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임승차

2007.01.19 01:44

이성열 조회 수:769 추천:37

[단편소설]             -무임승차-                이성열 작

    널따란 작업실내에는 커다란 탁자들이 나란히 놓여있고 그 탁자들 위엔 큰 몸뚱어리의 기계 골격들이 반듯하게 혹은 옆으로 누운 모습으로 얹혀있다. 이미 배선 작업이 끝났거나 작업이 시작되지 않은 기계들은 외부로부터의 접촉이나 또는 쌓이는 먼지를 막기 위하여 희고 넓은 광목 천으로 덮여있어, 마치 죽은 거인들의 시체라도 방치해 놓은 듯 보였다. 그 탁자 둘레로는 셋 혹은 넷의 종업원들이 둘러앉아 각기 치밀한 모습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넓은 방 구석에는 마치 은행 창구처럼 유리로 칸막이가 된 사무실이 있고, 그 너머에는 사무원으로 보이는 여자 두엇과 그리고 감독들이 수시로 창밖으로 작업실을 응시한다.
아니, 비록 감독들이 그렇게 심하게 주시하는 일은 없다하더라도 이미 종업원들의 뇌리에는 그렇도록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누구라도 감히 그곳을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재수 없을 감독중 하나의 눈과 마주칠 것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였다.
한 낮이긴 하지만 작업실엔 창문이 없이 천장까지 치올려 쌓은 불럭으로 밖과 차단되어 있어서 햇빛이라곤 한 점도 들어올 수 없었고, 천장에 가득 달아놓은 형광등 불빛이 가끔씩 피워 올리는 땜납 연기 발을 빨아올리고 있었다.
중년을 조금 넘어선 장기선 씨는 밤색 머리 여자들 셋과 한 조가 되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부터 눈이 아물거리도록 색깔에 맞추어 가느다란 철사 선을 기계 판에 들러붙은 못 같은 접선 부분에 감아대고 있었다. 마치 장난감 총과도 같은 이 연장은 기술 혁신 덕분으로 전 같으면 뜨거운 인두와 땜납만으로 매대기쳐야했을 그 많은 접착 부분을 쉽게도 감아 작업 능률을 놀랍게도 개선하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아침부터 수 천 수만의 철사 선을 색깔에 따라 분류하고 접선시켜 온 장씨의 눈은 지칠 대로 지쳐 피곤해져 있었다.
장씨는 눈을 들어 벽에 붙은 커다란 벽시계를 보았다. 휴식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음식 파는 트럭이 대기하고 있고, 장씨는 그곳에서 '부리또'와 음료 하나를 사들고 자신의 낡은 승용차인 포드 승용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이제부터 약 30분, 이 시간이 장씨에겐 작업 시간 여덟 시간 중 가장 호젓한 자유시간이다. 지금부터 빨리 이 멕시코 음식인 부리또 뭉치를 먹어 치운다. 그리고는 음악을 들으며 잠깐 오수에 빠진다. 차안은 이미 열어놓은 창문으로 미풍이 감미롭게 불어 들어왔다. 장씨는 손을 뻗어 아직도 괜찮은 소리를 내주는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었다. 잠이라도 청해 올 듯한 나른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차안을 가득 메어왔다. 가사가 없는 경음악,'어니스트 러브유'라는 멜로디가 장씨의 귀를 감싸고 구르다가 사라져 갔다.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장씨가 선잠에서 깨어나 듯 무거운 몸으로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같은 조에서 일하는 여자 폴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당신 탐슨 감독이 강등, 전출되었다는 사실 알아요?"
장씨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 듣는 소식인데...."
"그는 이미 어디 모르는 곳으로 갔답니다."
"거기가 어디요?"
"그걸 누가 알아요! 비밀이라는데."
이는 좀 뜻밖에도 빠른 결과였다. 그가 이곳으로 전출 온 지는 불과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었다. 물론 그의 관리 방법이 좀 편파적인 감을 느끼게 하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마이너리티(소수계)인 장씨에게는 더욱 그랬다.
탐슨이 처음 이 사무실로 전출되어 왔을 때 그는 관할 모든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었다.'나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돌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모든 종업원들이 나에게 협조만 해 준다면 나도 내 모든 힘을 다하여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우리 모두는 그만큼의 어려운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으므로 협조를 바란다.'
언젠가 장씨가 경험했던 또 다른 흑인 감독의 경우와는 달리 탐슨은 좀 까다롭고 복잡하다는 인상을 주었었다. 그의 체격은 비계 층이 없는 제법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었으며, 키는 큰 편이었고, 얼굴은 돌로 깍은 듯이 각이 진 네모형이었다. 머리는 곱실거려 잘게 무뉘진 듯 올백으로 빗었고, 콧수염은 짧게 길렀으나 입 양쪽으로 인중 훨씬 아래까지 길러 말총이라도 걸어놓은 모양을 하였다.
다른 종업원들은 그가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개는 모든 것이 수월하게 돌아가는 걸 좋아한다는데 에 만족한 표정을 짓고, 좋아요! 좋아! 할뿐이었다.
이것이 장씨가 받은 그 직후의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종업원 모두는 이미 전임 감독의 까다로운 원칙 이론에 신물들을 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는 곧 잘 돼먹지 않은 억지 이론을 내세워 가지고는 종종 종업원들에게는 먹히지도 않는 말을 하곤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 몫의 작업을 끝낸 종업원이 휴식이라도 취하고 앉아 있는걸 보면, 어느새 그는 다른 일 보따리를 들고 그에게 다가와서는 더 많은 그 일을 해주기를 요구했었다. 물론 그 종업원의 입에선 내 책임을 완수했는데 무슨 일을 또 하란 말이냐는 식으로 항의를 했다. 그러면 그는 한다는 말이,'장사를 하는 가게에서 일을 한다고 가정해 보라 .경기가 좋아서 오전 중에 이미 하루의 매상치를 다 팔았다고 해서 오후부터 문을 닫아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해서는 종업원들이 그가 돌아갈 때는 등에다 대고 주먹 떡을 먹이고는 했던 것이다. 도대체 감독쯤 된 놈이 종업원들의 사기를 돋워 줄만한 말 한마디는 못할 망정, 일 좀 더 시키겠다고 야박하고 무식한 이론을 가지고 노동을 착취하려 수작을 부린다는 거였다.
그런데 장씨는 새 감독의 나중 말에도 어떤 협박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즉 '그렇지 못할 경우는 우리 모두가 어려운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 그거였다. 탐슨의 이 말은 왠지 그의 뇌리에서 쉽게 떠나버리질 않고 계속 잔해처럼 남아 있었다.
탐슨은 부임한 이래 우선 그의 사무실부터 이색적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무슨 종족 우월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벽에다 역대의 아프리카를 이끌어 온 뛰어난 왕들의 초상화를 나열해 붙여 놓았다. 그 중에는 물론 크레오파트라의 초상화도 있었다. 그는 또 장군 한니발의 그림을 달아놓고 '최초로 세계를 정복한 한니발은 바로 흑인이다'라는 말을 그림 밑에다 달아 놓았다. 그러면 백인들은 그 그림을 보고는 비웃는 건지 뭔지 비죽이 웃고는 지나치곤 했다.
그는 모든 관리 방법에서 변칙을 많이 사용했다. 그는 이제까지 분화되어 왔던 작업을 공정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종업원들로 하여금 순번으로 돌아가며 할 수 있게끔 했다. 외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일만 하더라도 이제까지는 특정한 여직원이 도맡아 해 왔었다. 그래서 장씨처럼 외국 발음 악센트를 가진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는 자기의 차례가 올 리 없으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탐슨감독이 온 이후부터는 장씨도 예외 없이 그 일을 맡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이제 와서 교환수 노릇까지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어줍잖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말이 시원치 않으니 공포감 같은 것도 느꼈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남에 따라 그런 공포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장씨의 오랜 경력에서 오는 상황판단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곧 조직의 해이 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탐슨감독이 소신껏 자기의 관리 방법을 밀고 나가는 동안, 소위 공평한 작업의 분배랍시고 특정하게 기량에 따라 분화되어 있던 작업을 여러 사람에 교대시킴에 따라 모든 분야에서는 적지 않은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는 공평하다니 좋은 방법일지 모르나 그 시작에서 오는 부작용은 적지 않았다.
그래도 탐슨감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대범하게 자기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바로 이 점을 장씨는 알아차린 거였다. 감독이 알아서 밀고 나가는데 그가 발음이 나빠서 또는 일이 서툴러서 외부인 들에게 불편을 준 들 무슨 대수인가. 모든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는 식의 배짱이 생겨났었다.
그러한 배짱은 그의 적지 않은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지긋한 나이와도 무관하지만은 않은 일종의 여유였다. 감독이래야 이제 겨우 나이 30대의 아이들이 와서 까부는데- 하는 식의 여유가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새 감독의 변칙은 그쯤으로 끝나질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인 셈이다. 그것들은 단지 전통적으로 해 오던 방법을 변경함으로서 얼마간의 부작용이 있었을 뿐이지만, 공평하다는 대의 명분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장씨가 좀 당황했던 일은 종업원의 현장 파견 문제를 놓고 탐슨이 취한 태도였다.
유난히 더웠던 어느 날 오후였다 .더운 날씨에 바람조차 불지 않아 몸에는 습기가 느껴지고 불쾌지수 마져 높았던 그날 오후, 장씨가 한참 주어진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어느 틈엔가 그의 옆에는 탐슨이 와서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무심히 배선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헤이, 미스터 챙(이들은 장의 발음을 이렇게 했다)나는 당신이 오늘 현장엘 좀 나가주길 바라는데-'하는 거였다.
그제야 옆에 누가 있었다는 사실에 무안해진 그는 고개를 들고 그를 살피며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다.'내가요? 싫소!'
장씨는 되려 좀 어이가 없었다. 이 직장에서는 전례가 아무리 감독이라 해도 자기의 임의대로 누구를 지적해서 어디로 가라, 또는 무엇을 하라, 하고 할 수가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미국 직장이면 어디서나 적용하는 고참 권의 인정때문인데, 즉 먼저 회사에 들어 온 순서대로 그들의 의향을 물어 본 다음, 고참들이 그 일 하기를 원치 않을 때는 거꾸로 제일 늦게 회사에 들어 온 순서에 의해서 본인의 의사를 불문하고 회사의 필요에 의하여 명령에 응하게 되어 있었다.
직장의 규범도 그렇고 전례도 또한 계속 그래 왔던 터라, 그러한 경우에 싫소! 라고 응답하기는 당연한 거였다. 미국 직장 생활 처음엔 상사에게 좀 건방진 태도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장씨는 이제까지 그렇게 보아왔고 또 알아서 적응해 왔었다.
헌데 감독의 얼굴 표정을 살피던 장씨는 그가 오히려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곧 탐슨이 처음 종업원들에게 했던 그 말이 생각났다. 즉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 만큼의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이라는 협박 비슷한말의 내용이었다.
장씨도 곧 입장이 난처해지고 있었지만, 뱉어 논 말이야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했던 말이 생각 키우자 그는 곧 뒤가 물러짐을 느꼈던 것이다. 공연히 이까짓 사소한 일을 거절했다가 앞으로 모든 그가 한 일을 트집이라도 잡는다면 자신이 몇 배로 불리해지고 만다는 걸 과거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 경험이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지금 와서는 기억해 내기조차 구차할 정도로 오래 된 일이지만, 그때의 조그만 마찰로 인하여 그가 받은 고통은 그리 쉽게 잊혀지질 않았다.
그날은 주말의 하루를 초과 근무하기로 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물색 없이 너무 일찍 새벽잠에서 깨었던 장씨는 아직도 출근을 하려면 두어 시간 남짓 남아 있음을 알았다. 그는 옆에 누운 아내의 핀잔까지 받아가며 불을 밝히고 읽다 팽개쳐버린 신문을 다시 꺼내 뒤적이며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는 식당에 나가 늦게까지 주방장 보조로 일하기 때문에 언제고 늦잠을 자야만 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가량 누워 있었을 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이른 새벽인데 무슨 전화가 걸려올까 하고 그는 무심히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상대방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당시의 감독 래어리라는 사람의 것이었다. 왜 시간이 되어도 일하러 나오지 않느냐는 거였다. 아직도 한 시간 가량이나 남은 줄 알고 있던 장씨는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일하기로 한 시간은 8시로 알고 있는데...'하며 장씨가 주섬주섬 단어를 늘어놓자 상대편에서는,'아니지-'7시였지. 여하튼 빨리 일하러 나오도록...'짧게 이렇게 말하며 전화는 끊겼다. 장씨는 좀 납득이 가질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전화유? 죽은 듯 누웠던 아내가 고개를 쳐들고 물었고,'빨리 일을 나오라는 군.'하고 장씨가 답했다.'아침은 어떻게 하구요?''필요 없어. 나가서 사먹든지...'그는 서둘러야 하므로 이렇게 아내의 말을 잘랐다.
직장은 불과 그가 사는 아파트로부터 10분 거리였다. 밖은 이미 활짝 밝아 있었고, 허겁지겁 차를 몰고 회사 작업실에 나가보니 정말 장씨의 일할 상대로 단이라고 불리는 종업원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7시라고 해도 불과 30여분 사이였으므로 작업에 큰 지장을 초래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 일을 오후 3시까지 무리 없이 마칠 수가 있었다.
3시가 되었을 때 단은 이미 일찍 집으로 돌아갔으므로 장씨는 혼자라도 남아서 나머지 반시간의 작업을 더 해야 할텐데, 그날 일 파트너도 집으로 가 버렸고 남은 일도 없고 해서 그는 할 수없이 이태리계 사람이라는 래어리 감독에게 갔었다. 그래서 남은 반시간의 작업량을 다시 받던지 할 참이었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여서 교활해 보이는 래어리는 혈색 좋은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장씨는 그에게로 다가 가 인사를 건네었고,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반색을 하며 맞아주었다. 장씨가 그에게,'일은 다 마쳤고 아직도 반시간 정도가 더 남았는데, 어떻게 할지-.할 일이 더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알고 있소. 지금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는 흔쾌히 장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대답은 기대 밖의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분과 초를 따지는 이곳 직장에서 반시간이나 남겨놓고 그냥 가도 좋다니, 도무지 믿어져지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이요? 지금 말한 거 확실한 겁니까?'
장씨는 듣던 중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재확인이라도 하듯 다그쳤다.
'물론이지. 어서 가시요.'
장씨는 전례가 드문 감독의 너그러움에 그만 탄복하여,
'당신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요! 고맙소이다.'
이렇게 말하며 앉아있는 그의 등까지 토닥거려 준 후 돌아서려는데,
'그렇지만 작업 시간표엔 30분 늦었다고 기재하지요!'하는 소리가 그로부터 들려왔다.
그 말은 돌연 기뻐하던 순간의 장씨의 기를 꽉 막아 놓았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벌어진 입은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당신 오늘 아침 반시간이나 늦지 않았소?'
감독도 이미 밝던 표정은 오간 데 없고 얼굴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은 금세 서로 믿던 사이가 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난 오늘 늦지 않았소! 어제 당신과 8시에 나오기로 약속했을 뿐!'
'그건 그럴 리가 없어! 당신 때문에 단이 아무 일도 못하고 30분 동안이나 기다리지 않았소?'
'그건 난 모르는 일이오. 어쨌든 내 기억은 8시가 분명하니까. 사실은 오늘 아침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어도 8시가 되기를 무료하게 기다렸단 말이오. 나는 늦었다고 시간표에 기재할 수가 없소.'
그는 자신의 기억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분명 내일 몇 시에 나와야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8시라고 말했고, 그랬기 때문에 새벽 6시에 깨었어도 자리에 누워 낡은 신문을 뒤적이며 까지 시간을 죽이려 애쓰지 않았던가.
그는 이 녀석이 교활한 자라는 소문은 들은 바 있지만, 우연치 않게  이렇게 자신이 함정에 빠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지각을 스스로 인정시켜 근무 성적에 반영하려는 그의 의도에 장씨는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의 지각이 인정되면 하루의 무단결근이 되어버린다. 그럴 경우 회사에서 있을 전출이라든가 진급, 그밖에 자신이 원하는 출장은 여러 가지 우선권을 근무 성적 불량으로 빼앗기고 만다.
레어리 감독은 이미 허옇던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장씨가 말했다.
'난 지금 가지 않겠소. 반시간의 일거리를 주시오.'
'일은 다 배당되고 없소. 그렇다면 반시간을 어디에서고 당신 맘대로 보내고 가시오.'
그는 일단 장씨에게 양보를 하는 듯 했다.그렇지만 그는 화를 못  참는 듯 얼굴이 붉게 물들어 변할 줄을 몰랐다. 장씨는 확신을 가지고,'난 분명히 기억하지만 8시로 알고 있었소.'라고 말하고 돌아서서 문을 차버리고 방을 나와 버렸다. 그도 역시 화가 치밀어 가실 줄을 몰랐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할녀석, 선심 쓰는 척 하면서 직원을 구렁텅이에 빠뜨리자는 교활하고도 질 나쁜 놈같으니.
'까뎀!'장씨는 침을 뱉듯이 내씹었고,20여분 후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날은 그런 대로 무마가 된 것처럼 보였다.
다음 월요일이 되어 회사에 출근한 장기선 씨는 자기 차례에 해당되지 않는 일이 돌연 그에게 배당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냥 무심히 넘어가려 했다.
그러한 일은 말하자면 궂은일들이었다. 예를 든다면 다른 직원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시키는 대로 제때 제때 연장들을 날라다 주어야하고 또 쓰고 난 후에는 그것들을 책임지고 제자리에 정리해 두어야한다. 뿐만 아니라 작업장을 치우는 일까지도 맡아서 책임을 져야한다. 이런 일이란 일의 성질이 타인 의사에 의해서 움직여야하므로 자존심과 어울러 마음을 상할 때가 곧잘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누구나 그 일 맡기를 꺼려했다.
관리 진에서는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그 일을 매 직원마다 순번으로 일주간씩 맡아하도록 배당해 온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그 일이 연거푸 두 주 째 장씨에게 배당되었을 때야 그는 비로소 이것이 레어리감독에 의한 보복 조치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분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장씨는 곧장 감독에게 달려갔다. 사태에 대하여 만반의 준비라도 하고 있은 듯, 그는 뻔뻔스레 앉아서 달려오는 장기선 씨를 노려보았다.
'왜 고의적으로 당신은 계속해서 그 일을 나에게만 배당하는 거요?'
그는 이렇게 큰소리로 주위 사람도 의식하지 않은 듯 마구 퍼부었다.
'그래서 당신 작업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거야?'
감독은 능청스럽게 이렇게 말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곧 이어 서랍을 뒤지는 척 딴전을 부렸다.
'작업을 거부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당신은 내가 이렇게 부당한 처사를 당하여 최선을 다 하여 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되겠고, 만일 앞으로 계속 이렇게 부당하게 차별을 한다면, 나는 당신 상관과 그리고 노조에다 이 일을 보고 할거요! 당신은  관리자로서 공정하지 않으므로 자격이 없다는 것을!''오케이, 마음대로 해 보라고!'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추스렸다.장씨는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공격은 해 놓았지만 그러고 나니 그의 마음도 몹시 편치가 않았다.
오전 일찍부터 이렇게 열을 토한 후 장씨는 자기의 일자리로 돌아갔으나 쉽사리 일은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그는 분함과 걱정으로 마음이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본의 아니게 생긴 일이긴 하지만 직속상관과 대치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게 없을 거라는 건 뻔한 이치였다.
공공연히 직원들은 장씨 문제에 대하여 이렇쿵저렇쿵 말하기 시작했다. 대개는 겉으로 그를 동정하는 척 했지만,사실은 흥미 있다는 태도로 물 건너 불구 경이나 하는 식들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장씨는 잠까지 설쳐가며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리 치고 저리 쳐서 계산을 해 보아도 결론은 그 자신에게만 손해가 미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필경 이번일 을 장씨의 근무 성적에 반영시키고 근무 태도가 나쁘다는 소문을 회사관리진에 퍼트릴 것이다.
생각 끝에 그는 자신이 레어리감독을 피하는 수뿐이 없다는 결론을 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작업 시간을 바꾸어서라도 자신이 다른 감독 산하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우선 장씨에게 좋은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다음날 회사에 나간 그는 기세 좋게 근무시간 변경 신청서를 인사과에 제출했다. 태연한 척하며 인사과로부터 그걸 받고있는  감독의 당황하는 표정을 엿보며 그는 내심 고소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됨으로서 그는 그의 산하의 좋은 일꾼 하나를 빼앗기고 마는 결과가 됨으로 장씨의 그 결정은 래어리감독을 난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씨의 근무시간 변경 신청은 의외로 빨리 처리되었다. 때마침 밤번인 야간에 공석이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곧 야간 조에 속하게 되었고, 싸움은 일단 장씨가 승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업원들은 그가 승리하게 된 일화를 여러달 두고 이야기 거리로 삼았으며 잘한 짓이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하기 쉬운 말들이야  직원이 감독이 싫어 그를 차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는 식으로 오르내리고, 장씨가 선수를 써서 못된 감독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버린 것처럼 오갔지만, 역시 오랫동안 손해를 본 쪽은 장씨 편이었다.
사실 장씨로선 야간 근무가 힘이 든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그것을 견뎌내기란 듣고 상상했던 바를 훨씬 능가하는 문제로 그의 피부에 와 닿았다.
밤일을 시작한 처음에 그는 낮에 잠을 자는 문제가 차차 버릇이 되면 괜찮으려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낮에 잠을 자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주가 지나도 몇 달이 지나도 그의 수면 부족 현상은 여전했고, 그로부터 쌓이는 피곤은 그의 온 몸 구석구석에 먼지처럼 쌓여갔다. 그의 신경과민 현상은 등만 땅에 대면 잠을 잔다는 그런 사람과는 달랐고, 날이 갈수록 불면증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낮에 자는 잠이란 늘 깨어있는 상태에 눈만 붙이는 형식에 불과했다. 그래서 피곤은 늘 그의 체내 구석구석에 쌓였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늙고 있다는 걸 느낄 정도였다. 옆에서 보다 못한 그의 아내는 다시 낮 근무를 지원해보라고 종용했지만, 레어리가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한 장씨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렇게 장씨는 그후 1년 반, 레어리가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갈 때까지 밤번을 버텨내기 위하여 안간힘으로 허우적댔고, 이 사건은 그가 미국 직장에서 감독과의 사소한 알력 때문에 결국 자신만이 피해를 본 산 경험이 되었다.
그 이 후부턴 자신도 모르게 직장에서 상관과 대치하는 문제라면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온 장씨였다.
그래서 장씨는 '협조하지 않는다면'하던 탐슨의 말을 다시 상기하기에 이르렀고, 곧 그의 태도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시 감독에게 물었다.
'나 혼자서 현장에 가라는 건 아니겠죠?'
이렇게 돌연 그의 태도는 누그러졌고, 조심스럽게 그는 감독의 의중을 살폈다.
그러한 장씨의 질문은 형식적인 말이었다. 왜냐하면 현장에는 의례히 다른 과 소속의 특수 기술자와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상기하게되자 갑자기 뒤가 물러졌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감독에게 굴복하고 있었다.
'물론 아니지, 토니와 함께 가게되지.'
'오케이, 그러면 내가 가지요.'
마지 못하는 척하며 장씨는 그 일을 승낙했다. 그러니까 그의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탐슨은 우연이건 고의건 힘들고 궂은일을 시킬 때는 모두 장씨만을 이용했다. 그래서 장씨는 이제 그가 나타나기만 해도 은근히 겁이 났지만 번번히 그를 피하지도 그가 시키는 일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어쩌다 일의 양이 많아 장씨 혼자로서는 해내기 힘들다는 난색을 보이면 탐슨은 겨우 마음 좋기로 유명한 얼이라 불리는 백인 아이를 불러 협조해주라고 하고는 꼬리 잘린 도마뱀 모양으로 사라지곤 했다.
처음에 장씨는 탐슨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도맡아, 특히 해내기 어려운 일까지, 자신에게만 맡기는 거라고 애써 좋게 생각해보려고 노력도 했었다. 그리고 탐슨도 그의 앞을 지나칠 적마다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그의 등을 토닥이며 '이를 썩 잘 한다'든가, 또는 '너는 참 좋은 사람이다'라든지 하여 그를 값싸게 부추기곤 했다.
얼마 전 해내기 힘들고  골치 아픈 작업 배당을 한 아름 안고 장씨에게 왔던 로즈라는 여자 사무원에게 이렇게 푸념을 한 적이 있었다.
'왜 하필이면 당신은 나에게만 이렇게 많은 골칫거리를 배당하는 거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멀리 탐슨을 가리켰다.
'내 탓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탐슨 씨가 당신에게 배당하라는 지시 에요!'
'이런 제길 헐...'
'왜 그런지 알아요?'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당신이 조용하게 일만 하니까 그래요.'
어처구니가 없어진 장씨는 로즈를 쳐다봤다.
'그게 사실이요?'
'사실이고 말고요. 불만이 있으면 입을 크게 벌려서 불평을 해야해요. 조용하기만 하면 그는 당신이 모든 일에 만족하는 줄만 알거든요.'
장씨는 그녀가 약이라도 올리는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난처한 모습으로 머리를 긁었고, 그녀는 일거리를 던지고 돌아갔다.
생각해보면 장씨가 이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젊은 애들은 곧 잘 이런저런 일로 그를 면박하길 좋아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한없이 처량해 짐을 느껴야 했다 직장 생활이란 나이에 걸맞은 지위나 자리로 옮겨가며 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 이민부터가 늦은 나이에 시작한 장씨에겐 이 사회에서 영원히 지체아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나이 어린 젊은 애들과 한 팀이 되어서 일해야되고 때로는 그들의 조롱과 충고도 받는다.
바바라라고 불리는 괴짜 여자가 있다. 언젠가 장씨는 이 바바라와 또 티격태격 다툰 일이 있었다. 일의 순서를 놓고 왈가왈부하다가 그녀는 아주 장씨를 어린애 다루듯 훈계조로 나가려 했다. 그의 속이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하고 일할 수 없으니 너 혼자 잘 해봐!'
이렇게 말하고 장씨는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감독한테로 갔다.
바바라는 입심 좋고 일종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성격의 소유자였다. 백인 여자로 얼굴이 반반한데 비해 뚱뚱하고 고집 세기가 황고집이라 누구도 그녀를 설득하기가 어렵다. 그녀가 일단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 언쟁이 되고마는 바람에 동료 직원들은 아예 그녀와 말대꾸를 안하고 피하기가 일쑤였다.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는 대꾸를 안하고 너는 떠들어라, 나는 흘린다는 식이었다.
장씨의 외모가 이들에 비해 월등 작고, 또 말도 서투르니까 그녀는 그를 한없이 얕잡아 보고는 그와 함께 일을 해야 할 때는 항상 제 고집만을 내 세운다.그녀는 항상 따라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는 식으로 그를 다루려 했다. 장씨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악평이 자자한 마당에 승부는 누구에게 걸려 있다는 걸 그는 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열이면 열 사람 다 물어봐도 그녀가 옳다거나 그녀 편을 들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 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하도 싫어해서 화장실에나 벽에다 그녀의 그림과 별명을 낙서해놓고 조롱하기가 일쑤였지만,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그녀는 털끝만큼도 그런 일에 개의치 않았다.
감독에게 달려 간 장씨는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제 다시는 바바라와 같이 일하지 않겠소!'
그녀의 됨됨이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또 장씨의 근면성만은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던 터라 감독도 당장은 더 이상 군 말없이 그의 요구에 동조해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장씨는 화장실이 붙어있는 현관에서 직속상관이 아닌 다른 부서의 감독을 우연히 만나 '하이!'정도의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 하였다. 그런데 그는 심상치 않은 웃음을 흘리며 장씨에게 접근해 왔다.
'하이!,미스터 챙...앞으로 당신 별 문제가 없을 거야.'
그는 돌연 장씨에게 호의라도 보여주듯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의아해진 장씨는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다그쳐 물었다.
'지금 당신이 한 그 말이 무슨 뜻이죠?'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감독은 다시 빙그레 웃으며,'아무 것도 아니오.'하고는 그냥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의심이 풀리지 않은 장씨는 그를 바싹 따라붙으며 졸라대듯 물었다.
  '다시 말해봐요,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진지한 장씨의 모습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마지못한 척 입을 열었다.
'글쎄, 다름이 아니고 어제 관리 회의가 있었는데 당신의 대인관계 태도가 별 문제가 없다는데 모두들 합의를 보았지.'
감독의 말을 듣고 장씨는 점점 더 의혹에 찬 표정이 되었다. 그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아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왜 갑자기 나의 대인관계를 의논한다 말이오?'
'아아, 문제는 당신이 그 바바라와 싸운 후부터 당신의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다는 평이 있었지. 그 이후 우리 감독들은 당신의 회사 생활을 주시해 왔었어. 그러나 어제 회의에서는 당신 직속 감독을 비롯한 모두가 당신의 일상 태도가 과히 문제삼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합의를 했단 말이야.'
장씨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한 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돌아서는 감독에게,'아아, 고맙소!'라고 겨우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는 제꼬리를 제가 문 격이었다. 바바라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고 그 됨됨이가 못되어 먹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협조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자신하고 동료 직원들에게 잘한 짓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자만해하던 자신이 갑자기 우스꽝스러워졌다.
장씨는 비로소 감을 잡기에 이르렀다. 마이너리티 주제인 자신이 누구를 물어뜯으려고 했던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혹시 바바라를 나쁘게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소수 계인 그에겐 미안하지만 그럴 권리가 없다. 이 사회에 늦게 발 들여  놓은 손님인 주제에 어떻게 주인을 얕보고 넘볼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이들 관리들 입장이 모든 문제 해결을 놓고 마치 솔로몬 왕처럼 누구의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릴 능력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장씨는 알아야 했다. 이들에겐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그런 명판사일 필요와 능력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단지 이들의 관심엔 지금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개처럼이라도 타협 을하고 협조를 해서 아무런 풍파 없이 매끄럽게 작업 능률을 올릴 줄 아는 사람만이 유능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을 그들은 필요로 한다.
장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목할  만큼 조용해졌다. 그는 원만해진 걸까, 아니면 냉혹한 현실에 길들여져 버린 걸까. 그는 이제 일체의 시비에도 흥분하지 않았고, 어쩌다 작업 실내에서 젊은 애들이 버릇없이 대들어도 그의 입에선 언제나 '미안하네'가 우선 이었다.
탐슨감독의 새 관리법은 큰 제동 없이 계속되어졌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나서 특히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흑인 직원들의 사기가 높아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으레이 튀어나오던 불평도 시간이 가면서 싹 사라져 갔다. 어떤 녀석은 번번이 어떤 구실이라도 마련해서는 수 십분 씩 늦게 출근을 한다. 그래도 그는 아무 탈이 없다.
이럴 즈음 일부 직원들 간에는 이상한 기류가 돌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백인 그룹으로 탐슨의 관리 방법을 놓고 수군대며 비꼬기 시작했다. 그들의 비꼬는 내용은 대개 탐슨이 흑인 직원이었다면 이런 일은 시키지 않았을 거라든가, 공연히 일을 능력 껏 시키지 않고 순번으로 돌려서 시킴으로 능률이 저하되고 있다, 또는 누가 일찍 집으로 돌아가도 봐주고 있다는 등...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랄하고도 노골적으로 불평을 떠벌리기는 데이브라는 붉은 머리의 백인이었다. 머리와 수염이 붉고 까칠해서 장씨는 그를 볼 때마다 화가 고갱을 연상했지만,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는 각별히 아는 바가 없었다. 그도 장씨와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는 들리는바에 의하면 게이(동성연애자)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장씨에겐 언제 보아도 이방인인 화성인쯤으로 보인다. 가끔 이상한 소리의 테입을 카세트에 넣어 틀고는 이상한 몸짓으로 일하다 말고 몸을 비틀어댄다.
빳빳한 수염을 휴지로 닦아가며 너무 달아서 구역질이라도 날 것같은 쵸코렛을 병콜라와 함께 즐긴다. 여자 직원들과 무언가 들리지 않는 소리로 수군거리고는 갑자기 허리를 꺾고 웃어댄다.
그는 탐슨감독이 전출해 온 이래 서서히 바빠지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그를 돼지 새끼라고 빈정댔다. 이유는 탐슨이 흑인 여자들과 사무실에 앉아서 시시덕거리며 한 시간씩이나 냄새나는 외국 음식을 벌려놓고 먹는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점심시간을 그들이 풍겨놓는 음식 냄새를 맡고서야 비로소 알아차린다는 거였다.
언제부턴가 데이브는 흑인들의 작업 시간표를 복사해서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그들의 일거일동을 살피고 주시해 왔다. 언제 누가 늦게 출근했다는 것, 일찍 퇴근했다는 것 등등을 모두 기록했다. 게이는 어느 날 장씨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탐슨이 인종차별주의 자라고 생각하지 않소?'
장씨는 질문을 받고 난처했다. 사실 장씨는 어느 편이건 끼여들고 싶지가 않았다. 백인들에게 말려들면 흑인들과 불편한 감정이 생길까 두려웠고, 흑인들 편에 선다는 것도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탐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직원들을 차별하는지 그것조차도 판단하기가 분명치 않았다. 탐슨때문에 일을 좀 더 한다는 기분일 뿐이지, 그로부터 눈에 보이는 차별을 받았다는 생각은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집히는 것이 없었다.
'글쎄..,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는데...'장씨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당신은 어떻게 그가 불리한 일을 시켜도 번번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소?'
'글쎄..,내 생각엔 어떻든 회사 일을 한다는 것이 우선 이라는 생각에서지. 그 나머지는 차후에 생각키로 미루는 버릇이 있거든...'
탐슨이 장씨에게 특별히 불리한 일을 도맡아 시킨다는 인상을 준 적은 여러 번 있다. 그것이 엄격히 따져 차별이라면 차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 장씨가 받는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표면적 물량으로 나타내야 할지, 또 나타낸다고 해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장씨로서는 막연하기만 할뿐이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정도의 차별이야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어디서든지 흔히 있을 수 있다. 배달겨레와 단일민족을 내세우는 장씨 자신이 떠나 온 고국의 실정은 어떤가. 거기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학벌과 지방벌, 그리고 족벌을 따지는 식의 차별이 있질 않은가. 데이브는 말을 계속했다.
'인종차별이란 백 년 전에나 존재하던 즉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그들을 팔고 사고할 때나 존재하던 유습이오.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도 흑인들이 거꾸로 백인을, 또는 어떤 사람을 차별하려 한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단 말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런 것을 불평 한 마디 없이 참기 만하고 넘어 간다면 그것은 곧 인종차별주의를 인정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오.'장씨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덧 젊은, 마치 자신의 아들, 지금은 군인으로 외국에 가 있는 아들과도 같은 또래의 젊은이로부터 훈시라도 듣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그가 그렇게 논리 정연하고 바른 생각을 하는 젊은이라고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씨는 '녀석 제법인데'라는 소리가 혀끝에서 맴도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내가..인정을 해 주다니,단지 말만 안 하고 있을 뿐이지...하지만 나는 당신같이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존경을 하고 있지.'
이렇게 장씨는 그를 터무니없이 부추겼다. 장씨는 그 후부터 데이브가 하는 짓들을 유심히 눈여겨보았다. 그는 다른 직원들과 부지런히 접촉하고 그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마도 장씨에게 했던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할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던 중 탐슨은 며칠간의 휴가를 갔다.
작업실 내에서의 고참권 서열은 아기 출산을 위하여 장기간 휴직하고 있는 멕시코 여자 다음으로 장씨가 두 번째에 해당되었다. 그래서 탐슨이 휴가를 가거나 몸이 아파서 공석이 될 경우 그 업무 처리의 대행은 당연히 장씨에게 넘겨져야 될 것이다.
그런데 탐슨은 그 고참권마져도 교대로 할 것임을 구실로 가당치도 않게 서열에 상관없는 제랄드라는 몸집 좋은 흑인에게 위임해 버리고 떠났다. 장씨는 또 한 번 탐슨에게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도대체 그가 모든 힘들고 불리한 일은 장씨에게 도맡아 맡기면서도 이럴 때는 흑인들에게 혜택을 주면서 오리발을 내미는 그의 행실이 괘씸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역시 침묵했다. 그는 자기가 고참이기 때문에 왠지 섭섭한 기분을 가지게 될 뿐, 사실 감독 대행을 하라고 해도 반가울 것은 별로 없었다.
그 일을 한다고 당장 무슨 특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장기적 안목으로 자신이 승진이라도 노린다면 그 경험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장씨가 과연 이제 와서 자신의 승진을 꿈이나 꾸고 있단 말인가. 이 이방 지대에서 자신이 감독이 되어 승냥이 같은 백인들과 너구리같은 흑인들, 또는 들개 같은 맥시칸들을 다루며 생존해 갈 수 있을까? 그런 일을 상상하며 그는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그것보다 그는 이 살벌한 타국에서 그의 생계를 버는 일에만 지장이 없다면 그걸로 만족할 것이다. 그만치 그에게는 이 객지에서 자신이 받는 어떠한 불리함도 가족들의 생계를 벌고 살아가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란 없을 것이었다.
그 즈음 작업실 분위기는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직원들은 일 이외에는 서로 웃음조차도 삼가는 듯 냉랭해졌다. 흑인들은 크고 허연 눈을 굴리며 말없이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고, 백인들은 남이 듣지 않는 기회를 틈 타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했다. 그 즈음 데이브는 흑인들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떠벌리다 제럴드와 언쟁까지도 하는 게 목격되기도 했다.
마침내 탐슨이 휴가로부터 돌아오기 하루 전 데이브와 토니 는 이제까지 그들이 수집한 증거들을 가지고 회사 5층에 있는 고위 경영진을 찾아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탐슨이 지독한 인종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이제까지의 사례들을 폭로했다.
그들은 처음에 지역 관리인을 만났고, 그의 안내로 부사장을 만났다. 거기
에서 그들은 탐슨에 대한 비위 사실들을 밀고하고 데이브가 어제까지 수집한 자료를 제시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탐슨은 흑인 종업원들을 다른 종업원보다 우대하기 위해서 고참 권도 무시했으며, 그들의 조퇴, 지각을 묵인하고 허위로 초과 근무 수당까지 달아준 사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경영진은 그들이 밀고한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초과 근무시간 관리와 출퇴근 관리에 대하여는 증거에 의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묵과할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부사장은 데이브에게 중대한 결과가 곧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오후에 작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장씨는 데이브가 그에게 접근해 오고 있음을 알았다.
"미스터 챙, 만나서 할 말이 있으니 좀 봅시다."
그는 장씨의 반응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는 창고가 있는 쪽으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조금 따라가던 장씨는 점점 심상치 않은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깡패를 따라 골목으로 이끌려 갔던 중학생 때의 그 기분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데이브는 창고 옆 새로 구입된 자재상자가 쌓여 있는 좁은 틈 사이로 장씨를 이끌어 갔다.
장씨는 이제 설명할 수없는 기분으로 전신이 바싹 긴장되어 왔지만, 그렇다고 따라 가던 길을 그만두고 돌아설 수도 없었다. 막다른 벽에 도달했을 때 데이브는 걸음을 멈추며 돌아서서 주위를 한 번 살폈다. 그의 눈은 피곤 한 듯 붉은 핏발이 선 회색 빛을 하고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을 주고 있었다. 장씨는 그의 눈과 마주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그는 장씨의 가슴팍에 그의 가슴을 바싹 들이대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까지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요? 상부 경영진을 만나서 모두의 평등을 위하여 인종차별주의 자인 탐슨에 대한 비리를 폭로했단 말요."
장씨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을 들으며 최소한의 경계를 위하여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도 소문으로 알고 있소. 나도 당신들이 한 일에 대하여는 용기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비록..."
이때 데이브는 장씨의 말을 가로채며 이렇게 소리질렀다.
"당신처럼 비겁한 사람은 이 나라 미국에 살 자격이 없소! 당신이 떠나 온 나라로 돌아가시오! 나는 당신같이 편하게 무임승차나 하려는 사람은 용서할 수가 없단 말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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