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과 정서

2008.03.28 13:31

권태성 조회 수:540 추천:52

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오래곤 문학회에서 매달 열리는 정기 모임에 회원 한분씩 자신의 문학과 정서에 대해 발표할 기회를 같기로 했다.
나는 내 문학과 정서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 먼저 어릴 적 나의 꿈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추억을 더듬어 찾아 보았지만 아무 것도 떠 오르는 것이 없었다.
국민학교의 학생들에게 장래의 꿈을 물어 보면 대개가 대통령이나
장군, 의사 아니면 돈을 많이 벌겠다는 등 속된 말로 잘 나가는
직업을 들게 마련이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국민학교 시절까지 나에겐 무엇이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는 것이 내 스스로에게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아마도 너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굳이 꿈이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에게 마음의 고향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나의 조부모님이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이주해서 정착하시고
나의 아버님을 비롯해 3남 2녀를 낳고 기르시었으며 내가 밑에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국민학교 2학년까지 조부모님 밑에서 살았던 전북
장수군 장계면 송천리로 우리는 흔히 새터라 부르는 곳이다.
덕유산 자락에 자리 잡은 새터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오는 산골 마을이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겨울이면 동네 개들을 데리고
깊은 눈 속에서 동작이 부자연스러운 토끼와 노루, 꿩 사냥을 즐겼고 추위에 얼어 붙은 마을 앞 논에서 추위를 잊고 썰매와 팽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여름이면 산에는 머루 다래 칡 등 먹을 거리가 풍부했으며 미역 감고 물고기 잡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는 언제나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터 였다. 이곳 친구들과는 지금도 귀국 때마다 가끔 어울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한다.
또 다른 한 곳은 전주 사범을 나오시고 전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셨던 아버님이 어떤 이유에선지 전주에서 할머님의 고향인 경남 하동군 옥종면의 중고등 학교로 직장을 옮기시면서 2학년 2학기부터 5학년까지 아버님이 다시 전주로 직장을 옮기시기 전까지 살았던 하동군 옥종면 양구리라는 마을이다. 옥종면의 월횡리는 할머님의 고향으로 그 당시 할머님의 동생이 면장으로 계셨고 진양하씨인 할머님 친정 형제들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마을은 큰 대나무 밭이 있어 죽순 철이면 대나무 밭 울타리 밖으로 솟아난 싱싱한 죽순을 따다가 살짝 삶아서 나물 무쳐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 었다.  해 질 무렵이면 참새들이 떼지어 날아 와 대나무 숲에 둥지를 틀고 참새들의 군무와 요란한 재잘거림 속에 밤이 깊어 가곤 했다. 뒷산엔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백토 광산이 있어서 농사철이 아닐 때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 주었고 어린 우리들에겐 색다른 놀이터가 되어 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에 대해 아무런 압박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 와 책가방 던져 놓은 순간부터 배가 고파 집에 돌아 오기까지 친구들과 산과들, 강으로 지칠 줄 모르고 뛰어 놀았다. 새터에서 조부님 사랑 듬뿍 받으며 자랄 때도 그랬고 옥종으로 옮겨와 부모님 밑에서 자랄 때도 내가 커서 뭐가 되겠다는 꿈이나 욕심은 생각해 본적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 자연 속에 널려 있는 무한정의 놀이감에 푹 빠져 지냈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같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자연 속에 널려 있는 무한정의 놀이감들, 나에게 이 이상 더 바랄 꿈이 있을 수가 없었다. 행복 했었기에 꿈이 필요 없었고 꿈이 없었기에 행복 했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6학년 때 아버님이 다시 전주로 직장을 옮기시고 가족과 함께 큰 도시로 옮겨온 시골 소년은 수난의 시대가 시작 되었다.
부담 없고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해 있던 시골 소년에겐 복잡한 도시의 풍경과  시골의 순박한 친구들과는 달리 낯설고 영악한 도시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힘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여유롭던 시골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도시의
극심한 생활 경쟁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잃고 자주 다투시는 일이 일어나고 이제까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이러한 상황들은 순박한 시골 소년에겐 감당하기 힘든 아픔으로 다가 왔고 그러면 그럴 수록 두고 온 시골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틈만 나면 새터 고향을 찾아 마음을 달래곤 했다. 하동은 너무 멀어 갈 수 없었지만 새터 고향은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조부모님께서 살고 계셨으므로 자주 찾아가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지금 지나온 내 인생의 역정을 회고 해 보면, 결국 내가 추구 했던
모든 것은 어린 시절의 그 고향, 어느 날 갑자기 잃어 버린 행복 했던 그 시절을 다시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다.
사춘기를 겪고 성년이 되어서도 그리고 대학과 군대를 거쳐 이민까지 이어지는 내 인생의 긴 여정에서 어느 한 순간에도 이 두고 온 고향과 그 행복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나는 잊어 본적이 없다.
그 행복 했던 시절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
아니면 비록 그 옛 고향이 아닐지라도 새로운 땅 어디에라도 다시
이루어 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어릴 적부터 해외로 눈을 돌리게
했고 아마도 여기까지 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단지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이 그리움들, 그리고 내가 꿈꾸어 왔고
희망했던 것과는 상관 없이 내 앞에 전개되는 삶은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았기에 번번히 다가 오는 좌절감과 무력감 속에서 그 그리움과 삶의 고통을 글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나는 내가 쓴 시나 글이 좋은 글이냐 아니냐는 그리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단지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내 내면에 존재하는 것들, 그 것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아니면 자랑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간에, 있는 그대로 내 내면의 소리에 충실 하려 노력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나는 내 내면의 갈등을 글로 옮김으로써 폭발의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동시에 위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제 황혼의 나이로 접어든 지금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가슴 앓이를 할 때가 많다.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나를 고독하게 하지만 나는 가끔은 그 고독을 즐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틈나는 대로 자주 혼자서 산을 찾아 홀로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자연 속에서 내가 고독하다는 것을 느낄 때 자연은 기꺼이 내 친구가 되어 준다. 내가 유년의 시절에 느꼈던 행복은 결코 물질적 풍요에서 얻은 것이 아니었고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 순수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질적으로 풍부해 졌지만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그 순수함을 잃었을 때 나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혼자 사는 생활이지만 나는 외출 했다 집에 돌아 오면 쓸쓸하다는 느낌 보다는 그렇게 아늑하고 편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느낌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룰 수 없는 꿈과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이겨내고 내 마음에 평화를 얻어가는 과정이리라 생각한다.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14,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