수식을 받는 것은 '무르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르팍'은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의 수식을 받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낯선 세상 왼 무르팍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작자는 상상하고 있겠지만 작자의 표현력 부족으로 독자는 잘 알 수 없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다면 독자를 위해 각주라도 달아주면 좋지 않을까.

"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는 문장을 살펴보자. '벌레처럼'의 시어와 '눈발'의 시어는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눈발이라는 것은 "눈이 줄기차게 내려 줄이 죽죽 져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벌레처럼 달라붙는다'는 시어와 눈발은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꿈을 물린다'고 했는데 그 '꿈'을 무엇에게 물린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즉 예를 들어 "싣고 온 꿈을 건륭에게 물린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이 문장은 더욱 선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조의 문장은 '꿈'을 무엇에게 물리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아니,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그 앞에 '눈발 앞에'라는 시어는 있는데 이 '에'라는 것은 '눈발의 앞'이라는 위치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꿈'을 그 '눈발 앞'에 물린다는 것인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놓친 길'도 '눈발 앞에' 묻는다는 것인가.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만약 '~눈발 앞에서 건륭에게 묻는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확실해져서 명확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문법적인 부분에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만하자.

둘째, 시조의 틀과 율격을 희롱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은 3・4조 형식을 맞추지 않고 있다. 지독히도 자유시스럽다. 아니 그렇게 표현하려면 자유시를 써야지 이렇게 시조를 쓰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러한 문장이 과연 심사평에서처럼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라고 극찬 받을 수 있는 문장인가. 어찌해서 이런 문장들이 세련되게 재단되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심사평이 한국문학을 혼절시키고 있는 답답한 현실이 아닌가.
시조는 자유시를 쓰다가 지친 사람들이 시조를 희롱하며 놀러오는 장소가 아니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를 비교해 보자. 힘의 분배의 격이 다르지 않는가.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는 자유시이어야 하고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정형시이어야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얼마나 시조의 틀과 율격을 우리 민족의 호흡과 맥의 격에 맞게 힘차게 살려내고 있는지 감탄스럽다. 얼마나 생기발랄한가. 노랫가락이 저절로 형성되는 것 같지 않는가. 시조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노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조가 노래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조가 아닌 것이다. 시조는 時調이어야 하는 것이다. 시조는 詩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시조는 詩가 되어있는 것은 기본이어야 하고 時調가 되어야 하는 것은 원칙인 것이다. 그 둘 중에서 하나를 빼려고 한다면 시조는 詩를 뺀 時調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렇게 시조의 정형의 틀이 훼손되고 있는데 어떻게 시조 심사평에서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고 극찬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시인들이여 시조의 진정한 틀을 버리면서까지 시조에서 자유시를 닮은 시어를 왜 창작해야만 한단 말인가. 시조의 격을 낮추지 말고 차라리 자유시를 쓰는 것이 맞지 않은가.

셋째, 엉뚱한 문맥들로 짜깁기 된 기승전결의 맥의 불협화음을 보자. 이 시조의 선자는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고 극찬하고 있다. 이 시조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 일변도인 심사평을 본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를 살펴보자. '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문장은 '산과 들'이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산과 들' 뒤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산과 들, 열하'를 향해 (무엇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의미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무엇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시조에서 밝혀져 있지 않고 불분명하다. 앞・뒤 문맥이 소통되지 않고 있다. 문장들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의 문장은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인데, '속으로 끓는 불길'을 어떻게 '바람 불러' 잠재운다는 것인가. 보통 불의 속성은 바람이 불면 더 잘 살아나는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 시이겠지만 그것은 독자와의 소통이 가능할 것을 전제로 한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혼자만 알고 글로써 발표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무엇이) 왜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것인가. 그리고 낮게낮게 엎드리는 이유가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썩 잘 어울리는 문장은 아니다. 끓는 불길을 잠재운다 해서 (무엇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표현은 좀 어색하다는 것이다. 이 시조의 시어는 분명히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이라는 조건을 걸고 있다. 이러한 조건이 성립되면 누가 보아도 (무엇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오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맞다고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이 썩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장이 소통이 안 되고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 심사평에서처럼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라느니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이라느니 한다면, 만약 필자가 "타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이명박 대통령이 낮게낮게 엎드린다."라고 하는 문장을 만들었을 때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며 "기승전결의 매끈한 흐름"이라고 극찬해 줄 것인가. 또 필자가 "타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연암 박지원이 중국 황제에게 무릎 꿇고 절을 한다"라고 하는 문장을 만들었을 때 "감각의 세련된 재단"이며 "기승전결의 매끈한 흐름"이라고 극찬해 줄 것인가.
이 시조는 이렇게 썩 잘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시조를 어찌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고 극찬하고 있단 말인가. 시조는 그 뒤의 장이 앞의 장의 인도 하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이유에 의해 뒤의 장이 이루어지는 것이 시조라는 것이다. 어려운가. 그렇다면 시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긍심 강한 우리만의 정서와 역사가 담긴 시조의 생명의 맥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시조를 사경에 이르게 만든 것이 잘못된 현대시조작법이란 것들이다. 잘 못 가르치고 있는 현대시조작법이 대한민국의 국격을 낮추고 우리의 자존심을 망가뜨리고 있다. 이 당선된 시조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낮추고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문장을 볼 수 있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어는 현대에 사대주의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시조가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이다. 이 시어는 중국 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박지원의 굴욕적인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열하熱河가 바로 그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조를 보고 기껏 한다는 심사평이 "주제로 정한 시점이 과거이나 박제된 이야기로 흐르지 않고 동시대와 교감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은 형상화가 뛰어났다."며 극찬하고 있다. '동시대'의 필자는 결코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대'에 그들에게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을 향해 현재의 우리가 무릎을 꿇을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기가 찰 일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2012년 서울신문 당선 시조를 보고 우월감을 키우며 우리들을 향해 "너희 작은 나라가 뭐 별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너희 나라가 잘 사는 것 아니겠느냐. 잘 생각했다. 서해 앞바다도 우리에게 내놓고 우리 앞에 무릎을 더 낮게 꿇어라"라며 비웃지 않겠는가. 필자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 그래서 이런 꼴을 보는 것일까. 그러지 않아도 중국의 해상에서의 무력도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개탄하고 있는데, 이런 우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심사평이 나오는 것이 어찌 망국의 전령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서울신문 시조부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한분순과 이근배였는데 지난 해 심사위원도 한분순과 이근배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난 번 작품도 이번 작품과 같이 문장 기호 ','의 사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난해의 작품과 이번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심사평도 또한 지난해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필자가 지켜보겠다. 이제 한국의 시조단이 정신을 차려야 할 때이다. 시조는 국격과 관계된 아주 중요한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의 표현의 도구이기도 하다. 시조의 원류를 찾아 지켜라. 이제부터라도 잘 정리해서 새롭고 희망찬 힘의 강국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조단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서 우리의 시조의 혼을 되살려 내야 한다. 시조를 원형으로 회복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다.
- 박인과 문학평론가





박인과의 신춘평론…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 3
[뉴스와이어] 2012년 02월 03일(금) 오전 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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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 이메일| 프린트  (서울=뉴스와이어) 박인과 문학평론가는 창조문학신문에 신춘문학평론을 게재하였다. ‘신춘문예가 한국문학을 죽인다’라는 연재물의 3회째이다. 다음은 그의 신춘 문학평론이다. 

제목 :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한국문학을 죽인다 3 / 박인과 문학평론가 

시조에 대해 또 다시 필을 들 수밖에 없어 또 신춘의 미운 오리가 되려고 쓴다. 또 많은 시조인들과 시인들이 필자에게 항의를 할 것이고 궤도를 이탈한 논리들로 많은 분들이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좋다. 필자는 우리의 웅장하고 고결한 시조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그릇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어도, 용수철처럼 튀며 되돌아오는 그 논리 정연한 글들에 다 반박할 힘과 능력이 없어도, 다 받아들이겠다. 필자가 민족의 혼을 말살시킨 망국적인 현대시조의 칼을 맞겠다. 

필자의 신춘평론 연재의 두 번째에서는 “심사위원이 고정되어 있는 신문사 등의 신춘문예 심사에서 그 심사위원이 아는 자들이나 그 인맥들 중에 있는 자가 당선자로 결정된다면 이 또한 부당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그 후에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아 김종두를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시킨 한분순은 2011년 8월경 백수문학제에 참석하였었다. 그리고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당선한 김종두가 한분순이 참석한 그 백수문학제에서 시조 장원을 하였다. 또한 2011년 12월경에 신라문학대상 시조부문에 김종두가 선정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신라문학대상 시조부문 또한 한분순이 심사를 맡았다. 그리고 그 다음 달인 2012년 1월에 김종두는 한분순이 심사한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서 또 당선된 것이다. 필자는 그렇다고 해서 한분순이 백수문학제나 신라문학대상이나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김종두를 알아보고 그에게 높은 가점을 주어 당선 혹은 장원하도록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단지, 한 심사위원이 여러 행사의 심사를 맡거나 신춘문예 심사를 고정적으로 맡는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신춘문예나 여타 문학행사의 당선작 혹은 장원작을 단 한 편만 뽑지 않고 잘 창작된 작품이라면 여러 편이라도 뽑는 심사라면 이의제기를 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단 한 편만 뽑는 문학행사에서 심사위원이 아는 인맥에 의해 당선작 혹은 장원작이 결정된다면 많은 응모자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교상 시인은 필자의 시조 평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시조에서의 잣수는 다만 형식적 의미의 기저基底로서 유용하다. 단순히 잣수(音數律)로서 그 정형률을 헤아린다는 것은 억지스럽다. 3음절은 우리말의 기본적인 음절로서의 보편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때로는 위의 경우처럼 ‘나를?날’로 놓아 음절이 줄어들기도 하고 그기에 조사가 붙어 음절이 늘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에서의 기본 단위는 잣수가 아니라 음보 혹은 의미단위로 그 율격을 헤아려야 한다.//그리고 시조의 정형성은 인위적이면서 일방적으로 규격화된 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조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형定型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좀 더 여유로운 정형整形을 위한 음률音律을 내재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나라의 정형시定型詩와 다른 우리 시조의 덕목이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여기서 이교상 시인은 시조가 ‘정형整形을 위한 음률音律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시조의 음률에서 내재율을 강조하는 이교상의 시조에 대한 인식에서, 시조의 외형과 정형의 미학을 가벼이 다루는 반면에 자유시의 ‘내재율’처럼 시조에 대한 ‘내재율’을 더 강조하고 있는 그의 시조관에서 필자는 할 말을 잊었다. 한분순과 이근배가 심사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시조부문 당선된 이교상 시인에게 한 수 배우겠다. 

또 이교상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의 글을 읽고 먼저 평론가가 제기한 심사위원에 대한 입장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시조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심사를 맡은 고은 시인의 심사평 “당선작 시조는 종소리와 ‘청태눈물’이라는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을 이루었다”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 평론가는 “그러나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이 어디에 있는가. 시각적인 부분은 있어도 청각적인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가는 정확히 해야 한다. ‘범종 치듯’은 청각적 감각이 아니라 범종을 치는 행위 즉, 시각적 감각이다. ‘범종을 치듯’이 아니라 범종을 치고 종소리가 나면 그때서야 바로 청각적 감각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범종을 치지도 않았는데 무슨 청각적 감각을 운운하고 있는가”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평론가의 인식은 “범종을 치고 종소리가 나면 그때서야 바로 청각적 감각을 논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범종 치듯’ 속에는 시각적 감각과 청각적 감각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직접 ‘범종을 치’지는 않았지만 의존명사 ‘듯’은 ‘종소리’를 추측할 수 있는 의미를 함의含意하고 있다. 그러므로 ‘범종 치듯’은 공감각共感覺적 이미지가 내포된 詩語라고 할 수 있다. 심사평에서의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이라는 말은 곧 이 공감각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이렇듯 詩에서는 두 개의 감각이 서로 내밀하게 융합되어 형상화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한 차원 높은 시의 구조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보다 신선하면서도 창의적인 詩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이교상 시인은 언급한다. 그런데 이교상 시인의 해석은 논리적으로 문법적으로 잘못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겠다. 

이교상 시인이 ‘범종 치듯’의 ‘듯’이 의존명사로서 ‘종소리’를 추측할 수 있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고은 시인의 심사평을 두둔하고 있다. 평가는 정확히 해야 한다. 이교상 시인의 언변은 궁색한 변명 밖에 되지 않는 궤변이다. 왜냐하면 ‘범종 치듯’의 ‘듯’은 정확히 연결 어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존명사가 아닌 것이다. 의존 명사 ‘듯’은 명사이기 때문에 앞말과 띄어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어는 앞말과 붙여 쓰고 있다. 그것은 이 시어의 ‘듯’이 의존명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의존명사가 아니고 연결 어미로 사용되는 연결 어미 ‘듯’은 명사가 아니고 연결 어미이기 때문에 반드시 앞말과 붙여 쓰는 것이다. 이 연결 어미인 ‘듯’의 사용의 형태는 ‘잠자듯’, ‘꿈꾸듯’, ‘치듯’, ‘물 쓰듯’, ‘비 오듯’ 등을 거론할 수 있으며 의존명사의 ‘듯’의 사용의 형태는 ‘잠잘 듯’, ‘꿈꿀 듯’, ‘칠 듯’, ‘물 쓸 듯’, ‘비 올 듯’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이교상 시인은 한분순과 이근배가 심사한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된 경력이 있고, 한국시조문학도서관(부설: 시조대학)을 운영 중이다. 이교상 시인이 신춘 당선작에 대한 필자의 평론을 반박한 대로 ‘듯’이 의존명사가 되려면 고은의 심사평과 관계된 문제의 시어는 ‘범종 치듯’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범종 칠 듯’ 혹은 ‘범종을 치는 듯’이 되어야 하는 것이 명백하다. 물론 신춘에 당선된 시조가 ‘범종 칠 듯’이나 ‘범종을 치는 듯’이라고 되어있다면 그 ‘듯’은 의존명사로서 ‘짐작이나 추측을 나타내는 말’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 이상의 해석을 덧붙이면 안 된다. 신춘 당선 시조는 ‘범종 치듯’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범종 치듯’의 ‘듯’은 분명히 밝히지만 의존명사 ‘듯’이 사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교상 시인의 반박은 허구이다. 이교상 시인의 다른 반박 문장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견해와 다른 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필자의 졸작에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한다. 

인터넷 사이트 http://www.sjhik.com/technote6/board.php?board=F01&command=body&no=13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수(字數) 구수(句數)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이 일정하게 정해진 시가 정형시라고 국어사전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수의 음보와 악센트 소음절로 이루어진 시행(詩行)과 연구(聯句) 그리고 그 연을 반복하는 형식 따위는 정형시가 아니다. 정형시는 자수이어야 한다. 자수가 들쑥날쑥한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자수가 일정한 하이쿠가 바로 정형시인 것이다. 구수(句數)와 음보를 내세워 “시조는 정형시다”고 주창하는 무식한 식자의 트릭에 사기당한 것이다. 시조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광의(廣義)의 정형시에 머무른다면 시빗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할 것이다.”라고. 이 사이트에서도 한 수 배우겠다. 

어쨌든 시조는 시조이어야 하며 정형시이어야 한다. 그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리고 필자는 신춘평론 연재에서 신춘문예 등에 당선 혹은 장원한 작자의 글에 대해 기승전결이니 공감각적 표현이니 하는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작자의 글에 공감각적 표현이 있어야 하며 기승전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한 사실이 없다. 문장을 잘 판독해 보기 바란다. 심사위원이 기승전결이니 공감각적 표현이니 하면서 평한 것이 올바른 평인지를 필자는 따지고 있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오독하여 많은 자들이 필자의 신춘평론에 대해서 칼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있고 억지주장들을 펼쳐내고 있는 것들을 목도하고 있다. 필자의 글에 대한 평론가들과 문학박사들의 의견도 가지가지다. 찬반양론으로 분산되어 있다. 

어쨌든 반대쪽에서 필자의 글에 낫을 대는 반박의 행위도 관심과 사랑으로 보고 신춘문예적 담론으로서 기쁘게 수용한다. 그러나, 심사위원은 자격이 있는 자가 맡아야 한다. 

시조에 대한 열변을 끝내려고 했었는데, 이번에 중앙시조연말장원작을 들여다보며 이 글을 작성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다시 한 번 더 밝힌다. 중앙시조의 심사위원은 고정되어 있지 않을까. 거의 같은 사람이 심사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몇 사람이 번갈아가며 계속하여 심사를 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중앙일보와 샘터에서 필자는 80년대의 시조의 열기를 보았다. 중앙일보와 샘터에서 현대시조의 많은 유형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현재의 중앙시조의 빗나간 시조사랑을 짚어보고자 본고를 작성한다. 중앙시조의 신춘문예라고도 부르는 중앙시조 연말 행사의 장원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중앙시조 연말 장원작은 신춘문예의 시조 부문의 핵심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서 중앙시조의 귀중한 시조부흥의 행사의 결과물로 탄생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시조 부문의 장원작의 심사평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정말 답답하다. 필자는 시조가 심사위원에 의해 죽었다고 선언한다. 

이 작품의 작자는 시를 참 잘 썼다. 그러나 시조를 잘 창작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중앙시조연말장원의 작품은 제목이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로서 사계四季의 서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전문은 “이번 역은 여름역 초록그늘 여름역입니다/온도가 조금 올라도 모세혈관 불붙는 사람/심장을 던져버리고 내리시면 됩니다//눈빛마다 불이 붙는 가을역 곧 도착 합니다/南도 北도 한때는 저리 붉어 아팠는데/타는 몸 놓아버리고 바람처럼 내리세요//가슴에도 얼음 얼어 겨울역도 투명 하군요/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다음 역은 꽃잎 날리는 아지랑이 봄 역입니다/노랑제비 애기똥풀 별빛보다 밝은 마음/손끝에 하늘 물 들 때까지 활짝 펴고 날으세요”이다. 

심사위원은 “오승철·오종문·이종문·강현덕(대표집필 오종문)”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심사평 제목은 ‘소통 꿈꾸는 따뜻한 마음, 신인다운 발상 돋보여’로서 그 전문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은 매월 신문 지면에서 검증된 이들만 응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한 27명 141편의 작품을 놓고,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신인의 이름에 부응할 만한 신선함과 대성 가능성에, 기교보다 패기와 투철한 시정신의 사고와 감각에 주목하기로 했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4~5명의 작품을 선고한 뒤 논의 끝에 때깔만 화려하고 내용이 공허한 작품과 관념 서정, 제재가 진부한 작품을 걸러낸 뒤 최종적으로 ‘은행나무 친견(親見)’ ‘마하’ ‘고래역(驛)’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 등을 놓고 다시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유영선의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시조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고 나름의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단절된 세상과 소통을 꿈꾸면서 마음 시린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희망의 봄으로 안내하는 현실 서정의 참신함과 신인다운 발상이 돋보였다.// ‘은행나무 친견’과 ‘마하’는 감각과 이미지 처리가 물 흐르듯 유연했으나 관념 서정이, ‘고래역’은 패기가 돋보였으나 시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종장 처리의 안이함이 지적됐다. 최종심에 오른 이들의 정진을 기대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번 중앙시조연말장원작에 대한 시조 심사평은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고 나름의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단절된 세상과 소통을 꿈꾸면서 마음 시린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희망의 봄으로 안내하는 현실 서정의 참신함과 신인다운 발상이 돋보였다.”이다. 마치 자유시의 심사평을 보는 듯하다. 답답하다. 심사평이 이렇듯 이 장원작은 자유시가 되어있다. 시조가 아니다. 이 장원작을 읽어보면 마치 산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것이 시조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이 시조라고 인정한다면 시조라고 이름 지으며 자유시의 틀을 씌워 시조를 죽이는 것이다. 이 작품이 과연 시조의 정형화된 틀에 맞는 문장들로 체계 있게 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와집을 지을 때 기왓장 한 장 한 장씩을 제 자리에 놓듯 시조의 율격을 제 자리에 얹어 놓아야 한다. 이 작품은 그 시조의 흐름을 거의 깨트려 놓고 있다. 아니, 자유시를 시조라는 이름으로 붙여놓은 것이다. 

정형시의 시적 자유는 그 정형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손발이 3개씩 있거나 5개씩 있거나 혹은 1개씩 있다면 잘못된 탄생이다. 그렇듯 시조가 정형의 틀로 창작되지 못하고 자유시로 창작되었다면 그것은 시조의 잘못된 탄생이다. 정형화된 시조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시조의 잘못된 탄생은 그렇게 가르친 가람 이병기의 시조작법에서 비롯된 흉물이다. 가람 때문에 시조가 제 모습을 아직도 찾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많은 시조인들이 가람 이병기의 가르침이 마치 최고의 작법인양 읊조리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의 민족에게 그렇게 잘못 교육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시조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빨리 고쳐나가면 된다. 

중앙시조 연말 장원작의 심사위원은 “오승철·오종문·이종문·강현덕(대표집필 오종문)”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심사평에서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은 매월 신문 지면에서 검증된 이들만 응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한 27명 141편의 작품”을 놓고 심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 시조의 정형을 짓밟아버리고 시조마당을 “최고의 자유시 등용문”으로 변형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이 심사위원들에게는 시조가 정형시라는 의식이 아예 없는 것 같다. 가람 이병기 이후로 시조의 형식이 탈구되고 심지어 종장 1음보의 3자만 맞추면 시조가 된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현대에 시조는 있으되 시조가 없다는 아이러니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종장 1음보의 3자만 맞추면 시조가 된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의한다면 현대시조는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에서 처음 3자만 맞으면 그 소설 전체가 시조라고 할 수도 있는 기이한 시조괴물을 만들어내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아 온 것이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 가람 이병기의 시조에 대한 무지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가람 이병기의 시조 작법은 시조의 근본을 모르고 시조의 본류를 망각한 작위적이고 잘못된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현대시조들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가람 이병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조는 글자들을 마구 끌어 모아 배를 불리며 자유시처럼 창작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시조의 언어는 각 장에 마음대로 의미들을 불어대고 시조는 내재율로 승부한다는 괴이한 배짱으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풍선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수가 들쑥날쑥한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의 의도는 충분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시조는 정형시이다. 시조는 자유시보다도, 기존의 어떤 시적 질서보다도 더 절제되고 깊어진 우리만의 정형시의 노래이다. 가람 이병기는 그 점, 바로 시조가 노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시조의 정형의 틀을 깨는 작업을 주저 없이 했을 것이다. 자수를 잘 맞춘 정형시의 노래이어야만이 우리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시조의 본령인 것이다. ‘중앙시조연말장원작’처럼 자유시를 창작하고 우리만의 정형시의 노래 혹은 시조라고 한다면 중앙시조연말장원작과 비슷한 자유시를 창작하는 일본인과 한국인과 세계인들이 비웃게 될 것이다. 지금 시조의 장원작 혹은 당선작들을 두고서 시조를 공부하는 독자들이 비웃듯이 말이다.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았다고 하는 심사평의 표현에서 ‘몰개성하다’란 표현이 썩 잘 어울리는 표현인지 알아볼 일이다. 또한,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 시조의 정형의 정석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다. 그리고 또,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아서 이 작품을 심사위원들은 선정하였다고 하는 것인데 역시 이들의 의식엔 시조가 없다. 그러기에 ‘시풍’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시조 심사평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시 심사평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두고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았다고 평했는데 그것은 누가 봐도 잘못된 평이다. 심사위원이 시조를 알고 평하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 작품은 시조가 아니다. 시조의 탈을 쓴 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시조는 정형시인데 그 정형을 갖추지 않은 글이 어떻게 시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내재율을 운운할 것인가. 음보 혹은 의미단위의 율격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것인가. 이 글이야말로 시조의 격으로서는 몰개성적이고 시조의 정석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서 시조가 단연코 될 수 없다. 

중앙시조행사의 심사위원은 낙선작에 대해 “시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종장 처리의 안이함이 지적”되어서 낙선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장원작으로 뽑은 작품은 종장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살펴볼 일이다. “가슴에도 얼음 얼어 겨울역도 투명 하군요/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에서 종장은 ‘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이다. 이것은 종장 처리의 안이한 것이 아닌가. 이 종장이야말로 안이하게 처리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에게 종장은 ‘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가 아니라 그 위의 “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라고 할 것인가. 도치법에 의한 것이라고? 참으로 답답한 시조 심사법이다. 어떻게 해야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이야기를, 시조의 근본적인 몸체에 대한 이야기를, 본고에서 풀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시조의 근본을 제대로 아는 심사위원이 심사를 해야 시조가 부흥될 것인데 중앙시조는 시조부흥을 말하면서 시조의 견실한 부흥에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꾸만 죽은 시조를 양산해 내고 있다. 

그리고 ‘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견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환승하는 것하고 달빛 사다리가 어떻다는 것인가. 달빛 사다리를 타고 오르거나 내려와 환승하라는 것인가. 이렇게 애매한 작품이 장원작이다. 시조의 결은 어휘와 어휘 사이가 막힘없이 통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 등에서 막힘없이 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자유시처럼 그냥 대충 단어들을 던져놓고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경지를 독자가 알아서 해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시조는 이런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유시는 공감대 형성의 책임을 독자에게 일정 부분 떠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시조는 시절가조이다. 시조는 읽으면 읽는 대로 노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독자에게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작자는 아직도 시조를 창작하는 테크닉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는 또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필자가 참 초라해 보이고 또한 필자 자신이 독자로서의 1차원적인 한계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초승달의 허리에 무엇이 핀단 말인가. 그리움이 핀단 말인가. 어떻게 핀단 말인가. 아니면 초승달 같은 허리에 그리움이 핀단 말인가. 어떻게 핀단 말인가.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를 보자. ‘살풋’은 ‘살포시’를 나타내는 부사어일 것이다. 그 부사어가 ‘그리움’이란 명사를 꾸밀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살풋’은 어떻게 사용되는 것인가. ‘피는’은 ‘그리움’을 수식한다고 하더라도 ‘살풋’은 무엇을 수식하는 것인가. ‘살포시’는 부사어로서 ‘살풋’이 ‘안고’를 수식한다면 ‘허리에 피는 그리움 살풋 안고’로 되어야 한다. 작자가 어떤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독자와의 소통이 불가하다. 

이 작품이 바로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은 매월 신문 지면에서 검증된 이들만 응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한 27명 141편의 작품”을 놓고 심사했다고 자부하는 심사위원들이 뽑아놓은 작품이다. 시어들은 제 자리에 꼭 맞는 언어들로 완성되어 소통이 되어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글들은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심사평 제목은 ‘소통 꿈꾸는 따뜻한 마음, 신인다운 발상 돋보여’라고 적고 있는데 심사평이 가관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정형의 틀이 깨져있는 것을 보자. 정형의 틀이 깨지는 순간부터 이미 시조의 호흡은 멈춘다. “이번 역은 여름역 초록그늘 여름역입니다/온도가 조금 올라도 모세혈관 불붙는 사람”, “눈빛마다 불이 붙는 가을역 곧 도착 합니다/南도 北도 한때는 저리 붉어 아팠는데”, “가슴에도 얼음 얼어 겨울역도 투명 하군요/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다음 역은 꽃잎 날리는 아지랑이 봄 역입니다” 등 시조의 틀이 거의 파괴되어 시조의 본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심사위원들에게는 이 글들이 시조로 보인단 말인가. 이 글들은 시조로서의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져있는 죽은 시조이다. 이 작품이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은 매월 신문 지면에서 검증된 이들만 응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라고 자랑하는 곳에서 장원된 작품이다.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라고 자랑하는 중앙시조에서 최고로 시조의 정형의 사지를 갈라놓는 치욕적인 우를 범하고 있다. 2012년 신춘문예에 언급되는 시조들 중에서도 중앙시조는 거의 최고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 죽은 시조를 최고의 시조로 중앙시조연말장원작으로 선정한 중앙시조 심사위원들은 이미 자격 미달이다. 

한국문학 역사의 근본을 말살시키는 중앙시조행사의 심사위원들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들의 무분별한 시조 심사로 인하여 양산된 작품들 때문에 ‘한국문학의 시조의 최고의 강’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없으면 다시 옛 시절로 돌아가 시조에 대해서 다시 공부하고 혹독한 훈련을 받고 돌아와야 한다. 인터넷에서 시조의 변질을 개탄하면서 현대시조가 시조의 본류를 찾아가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인터넷 닉네임 ‘검정삿갓’에 의하면 심사위원에게 고시조의 탐독을 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인터넷 닉네임 ‘검정삿갓’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객관성은 요구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걸고 ‘검정삿갓’ 자신의 시조에 대한 견해들을 풀어내고 있는 내용 중에서 객관성을 무시한 ‘검정삿갓’ 자신만의 작위적인 해석과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대시조 앞에서 그만큼 강렬하게 잘못되었다고 부르짖고 있는 자를 다른 곳에서는 보지를 못하였다. 

시조나 자유시를 막론하고 인류의 문학적 감성과 영성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객관성은 오관五官과 영혼과 시대적 동질감에 의한 지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 글로서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오관과 영혼에 관여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도구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론가는 그 문학적인 전달 장치를 통하여 작자와 독자의 소통의 통로를 검색해야 하는 것이다. 영혼에 의해 전달되는 객관성이라 하며 나의 영혼은 그러하니 독자가 알아서 공감해라 하는 식의 무책임한 문학 행위는 작가와 독자의 소통의 통로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그런 작법 속에서 가치 있는 시적 효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작자와 독자의 전달 통로는 바로 글로써 표현되는 장치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조를 창작하는 많은 분들이 혹은 각종 문학행사에서 시조부문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이 ‘검정삿갓’의 객관성이 결여된 부분을 인지하고 접근한다면, ‘검정삿갓’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검정삿갓’의 사이트를 탐독하여 그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고 한 수 배우고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도화된 성역에 있는 그들이 성문 밖으로 눈길을 돌릴지는 미지수다. 

필자의 신춘평론이라 이름 하는 문장들에 대해서 너무한다는 시인들의 견해가 따르기도 하고 그와 반대의 경우가 있는데 후자의 경우가 대체적으로 많은 반응이다. ‘너무한다’는 반응에 대해서는 그 시인들이 특히 시조를 창작할 줄 모르는 시인들이 시조를 모르면서 시의 렌즈로 시조를 바라보며 하는 말들이기 때문에 일축한다. 또한, 시조를 창작하는 자라 할지라도 시조의 정도를 모르고 하는 말들이기 때문에 답변할 추호의 가치조차 없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자유시의 시창작적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으나 필자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시조를 두고 하는 신춘의 설전이다. 필자는 우리의 시조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낭떠러지 같은 위기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몸부림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다가 필자도 지치고 힘이 빠지면 인터넷의 ‘검정삿갓’처럼 아예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불안하다. 많은 시인들에게 몰매 맞아 죽는 것이 불안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시조가 제 기능과 자존심과 자긍심을 잃고 말살되어가는 것이 불안하다. 

필자는 깊은 산속 호수에서 용트림을 하는 용龍 한 마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용龍 한 마리가 맑은 호수에서 물방울을 퉁기며 놀고 있는데, 바다에서 망둥이들이 뛰고 있다. 깊은 산속의 중심에 자리한 맑은 호수에서 용龍 한 마리가 무지갯빛 물방울들을 흩날리며 놀고 있다고 그 큰 바다에서 망둥이들이 튀어오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웃긴다. 

필자는 우리 문학의 자존심인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학형태인 시조에 대한 필자의 신춘평론들이 완벽하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시조의 그 웅장한 힘에 대해 더 배워야 한다. 그러나, 미완성의 몸부림일지라도 어떤 심사위원이 신춘문예에 당선시켜줄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 뜨거운 신춘의 글마당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는 살벌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걸러지지 않은 문장들이 신춘의 열기가 꺼지기 전에 급강하 하다 보니 필자의 문장들에서도 잘못이 있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필자도 살아남아야 하는 목표가 있지만 불확실하다. 사실은 필자는 혼자이고 모두가 적이다. 필자의 이 평론이란 이름하에 깃을 댄 결코 평론일 수 없는 평론의 행위들이 칼날처럼 살벌한 것임을 혀가 닳도록 인식한다. 서로의 이익 관계에 의해서 상충되는 여러 의견들이 지금은 송곳처럼 여기저기서 필자를 겨누고 있다. 심지어 협박까지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쟁점들이 지나가고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다음 후대에 한 평론가가 나타나 박인과를 겨눌 것이다. 지금보다 더 평등한 한국문학의 정통성의 잣대로 박인과의 신춘의 어설픈 문장들의 목을 겨눌 것이다. 필자는 그때를 기다린다. 

글/ 박인과 문학평론가 



보도자료 출처 : 창조문학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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