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벌레

2007.01.19 01:50

이성열 조회 수:1245 추천:53


(소설)  
                           바퀴벌레                     이성열 작
                                                      
나는 그날도 황금 같은 휴일을 진종일 그 식당에 가서 서성이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참으로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김광준은 이제 나를 보면, ü어, 오셨소?é 하고는 핑 돌아서서 제 할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더욱 부지런을 떨며 주방으로 화장실로 들락거리며 바쁜 척을 하였다. 수돗물을 콸콸 틀기도 하고, 칼이나 도마를 씻는 척 하는가 하면, 딴청을 피면서 나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가능한 한 피하려는 눈치였다.
이쯤 되면 그는 이제 나를 취급하기를 주말이면 자기 식당이나 찾아와서 빈둥대는 하릴없는 건달로나 취급하고 말려는 것인지, 그래도 돌아간다는 내 말에는 귀가 번쩍 뜨이는지 얼른 따라 나와서 ü잘 가요!é 라고 하는 뻔뻔스러움이야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옛날부터 이르기를, â친구와 돈 거래를 하면 돈 잃고 곧 친구 잃게 된다ä 는 말도 나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또 이르기를 â돈을 꿔 주면 친구를 잃을 것이요, 거절하면 얻게 될 것이다ä 라는 말도 귀가 아프게 들어 온 바다.
허나 돈을 친구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빌려준단 말인가? 어려울 때 친구지간에 돈도 빌려주지 않는다면, 친구 좋다는 건 뭔가?
이 말도 또한 설득력이 없지 않다.
나는 그에게 돈을 건네주기 전에 꼭 7일을 곰곰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았다. 하물며 옆집에 살고 있는 찰리라는 인생 경험 많은 노인을 찾아가서,
â찰리, 당신 생각은 어때요? 친한 친구가 나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데-ä 했더니, 그가 조금의 생각도 해 볼 여지도 없이 총알처럼 내뱉는 말이, â친하다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배짱을 가진 자는 절대로 친한 친구가 아니네. 두고 보게나! 자네가 그 돈을 꿔 주지 않으면 친구 하나만 잃고 말지만, 만일 꿔주고 나면 돈도 친구도 다 잃고 말 거야! 나도 내 인생에서 딱 한 번 돈 꿔주고 둘 다 잃은 경험이 있어 잘 알고 있지. 도대체 돈이 필요하고 갚을 의향이 있으면 은행이나 신용금고엘 가지, 왜 친구에게 부탁을 하는지 나는 그들의 저의를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여차하면 갚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ä
â하지만 우리는 서로 단단히 믿는 사이니까-, 그가 내 돈을 떼어먹을 그런 파렴치한 친구는 절대 아닌 걸요.ä
â아무리 서로 그렇게 믿는다 해도 돈이란 일단 내 지갑에서 빠져나가면, 마치 다 길러 놓은 애지중지하는 딸자식 객지에 내보내 놓은 듯 마음이 놓이지 않는 법인데, 왜 내 돈주고 마음쓰게 될 그런 짓을 하려고 하나?ä
이렇듯 그의 충고는 간곡하고도 값진 것이었지만, 나는 그의 설득을 하찮게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돈을 그에게 빌려주기로 마음이 기운 후였고, 공연히 지금 돌아다니며 하는 짓이란 단지 내가 앞으로 저지를 선행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어떠한 충고도 이미 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평소에 광준이 보여준 사소한 후의와 친절조차도 조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를 신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광준은 전화에 대고 나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다.
  박형, 식당에 손님이 몰려들어 돈이 좀 벌리려고 하는데 밑천이 달려서 굴러 들어오는 돈도 놓치는 형편이오. 그러니 박형이 돈이 있는 대로 좀 융통해 준다면 내가 2할 이자는 정확히 계산해서 매달 갚을 거요.
  그는 다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가 숨이 차서 헐떡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사정이 딱하고 돈이 아쉬우면 저럴까 하는 동정심까지 우러났다.
  이자까지야 뭘 절친한 사이에......
  나는 사실 그때 은행에 여분의 돈이 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은행 이자가 5부도 안 되는 형편없는 지경이었으므로, 나는 공연히 돈을 은행에 남겨두고 은행 좋은 일만 시킬 필요가 없다는 실리적인 생각을 해 오던 터였다.
  돈을 빌려준다면 나는 그 돈을 늦어도 반년 만 쓴 다음 꼭 돌려주겠소. 아니 언제라도 박형이 필요할 때 두 주전 통보만 해 주면 식당엔 늘 돈이 돌게 마련이니까 그만한 돈이야 빼낼 수 있을 테고-.
  글쎄, 생각을 해 봅시다. 조금 후 가부간 연락을 드리겠소.
  광준이 새로 시작한 사업은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만에 궤도에 올라 깨가 쏟아지는 재미를 보고 있다는 소문은 나도 언뜻 들은 바가 있었다. 광준과 그의 아내 연숙은 불과 얼마 전 관광지로 유명한 산타모니카 부둣가에 은퇴하는 노인 부부로부터 허술한 식당 하나를 인수받아 그 내부를 깨끗이 수리한 다음, 생선튀김 전문점을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아내 연숙이 원래 깔끔하고 무슨 음식이든 손 댔다하면 그 솜씨가 뛰어 났다. 그러니 그 사업이 그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고, 그 장소도 관광객이 몰려드는 비치 가에 위치한 상지대였으므로  사람들의 발길이 좀체 끊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더구나 광준은 주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는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가 하는 새로운 사업이 소문처럼 잘 되어서 다시 옛날처럼 주위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처럼 그가 평소에 보여 준 덕성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쓰지도 않고 모아놓은 저금을 몽땅 털어서 빌려주기로 작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가 요구한 금액은 나의 저축 액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빌려줄 수 있었던 금액은 그  요구 액수에 미치질 못했다. 하지만 그만한 돈도 나에겐 큰돈이었다. 만일 지금이라도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말썽을 부린다면 그 돈으로 웬만한 차 한 대는 충분히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여하튼 광준의 말에 의하면, 그가 개업한 식당은 성공적임에 틀림없었다. 새로 개업하는 비즈니스 80 퍼센트 이상이 그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망해서 도산되고 마는 풍토에서 그의 경우는 퍽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연숙이 튀겨내는 생선의 맛이 너무 신선하고 입에 녹는 듯이 바삭거려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녀가 준비해 내는 소스의 맛이 너무나 특이해서 그 만드는 법이 어떤 거냐고 법석들을 떨곤 한다는 것이었다.
  고객들은 점차 식당 근처에서는 물론 멀리 부자들만 살고 있는 말리부 에서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또한 그들 부부가 생선식당을 열면서 알게 된 것은 얼마 전만 해도 대체로 생선을 먹지 않던 미국인들이 점점 동물의 육류가 과 지방으로 몸 속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증가시키므로 돈 있는 부자일수록 가능한 한 육류의 섭취를 피하는 대신 몸에 좋다는 생선의 섭취를 늘려 가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맛이 새롭고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는 생선요리를 찾아다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머리가 총명한 연숙은 생선 튀김에다 독특한 향기를 가미시키기 위해서 참깨와 들깨를 갈아 튀김가루에 첨가시켜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고객들의 입맛을 놀라게 만들었고, 그녀를 바로 일등 요리사로 만들어 놓은 비결이 되었다. 이들에게 참깨, 들깨 가루 같은 것은 거의 생소한 양념이므로 그 누구도 맛의 비결을 흉내조차 엄두도 내질 못하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에게는 특히 생선의 비린내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들깨의 강한 향기는 이에 아주 좋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들려오는 즐거운 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돈을 빌려준 지 반년이 훌쩍 지나고도 광준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였다. 다달이 보내 준다던 이자는 고사하고, 물론 형식상으론 내가 사양할 뜻을 비치긴 했어도, 원금조차도 받아 가라든가 또는 언제 주겠다는 말 한 마디 그는 전해주질 않았다. 나는 광준이 돈 빌려간 사실을 잊어 먹기라도 했나 해서 내 편에서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랬더니 그는 식당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그러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서둘러 말하고는 다른 전화가 와서 바쁘다며 어이없이 통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수화기를 들고 한 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필경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속된 말처럼 그의 태도가 확실히 뭐 보러 갈 때와 올 때가 분명히 다르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다시 3개월을 기다려 보았지만 광준으로부터는 역시 아무런 연락도, 그야말로 꿩 구어 먹은 소식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이 나는 대로 그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멀건 휴일 날에 쉬지도 못하고 찰리가 해 준 충고의 말을 이제야 다시 귓가에 떠올리며 그의 식당이 있다는 산타모니카 부둣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닷가 조그마한 쇼핑거리에 위치한 그의 식당은 첫눈에도 아주 좋은 위치임에 틀림없었고, 손님들도 제법 붐벼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느라고 한참 진땀을 뺀 후에 간신히 차를 세우고 나는 긃resh Plus Crispy'라고 간판이 써 있는 그의 식당을 찾아 들어섰다.
  한참 점심시간이라 손님 받기에 정신이 팔린 광준이 하물며 나를 대하고도 고객으로 알고 주문서에다 코를 박고는 무얼 주문하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의 아내 연숙은 주방 안에서 주문 받은 음식을 멕시칸 조수와 함께 바쁘게 튀겨내고 있는 모양이었고, 광준은 연방 울려대는 전화주문 받으랴, 내방손님 받으랴, 정신을 빼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 성싶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 그제야 비로소 계면쩍은 표정을 하고는, 어이, 어서 오소! 하더니 고개로 왼쪽을 가리키며 그리로 돌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카운터 왼 쪽 끝으로 가서 막혀있는 판자 문을 밀고 광준이 있는 안으로 들어섰다. 주방에서는 기름 튀기는 냄새가 풍겨 나왔고, 준비된 음식은 종이접시나 상자에 담겨 네모진 창구를 통해서 차레로 밀려나와 각기 손님에게 팔려갈 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식당 안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좌석이 기껏해야 열 대여섯 정도였고, 그곳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손님들은 불과 예닐곱 쌍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댓 명 정도가 줄을 서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역시 매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근처 주택이나 사무실에서 미리 전화로 주문을 해놓고, 음식이 준비되면 자신들이 와서 가져다가 먹고는 하는 모양이었다. 식당의 위치와 규모로 보아서 â드라이브 드루ä는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카운터 바로 위에는 식단과 가격표가 걸려 있었고, 식탁마다는 메뉴를 적어 놓은 메뉴 북이 놓여 있었다.
  나는 곧 종업원을 따라서 주방 안에 위치한 조그만 사무실에 안내되었다. 연숙이 들어가는 나를 보자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튀김망태기를 들고 서서 고개를 끄덕하고 인사를 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나는 종업원이 날라다 주는 생선튀김을 먹었다. 그 점포 간판이 말하는 것처럼 튀김은 프레쉬하고도 크리스피했으며 다른 데서 맛볼 수 없는 특이한 맛을 내었다. 나는 튀김을 먹으면서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 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맛은 한마디로 마땅한 표현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고, 억지로 말하라면 영어 표현으로 엑소틱하다는 말이 맞을 것도 같았다.
  내가 그 새로운 맛을 음미하며 한참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당당히 테이블 위로 걸어와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는 기겁을 했고, 순간 옆에 놓여있는 신문을 들어 힘껏 후려쳤다. 바퀴벌레는 신문에 맞아 몸통이 터져서 나가 떨어졌고, 나는 테이블에서 그것을 밀어 바닥으로 떨쳐 버렸다. 튀김을 맛있게 먹던 나는 금방 입맛이 다 달아나 버렸고, 그래서 그만 먹기를 중단하고 말았다.
  잠시 후 얼추 주문량이 뜸해지자 광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이, 어떻게 뭐 좀 드셨소?
  아 그럼요, 이렇게 튀김을 맛있게 먹었죠.
  나는 튀김이 담겨 있던 플라스틱 접시를 그에게 가리켰다. 그가 접시를 보더니,
  어, 남긴 걸 보니 튀김이 박형 입맛에 맞질 않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고...... 나는 조금을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벌레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는 것이 그를 위해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말을 이었다.
  맛은 좋았는데 식당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아요. 큰 놈 하나를 잡아 터치고 나니까 입맛이 떨어져서......
  아-, 그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 그거 속수무책이에요. 세상에 바퀴 없는 식당이 어디  있어야죠. 단지 눈에 뜨이지만 않을 따름이지. 식당의 고민이 거기에 있답니다. 사람을 불러 약으로 전멸을 시키자니 너무 독해서 사람 먹는 음식에 옮겨질까 걱정이고, 그렇지 않고 놔두자니 보건소에서는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야단들이고......
  그래요? 하여튼 바쁜 것을 보게되니 천만다행이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금세 자신 있던 표정이 바뀌며,
  주말이라 좀 바쁜 편이지만, 뭐 실속이 없어놔서...... 하고 미진한 모습으로 말을 눙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했다.
  경쟁 때문에 말이오, 바로 옆집도 생선튀김을 하거든. 시작할 때 손님을 끌기 위해서 가격을 좀 싸게 내려놨더니 옆집에서도 가격을 내린 후에 다시 올릴 생각을 하질 않으니, 바쁘기만 하고 뭐 남는 게 있어야지.
  그는 말을 마치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각종 청구서 및 영수증 등을 집어서 정리하며 사무적으로 나의 동정을 살폈다. 식당에서는 간간이 전화벨이 울려왔다.
  항간의 소문엔 김형 장사가 퍽 잘 된다고 하던데.
  처음엔 누구든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하다보니 생기는 문제가 너무 많아요. 경쟁도 경쟁이려니와 손님이 많이 와도 주차장이 작아 차를 세울 데가 있어 야죠.
  흠......
  나는 광준으로부터 뜻밖의 여러 문제점들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말인데 박형한테 빌린 돈은 말이요, 좀 더 기다려 줬으면 해서 말이오. 나는 여기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닷가이니 만치 같은 식당이 두 개쯤 돼도 오히려 손님 끌기에는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옆에서 너무 비협조적이고, 이건 차라리 잡아먹지 못해 난리니, 나 원 참......
  아니, 왜 하필이면 바로 옆에다 같은 업종을 가지고 영업을 하기로 했소?
  장사란 본래 그런 겁니다. 지나다니다 봐요. â맥도널드ä가 있는 곳엔 꼭 â버거 킹ä이 있게 마련이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점이 없지도 않았다. 미국의 상가 구조는 그런 점이 있었다. 대개의 백화점들은 백화점이 몰려있는 곳에 있게 마련이고, 식당은 식당 가에 몰려들 있고는 하였다.
  나는 그의 착잡한 표정에서 적어도 그가 하는 말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는 있었다. 그렇긴 해도 분명히 내가 그곳에 찾아 간 목적이 있었으므로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그를 채근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야 돈을 줄 사람이 마음을 먹고 있지 않은 마당에 받아야 할 사람이 공연한 투정으로 그의 심기를 건드려 보았자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를 주저하게 했으므로, 나는 다 그만두기로 하고 미진한 채 자리를 털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비로소 옆집 찰리의 충고가 값진 진리임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일이고 다음 기회에 다시 광준을 찾아가서 오늘 못 다한 말들도 하고 돈도 받아 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내가 다시 식당을 찾은 것은 그 후 약 1 개월이 지나서였다. 광준은 그때까지도 나에게 한 번의 연락도 취해 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주말을 맞아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아직 점심때가 아니라 그런지 텅 빈 식당 안에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주방으로부터는 성난 여자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그래요. 모두는 다 내 탓이에요! 그러니 지금 와서 그걸 따지면 뭐해요!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광준의 아내 연숙이었고, 아마도 그들은 부부지간에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는 좀 난처했다. 더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서 있는 데, 마침 덩치가 큰 광준이 화가 난 듯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되어 가지고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걸어 나왔다.
  조용하군, 내가 아침부터 너무 일찍 영업소엘 왔나, 재수없게-.
  나는 안의 사정을 모르는 체 하며 이렇게 너스레를 떨고 능청을 부렸다.
  김광준은 시무룩하니 나를 맞아 그의 사무실로 안내하였고, 그날도 나는 그로부터 일언반구, 돈을 언제 주겠다는 시원한 대답을 듣기는커녕, 진종일 그가 늘어놓는 그의 사업의문제점들만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
  글쎄, 이웃에서 그럴 수가 있소? 우리 손님들이 모르고 옆집 주차장에 차만 세워놓으면, 견인차를 불러 손님 차를 끌어가 버리지 뭐요. 결국 손님들은 나에게 와서 항의를 하고 차를 끌어간 비용을 나에게 물어내라는 거요. 나 원 참, 이거 한 두 번도 아니고-.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같은 업종을 한다는 옆 가게에서 광준에게 심한 텃세를 하는 모양이었다. 원래 그 가게는 이곳에서 오랜동안 사업을 해 온 토박이였고, 식당의 규모도 상당히 큰 미국식 생선요리 전문식당이었다. 주차장 시설도 꽤 넓은데다 불경기라 그런지, 아니면 광준네 식당 때문에 그런지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으므로 자연히 광준네 식당으로 몰려오는 손님들이 잘못 알고 그곳에 주차를 하게 마련인 모양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내가 말했다.
  주차장이 그 집 주차장이면 이곳 손님은 그곳에 주차를 하지 말라고 경고라도 써 붙이면 어때요?
  식당에 저렇게 주의사항을 써 붙였는데도 손님들이 설마 하고 그러는지 자꾸 차를 그곳에 세우는 걸 난들 어떻하겠소.
  그가 유리창을 통해 식당 안에 경고라고 써 붙인 조그만 쪽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그건 이 쪽 책임이 아니잖소?
  그렇긴 하지만, 손님들 불만이 말이 아니고 큰 손해를 본 손님들이 다신 이 식당에 오려하질 않으니까 그게 문제죠.
  나는 그로부터 그의 사업의 문제점들을 듣고 앉아 있었으나 무언가가 몹시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해지고 있었다. 결국 그의 의도는 사업에 문제가 생겨 나에게 갚아 줄 돈을 갚을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모양이지만, 나는 내가 그에게 돈을 빌려줄 때 무슨 사업의 성패여부를 조건으로 돈을 투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반 년 후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서 빌려 갔으므로 지금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돈을 갚아주어야만 도리가 될 것이었다. 이제 와서 자꾸 다른 장광설을 벌리자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고, 나의 호의를 짓밟고 은혜를 악으로 갚겠다는 심보가 아닐 수 없었다.
  샐러리맨인 내가 그 돈 만여 달러를 어떻게 모은 것인가. 몇 년 동안을 그야말로 배가 고플 때 선뜻 먹고싶은 비싼 정식 하나 제대로 못 사먹고, 낡은 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차 한 대 새것 굴려보지도 못하고 그러모았던 돈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돈을 빌려 준 이상한 죄 값에 눌려 하고 싶은 말조차도 속 시원히 뱉어 낼 수가 없는 지경에 처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 돈의 회수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비록 할 말도 못하는 내 속은 오뉴월 두엄 썩듯 썩이고 있으면서도-.
  그 후는 이렇게 주말마다 그를 찾아가서는 변변히 돈을 받으러 왔다는 말 한 번 속 시원히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그의 처분만 바라면서 온종일 우두커니 앉았다가는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는데, 그러면서 차츰 나는 그가 하는 사업의 모든 문제점들을 내 일이나 되는 것처럼 간파해 가기 시작했다.          
  자동차 부속품 사업에서도 모아놓은 돈이 없었던 광준은 그곳에서 얻어놓은 후한 인심 덕으로 나에게서 빌리듯 여기저기서 되는대로 돈을 그러모아 식당사업을 시작했음이 틀림없었다. 그의 아내 연숙의 요리솜씨만 믿고 시작했던 식당사업이 요리를 잘 해 고객들의 호응을 얻어내는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뜻하지 않게 같은 종류의 영업을 해오던 옆집 경영주의 방해로 광준은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사업 개시에 손님들을 끌기 위하여 음식의 가격을 다른 곳보다 싸게 시작했던 것이 공연히 경쟁의 도화선이 되어 옆 식당에서는 반값으로 봉사하는 세일을 끝도 없이 계속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곳과 경쟁을 하자니 이윤이 없게되어 하루종일 팔아보아도 회전자금이 될만한 몫 돈이 형성되기는커녕 매일 매일의 경비조달 하기에도 바빴다. 거기다 허구한 날 같이 생존해야하는 이웃에서 텃세의 정도를 넘는 적대행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앞으로 무슨 일을 가지고 어떻게 방해를 하고 나올지 그것이 불안해서 사업을 이대로 계속해야 할지 조차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때쯤에서야 내가 터득하게 된 사실이지만, 김광준은 그 성격이 희미한 편이어서 돈을 언제 돌려주겠다던가, 또는 못 갚아 주겠다던가 하는 딱 부러지는 계획이나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 또한 주변머리나 배짱이 없는 탓인지 그를 만나선 마구잡이로 돈을 달라거나 심한 말을 해서라도 떼를 쓰고 하지도 못하는 위인이었다.  주말이면 그의 면전에 나타나서 말은 솔직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얼쩡거리다가 그렇게 하면 귀찮아서라도 돈을 갚아 주겠거니 하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인 양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눈치에 의하면 다른 채권자들은 이미 변호사를 동원하던가 또는 그 결과에 따라 당국의 쉐리프를 동원해서라도 이미 상당수가 돈을 받아내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 등살에 광준 부부는 뺏길 돈 다 빼앗기고, 이제 지칠 대로 지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배짱만 키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이 방법 저 방법도 다 놓치고 난 후 역시 그의 처분만 바라고 있을 때, 하루는 광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어 헐레벌떡 단숨에 달려간 나를 앉혀놓고 광준은 입을 열었다.
  박형, 다름이 아니고 형도 알다시피 우리 식당이 이렇게 옆집과 세일경쟁을 하다가는 결국 우리도 망하고 저 집도 망한다는 건 자명한 일이요. 생선 한 접시 튀겨주고 3 달러도 못 받아서야 무슨 수지 타산이 맡겠소?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아마 죽는 것은 저 쪽이 먼저  될 거요. 왜냐하면 저 쪽은 규모가 크니까-. 나는 사실 빌린 돈만 없다면 얼마든지 이렇게 버텨 갈 수도 있다구요. 우리야 튀김 맛 하나로도 고정손님을 확보해 갈 수 있으니까.
  이렇게 서두를 잡은 그의 말의 내용은 실망스럽게도 내 돈을 갚아준다는 얘기는 아닌 성싶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에게 하려는 것인가?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그의 의도를 가늠하고자 신경을 집중했다. 그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계속했다.
  그래서 말인데 박형이 수고를 좀 해 주십사 이 말이요.
  아니, 내가 무슨 수고를 합니까?
  그의 뚱딴지같은 말에 나는 절망적인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들어봐요, 박형. 박형은 영어를 잘 하니까 우리를 좀 도와달라 이거요.
  그가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 밖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멕시칸 종업원이 뛰어 가서 전화 받는 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려왔다. 나는 그의 말이 계속되길 기다렸다.
  다름이 아니고, 박형이 옆 식당엘 가서 그 주인을 좀 만나 봐 주세요. 타협을 좀 해 달라 이겁니다. 저 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알아보시고 가능하다면 그 자와 아주 가격협정을 맺어놨으면 좋겠어요. 서로 같이 공존하는 것이 그도 좋고 우리도 좋은 것 아니겠소? 말하자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지-. 그리고 박형도 그렇지-, 우리가 빨리 일어나야 형 돈도 받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는 아주 크게 생각이라도 해 주듯 내 돈 문제를 이 일에 결부시켰다. 나는 그의 뻔뻔스러움에 속이 다 메스꺼워졌지만, 뭐 과히 힘이 드는 일도 아닐 것 같아 조금 생각 끝에 그러마고 대답했다. 결국은 이 일도 돈을 받아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명심하면서-.         잠시 후 나는 광준의 식당을 나와서 옆집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오전 중이라 거리는 한산했고, 옆의 식당 주차장에도 별반 손님들의 차는 없었다. 미국의 식당이 다 그렇지만 이 식당도 제법 규모가 컸으며 반듯했다. 간판을 올려다보니 'NAPTUNE' 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뜻은 â바다의 신ä이라는 뜻임을 기억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식당에 들어서니 종업원이 얼른 다가와서 식사를 하려는 고객인줄 알고 메뉴 북을 들고 나와서는, 몇 명이냐? 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주인을 좀 만나 보고 싶은데.... 했다.
  누구라고 할까요? 웨이터가 실망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옆 식당에서 왔다고 해 줘요.
  기다리세요.
  그가 잰 동작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대기 석에 앉아서 조금을 기다리고 있자니, 인상이 곱다고는 할 수 없는 덩치가 큰 백인 하나가 눈을 휘둥그래 뜨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죠?
  그는 의아해 하며 회색 빛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몸과 머리통은 컸으며, 머리는 스포츠  형으로 짧게 깎았고, 티셔츠를 입은 팔뚝이 하도 굵어서 만화에서 본 뽀빠이를 연상시켰다. 굵은 팔뚝에는 문신으로 용을 그린 자국이 퍼렇게 꿈틀거렸다.
  나는 얼른 손을 내밀며, 만나서 반갑소, 내 이름은 박이요. 하고 기억하기 쉽도록 성씨만을 그에게 대 주었다. 그랬더니 그도 마지못해 손을 내밀며 악수에 응했다.
  내 이름은 빌이요.
  나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옆 집 식당주인인 킴의 친구요. 내가 당신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비즈니스에 관한 일인데, 당신과 의논을 해 보고 싶소. 킴은 영어가 서툴기 때문에 나에게 부탁을 한 거요.
  오우케이.
  그는 선뜻 응했다. 그러더니 가까운 탁자를 가리키며 나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그리로 가서 자리에 그와 마주 앉자마자 대뜸 본론을 꺼냈다.
  내 친구 킴은 비즈니스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소. 본의 아니게 이웃인 당신과 과잉 경쟁을 하게 되어서 말이오. 그래서 나를 이렇게 당신에게 보낸 거요.
  나는 되도록 중재자의 소임을 다 하고자 공손하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했으며, 말을 하는 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대뜸 무뚝뚝하게 나의 말을 받았다.
  그는 걱정을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소. 여기서는 내가 계속 십 여 년을 해 온 사업이고, 그는 불과 얼마 전에 이곳으로 와서 우리와 같은 식당을 열고 내 비즈니스를 위태롭게 하려고 했소. 그는 먼저 가격을 싸게 정해 세일경쟁을 유도했고, 나의 고객을 어느 정도 빼앗아 갔소. 그러므로 피해자는 나이고, 기왕지사 손해를 더 보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누가이기나 경쟁을 할 참이오.
  빌은 마치 나에게 분풀이를 하듯 총알처럼 쏴댔다.
  그렇게 되면 서로가 망하는 결과가 되질 않겠소?
  그거야 나는 각오가 되어 있소. 비록 당신들이야 쌀 한 포에 쏘이쏘스(간장) 한 병이면 몇 달도 연명해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살수는 없고, 종업원들과 손해가 막심하지. 하지만 나는 그 동안 벌어 놓은 돈이 좀 있소. 그러니 해볼 때까지는 해볼 참이오.
  그렇다면 당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하자면 당신 친구 킴이 먼저 그 자리에서 하던 사람들처럼 우리와는 아주 다른 업종을 하는 거요. 예를 들면 햄버거를 팔든지, 아니면 차이니스 푸드를 해서 팔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주 문을 닫아 버리든지, 나는 그걸 원할 뿐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나는 싸워 나갈 수밖에 없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하여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아주 뻔뻔스럽고 도도했다. 그는 도대체 무얼 믿고 이렇게 당당한 것일까. 무얼 믿고 이렇게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기생충처럼 남의 사업체 옆에 똑같은 사업을 차려놓고 경쟁을 하겠다고 나선 김광준도 잘한 짓은 못되고 분란을 자초한 꼴이 되었지만, 그러나 어느 상점가에 가도 같은 상점들이 몰려 있듯이, 적어도 이 땅에선 누구나 자유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말을 잃고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이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파란 바다가 보였고, 그 너머 산등성이가 멀겋게 드러났다. 보이는 것은 산타모니카 북쪽 말리브 해안이었다. 미국의 서해안이 저렇게 구불구불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북쪽 알라스카까지 뻗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도도한 것이 이들 백인들의 생리인가, 아니면 어떤 우월감에서 나오는 버릇인가? 이 자의 이러한 요구는 마치 어떤 싸움 끝에 이긴 자가 절대복종의 진자에게 요구조건을 명령하는 그러한 당당함이 있었다. 나는 문득 2차대전 후의 미국을 떠올렸다. 미조리 함 상에서 거만한 모습의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 진 일본에게 굴욕적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도록 강요했다. 항복을 받아 낸 후 미국은 일본의 모든 분야에서 간섭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은 평화사업을 하되 방위산업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은 그중 하나였다. 40 여 년이 지난 후, 미국의 자동차 제조 기술이 일본의 그것에 되잡히게 되자, 미국은 다시 일본에 건너가서 이렇게 요구했다. 이제 일본은 자동차 생산을 억제하고 방위산업을 일으켜 동남아의 방위 권을 맡아야 한다고.
  나는 빌 이라는 이 친구의 남에 대한 배려나 융통성이라곤 없는 말 몇 마디에서도 그 나름의 확고부동한 도도함 같은 것을 읽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김광준의 문제가 쉽고 간단치만은 않다는 것을 간파했다. 나는 내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와서 빈손으로 그냥 털고 일어설 수도 없고 해서 빌에게 이렇게 제안해 보았다. 이것이 바로 광준이 나에게 빌과 타협을 보라던 사항이기도 했다.
  미스터 빌, 앞으로 서로 살아나가기 위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앞으로 서로는  가격 경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음식값을 똑같이 받으며, 각자 다른 맛과 서비스로 고객을 유치하면서 사업을 해 나간다면 말이오? 당신 식당이 규모도 크고 종업원이 많으니까 결국에 유리하지 않겠소?
  노우, 그러고 싶지 않소. 나는 서비스나 음식 맛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10 년 간 이곳에서 비즈니스를 해 온 사람이오. 그런 거에 대해선 이러쿵저러쿵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소. 단지 모든 문제는 당신들이 뒤늦게 이곳에 들어 온 후부터 생긴 일이므로, 당신들이 내가 말하는 대로하던가, 아니면 식당을 닫던가, 하는 일만이 해결책이라고 당신 친구에게 가서 말하시오.
  나는 완강한 그의 입장을 귀담아 들으며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내 어깨를 들먹여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을 시사했다. 그 때 식당에서 젊은 한 쌍의 남녀가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 그러자 빌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에게 굿바이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는 다시 나오지도 않았으므로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식당을 나오면서 나는 빌의 그토록 도도한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의 그러한 태도가 바로 강대국에서 태어나고 그 부를 등에 업고 살아온 국민들의 배짱이라면 선량한 미국국민 모두를 매도하는 것일까. 그렇다. 어쨌든 그것은 일종의 강자의 생리일지도 모른다. 일단 강자가 된 이상, 더 이상 자신을 정당하게 계발하고 효율화해서 일의 비 능률을 개선하고 극복하여 현실문제를 개선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약자를 희생 제물로 억압하고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쉽다고 쉽게 생각하는 강자의 생리, 바로 그것을 닮은 것이었다. 그는 분명 나와 광준이 동양인이라는데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 우월감을 약자인 광준에게 행사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만일 광준이 그 자신과 같은 â코케시안ä 이었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 생각을 지배했다.
  나는 낭패한 낯빛이 되어 광준에게 돌아왔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자, 반응이 어떻소? 하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 친구 바늘로 찔러도 진물 하나 나지 않겠던 걸요.
  뭐라고 합디까?
  문제가 간단치 않던걸요. 뭐 다른 업종으로 바꿔서 하라던가......
  미친놈!
  광준의 입에서 대뜸 욕이 튀어 나왔다.
  글쎄, 문을 닫든지 생선튀김 대신 햄버거를 팔라는 거였소.
  엿 장사 마음대로?
  광준은 이렇게 대꾸하며 바다가 보이는 창 밖을 쳐다봤다. 그의 아내 연숙도 주방에서 나와 우리들의 대화를 들었다. 내가 덧붙였다.
  가격 경쟁을 시작한 건 이쪽이니까, 자기는 끝까지 해 보겠다는 거예요. 손해는 보겠지만, 그 동안 벌어 놓은 게 있으니까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거예요.
  쳇, 말로만 엄포 때리는 거겠지. 미국 놈들 떼돈 가진 놈 흔치 않더라!
  광준은 이렇게 떠 벌였고, 조용히 듣고 있던 연숙의 표정엔 낙심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녀는 아예 시선을 창밖에 대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갈매기 두어 마리가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도 그 새처럼 훨훨 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자신의 무거운 일상은 얼마나 가볍게 장식되어질 수 있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새처럼 훨훨 날아서 무거운 짐을 부리고 서 쪽으로 서 쪽으로  날아갈 수만 있다면, 종국에는 조국의 동해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녀는 지금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조금 생각 끝에 광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버티고 나가 보는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대로 다른 업종, 예를 들면 중국음식 같은 것을 해 보시던가...... 아주머니는 뭣 이든지 잘 하시잖아요?
  광준이 고개를 떨구고 듣고 있었다. 조금을 그렇게 잠자코 있다가,
  생선을 하지 않으려면 누가 미쳤다고 여기까지 나와 이 비싼 터를 얻었겠소? 자장면을 먹으러 누가 이 먼 바닷가엘 온 단 말이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지요. 끝까지 버텨 보는 수밖에......

  날이 갈수록 나는 김광준으로부터 빌려준 돈을 돌려 받기가 어렵다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나는 갈수록 찰리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에 대해 무거운 자책감으로 괴로워  했다. 얼마동안을 이런 자책감에 휘말려 자신을 원망하며 광준의 식당에조차도 방문하지 않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갔더니, 어이없게도 그 식당은 문을 꽁꽁 잠근 채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내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식당은 벌써 두 주일 전에 문을 닫았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봤다. 그곳은 바로 옆의 식당 'Naptune'의 앞이었고, 그는 다름 아닌 그 주인 빌이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손을 들어, 하이! 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다시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아직 모르고 있었소, 문닫은 사실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죠?
  나는 당신이 그의 친구인줄 알았지. 친구가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소? 다름 아니고 보건소 당국에서 나왔었지. 위생검사에 걸렸었거든. 식당 안에 바퀴벌레가 우글우글 했다더군.    
  아, 그래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 친구도 바퀴벌레나 다르지 않아! 공연히 남 잘하고 있는 식당 옆에 와서 빌붙어 편하게 벌어먹고자 했으니까!
  그는 광준에게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없이 굳게 닫힌 식당 문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탔고, 서둘러 차에 시동을 넣었다. 나는 자꾸만 뒤에서 빌이란 녀석이 공연히 나를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고 있는 것만 같아 뒤를 돌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의 직감이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자꾸자꾸 깜박이 등처럼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김광준의 식당에 바퀴벌레가 있다는 것을 당국에 신고를 해서 그 문을 닫도록 농간을 부린 장본인이 바로 뒤에서 징그럽게 웃고 서 있는 빌의 소행이 분명하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바퀴벌레는 그의 식당 어딘가 에도 분명 숨어 있을 것이었다. 광준은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식당 치고 바퀴 없는 식당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그가 겁 없이 내 뒤에 저렇게 서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어깨가 오싹해졌다.    
  내 차가 그로부터 멀어지자 나는 다시 광준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으로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돈을 빌려간 후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변해 있었고, 그는 그의 신상에 일어난 어떤 변화, 또는 그의 앞으로의 의도까지도 일언반구 나에게 성의껏 말해주지조차도 않았다. 그는 미안하게 됐다거나 돈을 언제 돌려주겠다는 말, 심지어는 이렇게 식당 문을 닫게 되었다는 말조차도 나에게 해 주지 않았다.
  꿔준 돈이란 꾸어간 사람이 갚겠다는 의지가 없을 때,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여건은 고의 건 타의 건간에 점점 악화되기 쉽게 마련이고, 결국엔 그 돈과 이제까지 유지해오던 인간관계까지도 자신으로부터 떠나고 만다는 진리를, 그제야 나는 괴로운 실습과 비싼 수업료를 치른 끝에 겨우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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