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의 변신(1)

2007.01.19 01:55

이성열 조회 수:970 추천:29

<소설>                   [7년만의 변신]
<1>                                    -온전한 사랑-                                                                                     이성열작            
혜수와 연락이 끊기고 나니 나는 다시 혼자였다. 나는 처절한 심정이 되어 혼자 살아야하는 어떤 운명에 속박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에겐 과연 이성과의 인연이 없는 걸까.
그녀와 연락이 끊어진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나로서도 무슨 변화가 없는 한 그녀에게 다시 연락할 기분은 내키질 않았다.
그 때 그 먼 길을 달려갔던 교회에서 그녀는 나를 무슨 징그러운 벌레라도 대하 듯 했었다. 그런 느낌은 나 혼자만의 자괴심에서 온 걸까? 하여튼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부담이 되게 남의 눈에 띄어서 남자가 있는 여자로서의 인상을 줄지도 모를 그런 귀찮은 나라는 존재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찾지 말아 달라는 듯한 태도가 내 자존심을 되게 건드렸었다. 아직도 나는 그날 그녀가 그런 행동을 취한 진짜 이유는 모른다.
이성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끊긴 절대 고도에서의 생활과도 같은 상실감이 내 전신을 엄습하고 있다. 나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 이제 누구를 의지할까. 이곳 미국에서의 환경이 나를 더욱 그렇게 느끼게 만들고 있다. 다시 내게 밀려 닥치는  이 절망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나는 산책을 한다. 공원과 주위의 마을을 하염없이 돌아다니다가 아파트에 돌아오면, 다시 뭐로 아침 끼니를 때울 가를 걱정하다가,  차를 몰고 식당으로 간다. 아침부터 싸구려 식당은 북적댄다. 뜨거운 커피 한 잔에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두개와 베이컨이 겨우 2 달러라면, 그리고 그 돈이 없어 끼니를 굶는다면 거지도 믿지 않을 일. 대개의 경우 굶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차라리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아서일 경우는 종종 있다.
어쨌든 콧대와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 그래서 식당은 늘 붐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처에는 대형 아파트가 많이 있으므로. LA에서 제일 큰 아파트 단지이다. 아침이 되면 그곳으로부터 사람들이 무어라도 먹으러 몰려나온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다. 은퇴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노동자가 아니고 은퇴한 노인들이라도 사람은 허구한 날 먹어야 사는 법.
나는 커피와 토스트를 시킨다. 이 집 커피는 특히 구미가 당긴다. 갈색 설탕에 이 집에서 넣는 밀크 크림은 특별히 커피와 잘 조화를 이루어 기막힌 커피 맛을 창출한다. 이 집 토스트 또한 무슨 빵을 쓰는지 그 맛이 구수하기 그만이다. 갓 구워진 빵에다 버터와 잼을 발라서 한 쪽 구석을 베어먹는 맛이란 배고플 때 흰밥에 마가린을 넣어 비벼 먹는 만큼이나 맛이 있다. 이 맛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별미이다.
옆에는 백인 할머니가 앉아서 나와 같은 식사를 한다. 이제는 늙어서 자신의 지체도 지팡이가 아니고선 의지할 수 없는 신세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녀도 젊었을 때는 영화배우 â데보라 커ä를 뺨 칠만큼 미인이었을 것만 같다. 이목구비가 한 군데도 허술한 곳이 없다. 부스스한 머리도 제법 금발이고 지금은 희미한 눈 또한 둥글게 크고 토파즈처럼 파랗기만 하다. 그녀는 무슨 일로 이렇게 쓸쓸히 혼자 나와서 싸구려 식당에서 나처럼 식사를 하는가.
  모두는 이곳에 혼자 사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 같다. 마치 양로원 급식소 같은 싸구려 식당, 그러니 이곳엘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이곳에 있으면 나도 순간적으로 10년은 더 늙어지는 기분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서둘러 남은 커피를 훌쩍 마신다. 그리고 식당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와서 빈 전화통 옆에 앉아서 신문을 뒤적거린다. 뉴스라고 눈에 들어 오는 것이란 없다. 역시 무료하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친구에게 달려가서 하릴없이 공연히 서성댄다.
  전에도 나는 물론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에 더 유독 고도와도 같은 절망에 휩싸이게 되었는가.
<2>
오후에는 밥벌이를 위하여 일터에 가야 한다. 직장 또한 무관심 속에서 허우적 대야하는 또 하나의 적막한 공간. 직장엔 자동화, 컴퓨터 화로 다급한 일거리가 없다. 직원들은 겨우 일터에 나오지만 회사는 그들이 나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나처럼 밥벌이로 일터에 나올 뿐이고, 회사는 단지 전년에 맺은 계약 조항 때문에 임금을 지불할 따름이다. 자신의 다른 일을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직원은 언제라도 직장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 게 회사 방침이다. 영구 사직이든, 아니면 임시로 얼마간이라도-.
그러니까 사무실은 늘 게으른 공기가 독가스처럼 흐르고 있다. 흑인들의 재-즈와 랩 뮤직, 굴러다니는 신문 쪼가리와 잡지, 게으른 사람들이 뱉어내는 출렁이는 웃음, 넘쳐나는 쓰레기, 빈 콜라 캔, 먹다 남은 패스트푸드-.
나는 이 허무를 다스리기 위하여 읽을 거리를 들고 씨름을 한다. 요즘은 그녀의 권유로 고리타분한 성경을 읽는다. 구약성서 중 사무엘.
정말 따분한 옛날 이야기다. 그것도 현대와는 공감대가 전혀 없는 사막 유목민 중 작은 부족인 유대 민족의 옛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내 흥미를 끌어 낼 이유가 없다. 목동 다윗이 돌멩이 하나로 장군 골리앗의 정수리를 쳐서 싸움에 이겼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를 열광적인 믿음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음은, 혜수가 매일 했다는 기도의 힘으로 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일 따름이다.
그래도 요즈음 유일하게 나를 방문하는 믿음의 친구 데이빗 부부는 내가 성경을 읽는다는데 고무되어 성경을 부수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는 두꺼운 책자 하나를 더 얹어 놓고 갔다.
그래도 그들은 내가 혼자 사는 독신임을 알아내고 부터는 열성으로 나를 방문한다. 그들 생각엔 나를 성공적으로 전도하고 있다고 믿는 걸까. 하긴 언젠가는 무료함 끝에 그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아파트에 들러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들과 오랜동안 대화도 했었다.  아이도 없이 평생을 종교적 신념으로 살고 있다는 그들은 직장 다니기도 거의 포기하고 선교를 위하여 그들의 삶을 헌신하고 있었다. 수입이래야 그 아내 헬렌이 파트타임으로 벌어들이는 5 백 여 달러. 같은 신념의 아파트 주인의 배려로 아파트 월세는 단지 2백 달러, 그 나머지가 그들의 생활비였다. 데이빗은 나에게 말했다.
저희 종교의 헤드쿼터는 뉴욕에 있지요. 저희의 소원은 그곳에서 일하는 거랍니다. 그러나 신청자들이 줄을 서고 있으니까 언제 저희의 차례가 와야 말이지요.é
ü그곳에선 생활 보장을 해 주나요?é
ü알기로는 보수가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래도 신도들이 줄을 대고 있다니까요.é
그러면 어떻게 생활을 하시죠?é
ü그러니까 그리로 가기 전에 좀 저축을 해야지요.é
나는 기가 막혔다. 지금도 돈 벌 만한 일이라곤 하나도 안 하는 그들이 어떻게 돈을 모아 그들의 소원을 이루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혼자 사는 내 걱정을 태산처럼 하고 있었다.
ü어떻게 이렇게 혼자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 사람에게 아내를 주었습니다. 여자와 함께 사는 삶만이 완성된 삶이지요.é
ü같이 살아 갈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é
ü그러니까 저희와 같이 종교를 믿으세요. 훌륭한 여성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남편을 교회가 예수님 섬기듯 할 좋은 혼자 사는 여성이 여럿 있습니다.é
나는 그들의 기발한 제안에 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ü하하, 결혼을 위해서 무턱대고 종교를 믿어요?é
ü아마 요즘에도 남편을 하늘처럼 받드는 여성들은 우리 교회에 뿐이 없습니다. 교회엔 참으로 좋은 독신여성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살지요.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대하듯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듯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믿죠.é
ü그래요? 이상적인 것 같군요. 생각해 보죠.é
ü농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é
데이빗의 아내 헬렌도 옆에 앉아서 확인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요즘 들어 자주 나를 방문한다. 한 달 후에는 북가주 어디엔가 에서 대대적인 그들만의 모임이 있을 예정이라는데, 그들은 벌써 나를 그곳에 데려가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 다른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서 그들의 생을 바친 한 쌍의 부부였다.
그들이 말하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가 나의 이 외로운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과 아마도 바쁘게 휩쓸리다 보면 때때로 덜 고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러나는 신념이 없이 의혹 투성이의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외로운 방황이 아닐까?
<3>
나는 어여쁜 혜수를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녀는 전처럼 평범한 나의 사랑을 거부하는 걸까? 왜 그녀는 자신의 험난한  삶을 손에 쉽게 잡히는 이성간의 따뜻한 사랑을 개발하고 찾는데 노력하지 않고, 죽은 다음 내세에 관해서만 더 관심을 쏟는 걸까? 그건 문제 투성이의 현실을 외면하고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일종의 허영심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그녀가 한 때나마 심각하게 결혼을 생각하였을 땐 나에게 이런 말도 했었다.
선배 언니와 상의 해 보았어요. 왜 나는 결혼을 해야 하는가 를요. 그렇다고 제가 상대로 인철씨 이름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에요. 만일 마땅한 상대가 있다면, 내가 결혼을 해야 하는냐구요. 그녀는 말했어요. 그건 절대적인 필연이라고요. 더 나이 먹기 전에, 내 딸애가 더 자라기 전에, 나는 빨리 결혼해야 한다구요.
하지만요, 저는 아무래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하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혼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비신자라 해도 내가 그를 감화시킬 수도 있고, 그래서 교회로 인도할 수 있다고요.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랑이라는 건 왠지 자신이 없어요.é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물었다.
ü그러면 차라리 혼자 사는 목사나 장로 같은 신앙심이 깊은 교직자들을 찾아보지 그래요? 혜수 씨는 내가 보기에 충분히 그런 내조자의 자질이 있어 보이는데-.é
그렇지 않아요. 잘 못 보신 거예요. 저는 제 상대로 평신도가 맞아요.é
ü그건 왜죠?é
ü왜냐고요? 글쎄요. 저는 아직도 세상맛을 즐기는 편이지요. 예쁜 옷을 보면 사고 싶은 충동이 아직 있거든요. 그렇다고 쇼핑이나 즐기고 하는 편은 못돼요. 아직 까진 사 놓은 것들을 즐겨 입는 편이지요.é
그녀의 말을 듣고 내심 나는 생각했다.
â잘하는 생각이야, 동기는 다르지만 그들을 넘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냐하면 그들도 혜수 같이 악조건에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택하러 들진 않을 테니까. 항상 예외는 있겠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항상 사랑과 희생이라면 자신들의 전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도, 막상 자신들의 이익이 걸린 일이라면 그런 희생을 위하여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진 않을 꺼야. 요즈음엔 그들도 신흥 엘리트로 군림하고 있거든. 그들 중에 예수처럼 가여운 자들을 위해 손해보려는 자들은 찾아보려야 없지. 그러니 그녀처럼 첫사랑에 실패하고 딸이나 데리고 가난하게 사는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여자를 선뜻 아내로 맞아 드리려 하겠어.â
하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서 그만한 헌신쯤은 자진해서 맡아 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니까-.그들의 주장처럼 예수가 인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시키고 그런 사랑의 힘만이 오직 헌신과 구원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 나는 그녀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가 걸머진 그녀의 딸까지도 함께 사랑하려 한다.
언제부턴가 나도 희생이 없이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어 온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성경 말씀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다름 아닌 이 구절,-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태연스러워 졌다.
ü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의 부인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건요, 참말로 그들은 훌륭하다, 어떻게 세상 재미라고는 누릴 수 없는 성직자를 배필로 삼고도 저렇게 만족하며 그들만을 내조하며 살 수 있는가......, 나는 아직까지 목사나 장로 부부들이 이혼을 했거나 별거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é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요즘 목사들과 사는 젊은애들 한심한 여자들도 많어요.é
그래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는 걸요.é
나는 그 때 평신도 운운하는 말을 듣고 일단 영광스럽게도 내가 그 범주에 속하는 후보가 될 수도 있으므로, 그녀가 나를 받아드릴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다고 내 멋대로의 해석을 하며 좋아하였다.
<4>
  그 후 우리관계는 약간의 진전을  보았다. 그녀가 나에게 식사 초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않던 문제는 그녀의 딸 제니 였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밉보이기 시작해서 다시 그 애와 대면한다는 생각만 해도 신경 줄이 벌써부터 팽팽하게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지난번 그들과 함께 골프 연습을 하러 골프장에 간 것은 결과적으로 잘못이었다. 상쾌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기분 좋은 오후였었다. 혜수는 나에게 그녀가 선물로 받은 골프채 셋트를 보이며 골프를 칠 줄 몰라 배우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딸 제니와 함께 근처의 골프장으로 향했었다.
아무래도 혜수는 골프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약간의 코치를 해야 했는데, 그것이 제니에게 내가 밉보이는 구실을 주었던 것 같다. 코치를 하자니 자연스레 나는 그녀로 하여금 클럽을 바르게 쥐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의 손도 잡았고, 또 어깨와 허리도 잡아 주어야 했다.
나는 그러면서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제니가 우리들 뒤에서 그러한 일들을 예사롭지 않게 음흉스런 눈을 뜨고 차근차근 지켜보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그런 태도를 개의치 않았다.
어린 제니도 처음에는 골프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애의 이런 일련의 행위를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고, 또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방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제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이, 베이비, 네 차례가 되었으니 한 번 잘 해 보라고!é
그 때 제니의 감정은 단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 지더니 들고 있던 골프채를 저 멀리 연습장 안으로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골프채가 순식간에 쳐낸 골프 공들만이 널브러져 있는 레인지 연습장 안으로  나둥그러져 초라하게 나가 떨어졌다.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혜수는 경험 있는 아이 어미답게 침착한 어조로,
제니야, 아저씨가 농담하신 거야, 어서 주워 오렴! 하고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나 제니는,
싫어! 나는 베이비가 아니란 말야!é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위의 사람들이 갑자기 소란해진 우리 쪽을 돌아다 봤다. 그래도 상관 않고 제니는 이제 바스켓에 들어 있는 골프 공들을 집어서 아무 데고 하나씩 던져 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처구니없이 그녀의 행동만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베이비가 싫으니? 내가 농담으로 그랬을 뿐인데-, 필요하다면 내가 너에게 사과를 하겠어.é
그래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공을 집어 천지 사방으로 던졌다. 어이가 없어 나는 혜수를 쳐다봤다. 그런데도 그녀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자신의 스윙 연습만 계속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딸은 난동 비슷한 행패를 부리는데, 엄마는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쟤가 혹시 우리들이 사이좋게 공을 치니까 질투로 저러는 거 아녜요?é
그녀가 공을 치다가 나를 쳐다보고 눈을 찡끗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수긍했다. 제니는 이제 심통으로 골프채를 들고는 공을 레인지의 반대 방향인 호수 쪽으로 쳐내기 시작했다.
제니야! 너 왜 그러니?é
보다 못한 혜수가 다시 한 마디를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씩씩거리며 엄마에게로 달려와 골프채로 때리려다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허리를 밀쳤다. 어미가 공을 치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듯  밀려 나갔다. 약이 머리끝까지  오른 제니의 어린 가슴이 손아귀에 잡힌 새처럼 할딱거렸다. 보다못한 내가 제니에게 한 마디 했다.
너, 엄마한테 그러면 나쁜 애야! 내가 베이비라고 한 말 취소한다고 했잖아?é
ü아저씨도 나쁜 사람이야!é
제니가 내 말을 되받아서 크게 소리쳤다.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는 그날 어떻게 나머지 연습을 끝 마쳤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내 딸로 보이는 버릇없는 제니의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의 눈치가 얼마나 따가웠는지 무척 당황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혜수는 그 일을 별로 마음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제 자식이라 해도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나에게, ü제니는 곧 후회할 거예요. 쟤는 자신이 크리스천 소녀로서 그렇게 행동하면 못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본래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요.é 라고 말했다.
나도 그러기를 바랐다. 제니의 버릇없음이 우발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일어난 일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연습을 계속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식사를 하러 골프장 내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미국식 간이식당이라 다양한 메뉴는 없었고, 주로 아메리칸식의 햄버거나 핫도그, 그리고 스파게티가 서브되고 있었다. 왜이트리스인지 쿡인지 모를 행주치마를 두르고 달려 온 중년부인에게 나는 콜라와 햄버거를, 그리고
혜수와 제니는 스파게티를 각각 시켰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나는 관심을 가지고 제니의 태도를 계속 주시했다. 그녀는 계속 시무룩했지만, 별 다른 떼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에 음식이 나오자 배가 고팠던지 허겁지겁 그걸 다 먹어 치웠다.  혜수는 스파게티가 맛이 없는지 조금 먹는 체하다가 손을 놓았다.
나는 수그러든 제니를 보면서 다시는 이제부터 그녀에게 어떤 농담도 하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이들이란 사실 심성이 단순하고 직선적이어서 어떠한 농담도 이해 할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제니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다시는 제니 에게 농담하지 않을게-, 약속이야!é
ü너도 아저씨에게 다시는 말썽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é
혜수가 딸에게 말했고, 그 말에 제니도 어린이 답께,
네, 나도 앞으로는 말썽 부리지 않겠어요.é 라고 마지못해 말 몇 마디를 늘어놓았다. 그 후 나는 혜수와 직장 일에 대해서, 그리고 최근 바꾸게 된 컴퓨터 시스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은행 대리인이라 그런지 최신 컴퓨터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의 운용도 어느 면에서 나보다도 훨씬 더 나아서 상대적으로 꽤 유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골프장에서 멀리 떨어진 집으로 가야했으므로, 우리는 서둘러 헤어졌다.
<5>
나는 그녀의 식사초대에 응해서 잔뜩 부푼 마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지루하게 오랫동안 차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집에 당도해서 처음 얼마 동안은 아주 만족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보금자리와도 같은 내 집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혜수는 나를 위하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늘씬한 체격의 그녀가 아름다운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빈틈없는 솜씨와 손놀림으로 재빠르게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제니와 함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TV를 보는 체 하면서 곧 어여쁜 혜수와 부부가 되어 딸 제니를 데리고 같이 쇼핑도 다니고 공원에도 가는 아름다운 장면을 그려보았다. 그렇게 되면 이제 허구한 날 노을 녘에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돌아오는 일이라던가,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홀로 사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싸구려 식당가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주말이면 어디 갈 데가 없어 장사하는 친구의 가게에나 가서 서성거리며 일이나 거들어주는 일도 없을 테고, 쓸데없이 혼자 차를 몰고 헐리우드 산에 올라 가 스모그로 가득히 덮인 도시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앉아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갑자기 TV를 보던 제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TV스위치를 찰깍하고 꺼 버렸다. 그 때 혜수가 부엌에서 그 장면을 보았는지 제니를 나무랐다.
얘, 제니야!, 아저씨도 보시는 TV를 왜 끄니?é
어때, 내 마음이야! 여긴 우리 집이쟎아!é
혜수가 조용히 타일렀다.
제니야, 그러면 못 써! 제니는 착한 아이지?é
아 돈 케어! 나는 테니스 칠 거야!é
나는 맥쩍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하는 대화를 번갈아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대화를 확실히 이해 못하는 외국인처럼-. 제니가 곧 옷을 넣는 클로셋으로 갔다. 꺼진 TV때문에 초점을 잃은 나는 닭 쫓던 개 모양 방향을 잃고 그녀의 일거 일동을 살피는 일 뿐이 없었다. 잠시 후 제니 가 테니스 라켓과 공을 들고 왔다.
너 테니스 잘 치는 모양이구나!é 내가 제니에게 말했다.
아저씨, 밖에 나가 테니스 쳐요!é
ü저녁 먹어야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테니스는 저녁 먹고 치렴.é
혜수가 제니에게 일렀고, 꺼진 TV로 무료해진 나는 자신도 모르게 탁자 위에 놓인 어린이 바이블을 집어들었다. 그 때 제니가 내게로 달려 오더니,
아저씨, 만지지 마! 왜 남의 걸 막 만져!é 라며 손에 든 책을 뺏어 갔다.
ü아저씨, 그럴래면 나가! 가란 말이야!é
나는 다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뜻밖에 애가 버릇없이 나오는 통에 내 참을성도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애가 바로 그렇게도 차분한 혜수의 딸이란 말인가? 그 엄마에 그 딸이란 말은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혜수는 틈틈이 자신의 딸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가 비록 일곱 살 짜리 철부지에 불과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사려가 깊고, 뜻 있는 말을 곧 잘 하곤 해서 그녀와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곤 한다는 거였다. 또 어린 나이에 아빠와 헤어져서 그에 대해서 궁금도 하련만,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서인지 일체 그 문제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피하는 어른스러움도 가지고 있는 애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제니는 엄마가 직장에 간 사이에도 혼자서 집을 보며, 식사 준비도 해 놓고 또 집을 치울 줄도 안다 고도 했었다.
이런 제니가 나에게는 이렇게 무례하고도 버릇없게 나오다니-. 나는 혜수를 쳐다봤다. 그녀는 내가 지금 자신의 딸한테 곤혹을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이,
자, 식사 드시지요, 준비가 다 됐어요.é 하고 천연스레 말했다.
나는 훌훌 털고 일어서서 식탁을 바라봤다. 식탁에는 정말 어느새 그림같이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 때 제니가 다시 투정을 부렸다.
난 밥 안 먹는단 말이야! 테니스를 칠 거야!é
ü그래, 넌 얼마 전에 식사를 했지? 아저씨 식사하실 동안 기다려라, 너는 먹지 않아도 되니까.é 하더니,
ü자 어서 식탁에 앉으시지요. 차린 것은 별로 없습니다.é 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준비할 만큼은 다 한 모양이었다. 국과  밥, 그리고 찌개, 기름을 발라 구운 김, 김치와 생선 구이까지 용케 준비해서 차려 놓았다.
나는 마침 배가 고팠고, 또 제니 가 테니스를 치러 나가자고 졸랐으므로 단숨에 밥을 비워냈다. 그러나 너무 급히 먹어서인지 아직도 시장 끼가 다 채워지지 않았으므로, 혜수가 권하는 대로 빈 그릇을 내밀고 몇 술의 밥을 더 먹고자 했다.
그 때 그것을 보고 있던 제니의 성질이 다시 폭발했다.
고만 먹어, 아저씬 정말 돼지야!é
아무리 어린아이라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나는 입에 구겨 넣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질 않았다. 나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혜수를 쳐다봤다. 헌데 그녀는 이런 버릇없는 애를 보고도 별반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의 버릇없음을 애써 좋게 생각해 보려 하였다. 철모르는 어린애도 질투를 하는구나. 자신의 엄마와 내가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시기를 하다 보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나. 이럴 때일수록 빨리 밥을 먹고 나가서 같이 놀아주자. 어른이 돼 가지고 아이 기분 하나 맞추지 못 한다면 어디 어른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바로 그 때 나는 친지들의 충고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아이 엄마의 사랑을 차지하려거든 그 아이의 마음을 먼저 사로잡아라. 그래야만 그 어미와의 사랑도 가능하다. 아이와의 관계가 잘 된 후에나 그 엄마와의 관계도 비로소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다.
나는 숟갈을 놓고 허겁지겁 신발을 발에 꿴 채로 밖으로 뛰었다. 보다 못한 혜수가 말했다.
어머나, 아이 등살에 드신 것도 없이 체하시겠어요. 마음놓고 다 드시지도 못하고-.é
ü염려 마세요. 아주 맛있게 잘 먹었어요. 금방 이렇게 좋은 식사를 준비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é
ü별 말씀을 요. 그냥 저희 먹는 대로 준비했을 뿐인데요.é
<6>
테니스를 어디서 친단 말인가? 식사 끝이라 배는 부를 대로 불러오는 마당에-. 나는 서둘러 제니를 따라 밖으로 내달았다.
승용차 차고가 있는 주차장 앞에 이르자 제니가 나에게 테니스 라켓 하나를 건네었다. 그곳에서 차고 문에 대고 벽치기 연습놀이를 하자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가 하자는 대로 닫아 놓은 차고 문에다가 공을 쳐 올렸다.
ü그렇게 너무 세게 치지 말란 말이에요!é
공을 받아치지 못한 제니가 앙탈을 부렸다.
아저씨 잘못이니까 가서 공을 주워 오란 말이야!é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명령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테니스를 잘 못하는 어른과 아이가 손발이 맞을 리가 없었다. 공은 번번이 겨우 한 번 정도 라켓에 맞고는 넓은 주차장 구석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 도망갔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한 번도 공을 주우려 스스로는 달려가지 않았고, 오히려 나더러 주워 오라고 지시를 내리고는 버티었다.
ü유아 더 트라블 메이커!, 대츠 유아 폴트!, 픽 대 랍!(아저씨 잘못이야! 주워와요!)é
  몇 번을 뛰어서 공을 주워 온 나는 헐떡이며 아이를 쳐다봤다. 버릇이 없기로서니 이렇도록 안하무인인 아이는 처음이라 생각되었다. 그러고 아이 심부름이나 하며 서 있는 나의 처지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이 재미없고 짜증나는 공이나 치고 있으란 말인가? 얼마 후엔 또 혜수를 따라서 교회 저녁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 교회 창립 5주년 기념으로 특별 집회가 있으므로 그곳에 참석도 할 겸, 겸사로 그녀가 나를 저녁에 초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헐레벌떡 제니와의 재미없는 공치기를 하기 얼마가 지나가자 집안으로부터 혜수가 나왔다. 그녀가 기진맥진해 있는 내 옆으로 오더니,
갑자기 뛰니까 힘드시죠?é 했다.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ü그것도 게임이라고 잘 얻어맞질 않는군요. 시간이 다 되었나요?é
네,é 하더니,
ü제니, 그만 치자! 교회에 가야지!é 하고 소리쳤다.
아이가 엄마의 말에 되 받아 소리쳤다.
노오우, 나는 더 칠 거야!é
얘는, 교회에 갈 시간이 되었대두-.é
그 때 갑자기 제니 가 엄마에게 달려오더니 씩씩거리며 그녀를 집 쪽으로 밀고 갔다. 엄마는 집에나 가 있으라는 모양이었다.
ü엄만 집에나 있어, 난 교회에 가지 않고 테니스 칠 거야!é
ü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크리스찬이 그런 소릴 하면 못써! 자 그만큼 했으면 됐지, 조금 있으면 어두워 질 텐데-.é
그래, 제니야, 오늘은 그만 치자.é 하고 내가 한 마디 보탰더니,
유 셔럽!(닥쳐요!)é
제니 가 말을 막으며 사나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순간 나와 혜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고개만을 갸우뚱했다.
얘가 손님이 오신 걸 알고 오늘은 이렇게 더 버릇없이 굴어요.é 혜수가 변명했다. 손님이 오면 아이들이 버릇이 없어지는 건 나도 친구의 집에 가서 경험을 해 본 적은 있었다. 그래도 이 아이는 좀 심하다 싶었다. 더구나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않는가.
<7>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도 마지못해서 얼굴이 심술로 일그러진 채로 어른들을 따라 들어 왔다. 혜수가 나에게 말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제니가 곧 후회 할 거예요. 사실 전에는 이렇게 못되게 군 적이 없거든요. 손님이 와서 그런가 봐요. 아이가 근본적으로 나쁘지는 않거든요. 인정도 많은 편인데......미운 일곱 살이라서 그런지......é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é
나는 그녀의 변명 비슷한 말에 뜻도 없이 이렇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사실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착잡하고 무겁게 흔들렸다. 예쁜 이브닝 가운을 입고 맛있는 저녁상을 준비할 줄 아는 혜수에 대한 나의 애착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녀 딸의 존재가 그와 비례해서 나에게 더 부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혜수를 포기하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렇게 버릇없는 아이를 다루어야 하는가.
남의 자식을 데리고 같이 살아 보겠다고 나서는 것만도 커다란 희생과 용기가 필요한 마당에, 저렇게 사사건건 아이가 도전적이고 반항으로 나온다면 끝내는 나의 참을성도 그 한계를 드러내고 미친 듯이 폭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혜수와의 사랑도 조금씩 식고 금이 가게 마련이고, 그 기본 관계조차도 점점 어려워저 갈 수밖에 없겠지 않나. 그런 소용돌이가 그치질 않고 반복된다면 어떻게 행복한 가정을 무난히 꾸려 가겠는가. 나는 그녀를 만날 적마다 그녀에게 걸었던 기대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장애물에 부딪쳐야 하는데 대해 적쟎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차에 태우고 교회로 가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혜수는 테니스 게임으로 마음이 들떠 있는 제니를 달래어 데리고 가느라고 뒷좌석에 앉아서 그녀를 구슬르고 있었다.
테니스는 다음에 아저씨가 또 오실 때 치면 되잖니. 그리고 교회에서 장난치고 말썽부리면 안 되는 거 알지?é
제니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교회에 가서 집회에 참여하는 동안 나의 수심은 조금씩 풀어질 수가 있었다.
제니를 어린이 집회에 보내고 난 뒤라, 나는 혜수와 호젓하게 나란히 앉아서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 기도할 때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왕 나와 혜수와 제니의 관계에서나 이 모든 복잡한 난관들이 주님이 도움으로라도 잘 해결되고 이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나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혜수도 물론 이런 취지의 기도를 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녀에게 우리가 결혼을 전제로 심각하게 만나고, 이 관계가 성공적으로 맺어지도록 노력하자는 프로포즈를 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밤인데도 먼길을 달려와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집회나 같이 참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더우기 말썽꾸러기 제니와 함께 놀아나 주기 위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이렇듯 그녀와의 오늘의 일들을 포함한 일련의 만남이 싱거운 장난으로 맥쩍게 끝날 일일 수는 없는 거였다.
<8>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혜수가 첫 남편과의 뉴욕 생활을 일찍이 청산하기로 하고 3천 마일이라는 먼 거리의 LA로 달려와 정착하고자 하였을 때, 나는 그녀를 처음 한인 봉사회에서 만났었다. 이 살벌한 도시에서 그녀는 아는 사람이란 없었고, 새로 시작하는 삶이니 만치 우선 누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처지였다.
그 때 봉사회에서 일하고 있는 내 친구 하정민이 나더러 서둘러 달려 와 보라는 말에 그곳에 갔을 때, 정민은 나에게 그녀를 위하여 그녀가 살 아파트를 찾아주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도 혼자 살고 있는 나를 위하여 혹시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내게 그런 일을 맡겼겠지만, 그녀는 정말 보기 드물게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정체 불명의 독신녀였다. 그 때 나는 교통 수단조차 없는 그녀를 태우고 신문광고 쪽지를 들고 적당한 빈방을 찾아 한인타운을 헤매고 다녔고, 크렌셔와 올림픽 거리가 만나는 곳에 작은 빈방을 얻어 준 다음에는 전화를 비롯한 유틸리티 등의 신청까지도 내가 도맡아서 다 해 주었다.
  당시 그녀는 어리던 제니를 자신의 친정에 보내 놓았기 때문에 마치 처녀처럼 홀몸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세상에서 감추고 싶은 처지라서 인지, 아니면 그동안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인지, 한 마디의 말조차도 삼가는 눈치였다. 그리고 단지 자신이 필요한 도움만을 받으려 들 뿐, 다른 것엔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내 보이질 않았었다. 그녀는 오로지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하다는 말과 또 필요로 할 때 연락을 하겠다는 짧은 인사를 했고 우리는 그 때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곤 내가 다시 연락을 시도할 때마다 전화는 받는 사람도 없이 메시지만을 요구하더니 메시지를 남겨도 아무런 답신도 없이 곧 그 마저도 끊기고 말았다.
그로부터 그녀는 임시로 얻은 직장과 거처를 자꾸 옮겨가면서 내 기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 후에도 나는 혼자 지내면서 외로울 때마다 설핏 그녀의 모습을 떠 올려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알 길이란 묘연했다.
그런데 장장 7 년여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쇼핑 몰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을 때, 첫 번째로 서로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ü결혼했느냐?é 는 질문이었다.
나의 제안으로 백화점의 음식 코트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서로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역시 서로의 현재 신분이었던 것 같았다.
우연찮게 그녀를 길가에서 해후하게 되자 나는 참으로 반가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더니,  그녀를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내가 처음 얼마나 그녀를  만나려고 고대했었나? 뜻이 있으면 길이 있었다. 나는 이 말을 이처럼 공감해 본 적은 일찍이 없다. 단 한 번의 기회 7 년 전 그녀의 마음은 원체 무엇엔가 단단 옭매어저서 우리 사이엔 아무런 대화조차 마음놓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동안 여유를 되찾은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표정도 전과 다르게 많이 밝아져 있었다. 일상생활에 대한 걱정도 이제는 할 필요가 없는 듯 해 보였다.
이야기를 해 가면서 나는 그녀가 그 동안 너무도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가 원체 능력이 있어서인지 취직은 생각보다 쉬웠고, 사실 지원하는 곳마다 수월하게 취직이 되어, 복수로 선별하느라 어려웠던 건 혜수 편이었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역시 그녀는 천부적 자산인 수려한 외모를 앞세웠기에 취직도 그토록 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특히 여자에게 외모는 역시 중요한 자산이라고 나는 줄곳 생각해 온 터였다.
그녀는 지금 굴지의 은행에서 대리로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이곳에서 초급 대학에도 다니면서 여분의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그리고도 안정되기 힘든 마음을 잡아보려고 다니기 시작한 곳이 교회였다.
그녀의 모습은 7 년 전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어렸다는 제니는 자라나서 어엿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장난꾸러기로 보이는 아이가 하나 달려 있어서 나는 혹시 그녀가 다시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은 줄로만 착각을 했었다.
결혼 하셔야죠? 제가 친구를 소개해 드릴까요?é
이런 제안을 받고 그녀에 대한 호감을 잔뜩 가지고 있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ü왠 친구 말만 하세요. 본인도 혼자라면서-.é
저야 뭐-, 원체 구제 불능이잖아요.é 하면서 자신의 어린 딸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혹으로 붙은 딸 제니를 고려에 넣어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러면 우리 서로 구제해 주는 셈치고 앞으로 계속 만나고 연락하기로 하지요.é
혜수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곧 바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오랜 세월 뒤에 다시 만난다는 것이 보통 인연이 아니쟎습니까?é 하고 다그쳤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일에서 돌아오면 오후에는 늘 집에 있는 편이니까요. 참 저희 사는 데도 한 번 오시구요.é
그래도 되겠습니까?é
ü그럼요. 부담 갖지 마세요. 이제 이 나이에 뭐 꼭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é 하며 그녀는 서슴치 않고 그녀의 주소와 약도를 그려 나에게 주었다.
그날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이 나와 혜수 관계의 새로운 시작이 된 셈이었다.
<9>
교회 집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보니 밤 11시를 넘고 있었다. 혜수가 제니를 데릴러 어린이 교회 학교로 가고, 나는 차를 이끌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인데도 몰려 온 교인들로 주차장은 초만원이었다. 내가 혜수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한 시라도 빨리 차를 빼고자 하는 바람에 대단한 혼잡을 이루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주차장은 하나 씩 둘 씩 이가 빠지 듯 비어갔다.
집회는 담임목사의 장황한 설교로 이어졌는데, 저녁을 바로 배불리 먹었고 또 제니와 정신없이 테니스 공을 따라 뛰어다닌 끝에 노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모든 이야기는 혼수상태에서 들었던 것처럼 희미할 따름이었다.
목사는 의심하는 모든 자들을 마귀의 새끼라고도 말한 것 같다. 이 세상 지식을 거짓이라고 싸잡아 비난한 것도 같다. 그 이상은 아무리 생각을 가다듬어 무슨 내용이었나 생각해 보려 해도 가닥이 잡히질 않는다. 목사는 구약의 민수기를 예를 들어 설교를 했던 것도 같고, 또 레위기를 인용해서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만일 나의 이런 사실을 혜수가 안다면 그녀는 얼마나 실망스러워 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설교가 어땠느냐? 하는 식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딸을 서둘러 데려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만일 이후라도 그녀가 나에게 오늘의 설교에 대하여 묻는다면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 봐야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밤은 늦었고, 또 제니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녀는 엄마라는 신성하고 준엄한 의무로 돌아가야 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얼마 후 혜수가 제니를 데리고 오더니 또 차의 앞 좌석은 비워둔 채 뒷좌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앉았다. 나는 어떻든 그만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제 그녀가 설교에 대해서 다시 언급할 확율은 훨씬 줄었다는 사실에, 나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하면 되는 거니까.
나는 그들이 문을 완전히 닫은 것을 확인한 후에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달려서 그
들의 아파트로 갔다. 아파트는 교회로부터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순식간에 그곳에 도달했다.
밤이 이미 늦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내려놓고 곧장 내가 사는 곳으로 떠나가면 되었다. 제니만 없다면 혜수의 양해를 구해 아파트로 들어가서 차나 포도주라도 한 잔 얻어 마시고, 또 그대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어떻게 같이 하룻밤을 지샐 기회라도 기대해 보겠지만,  그 못된 꼬마 계집애 때문에 될성부른 것도 모두 산통이 깨지고 말 테니 아예 이쯤 해서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그는 차의 시동조차도 끄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누려고 할 때, 혜수가 나더러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서둘러 아파트로 들어 갔다가 나온 그녀는 두툼한 부피의 서류 봉투 하나와 성경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 차에 넣어 주었다.
제가 쓴 신앙기에요. 그리고 성경은 요, 제가 쓰던 거지만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시간이 나시는 대로 읽어보시겠어요?é
나는 그걸 받아 옆자리에 놓고 그러마고 고개를 끄떡했다. 그리고 나는 여유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좋았어요. 집회에서도 설교로 많은 감화를 받았고요.é
ü그래요? 제가 간절히 기도했거든요. 은혜 풍성히 받으시게 해 달라고요.é
ü아, 그랬군요. 정말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은혜를 받은 것 같군요.é
ü다행입니다. 저는 그런 소리 들을 때가 제일 기뻐요. 주님이 제 기도를 들어 주신 거라 믿거든요. 어쨌든 좋은 일이구요, 안녕히 조심해서 가세요!é
안녕!é
<10>
나는 서둘러 집을 향해 달렸다. 오는 길에 나는 은혜는커녕 무언가가 마음속에 앙금처럼 찌꺼기로 남아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불과 얼마 전 제니가 보여준 일련의 무례한 행동들 때문이었다.
혜수는 제니가 돌연 질투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그 말도 부분적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제니는 어린아이로서 부모로부터 받고 자라야하는 공의롭고도 엄하며 자애로운 가정교육이 없어서 그렇게 돼버린 건 아닐까? 어린아이가 단지 질투 때문에 그렇게 어른에게 무례하고도 버릇없는 언사로 일관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로서 부모교육이 없어서 행동이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 내가 한 가족이 된다고 고쳐질 일이 아니었다. 제니의 그 못된 버릇을 바로 잡아주자면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성경 잠언인가 어디에서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는 걸 나는 기억했다. 아이들의 마음엔 미련함이 있고, 그건 회초리에 의해서만 쫓아 버릴 수 있노라고.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참되고도 온전한 사랑이 아닐까?
혜수는 딸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소홀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비가 없이 자라나고 있는 불쌍한 자식이라는 연민 때문에 회초리를 멀리 한다.   야만과 힘만이 지배하는 아프리카의 모계사회 안에서 주도권 계승이라도 보장된 야생동물 â하이에나ä 새끼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면역이나 저항력이 없는 보자기에 싸여서 불균형하게 자라나고 있는 혜수의 딸 제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혜수가 넣어 준 신앙기를 펴서 그 첫 페이지를 읽어보았다.
교회 헌금에 대한 묵상 내용이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고, 내가 수화기를 들으니 상대편에서 혜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기다렸어요. 잘 도착하셨는지 궁금해서요.é
그녀는 불과 30 여 분 전에 떠난 내가 집에 잘 도착했는지 의 여부가 궁금해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남남간의 이 끔찍한 관심과 배려, 그런 자애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사랑의 힘인가? 사랑이 식은 후라면 1년 아니 10년이 흘러가도 보여주지 않았을 이 끔찍한 관심과 애정. 사람은 이런 순간적, 찰나적 관심을 일생에 얼마간이나 상대로부터 받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걸까? 결혼 후 불과 얼마간은 이런 식으로 애정을 서로 베풀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종종 빠져버리게 되는 무관심의 수렁. 결코 우리는 이런 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만 할 수는 없쟎은가?
어쨌든 나는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집에 도착해서도 전화를 걸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ü아-, 미안합니다. 도착하자마자 혜수씨의 신앙기를 읽느라구요. 첫 장에 있는 헌금에 관한 묵상을 읽고 있었어요.é
나는 전화 안한 핑계를 되도록 이면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이렇게 말했다.
ü마가복음 12장 42절에 대한 묵상 말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느끼는 건요, 비록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가 내는 동전 두 닢의 헌금이 부자가 내는 많은 헌금보다 더 만족하다 하셨다 하더라도, 헌금을 그렇게 조금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같아요. 왜냐하면 그 가난한 과부에겐 그 두 닢의 동전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헌금과 재산의 비율로 보면 그녀의 두 닢은 결코 적은 게 아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é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을 예로 드신 것은 금액의 고하를 말씀하신 게 아니지요. 바치는 사람의 정성이 얼마나 들어있나 를 말씀하신 거지요. 제가 그곳에서 묵상한 것은 그 점이었어요.é
결국은 같은 말이라 생각해요. 중국고사에 유전유심(Ω≤∩▒Ω≤π²) 이란 말이 있듯이 요, 적은 돈 속에 많은 정성과 마음이 과연 들어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의 한 닢의 동전이 부자의 몇 수 만 달러에도 해당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시지 않았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요.é
여하튼 그 뜻은 액수의 고하가 아니라 정성의 유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원래 우리 영혼의 구원은 대가가 없는 거예요. 단지 산 같은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우리 영혼은 구원되는 것이고, 그 밖의 문제들은 다 하찮은 부수적인 일일뿐이에요.é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도 않는 듯 했다. 아마도 피곤함 때문이리라. 하긴 이미 밤도 늦었으니까-. 대개 이러한 논쟁의 결론이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터라, 나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기를 포기하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ü제가 방금 읽은 것은 겨우 그것 한 장이었어요.é
ü그냥 제가 느낀 대로 쓴 글이니까요, 천천히 읽어보세요.é
ü그건 그렇고 제니는 지금 자고 있나요?é
아니요, 아직-.é
나에 대해서 무슨 불평은 없던가요?é
ü그렇지 않던데요. 아-참, 아까 교회에서 차에 오를 때, 제니 가 엄마 옆에 앉고 싶다고 해서 그러마고 제니와 뒷좌석에 앉았던 거예요. 양해해 주세요.é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상상했던 것보다 제니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 배타적이던데요. 혜수씬 그런 것 느끼지 못했어요? 나는 좀 다루기 힘들던데요.é
아니오, 제니의 반응은 뭐 그렇지 않던데요. 그냥 아저씨하고 테니스 재미있게 쳤다고 하던데요.é
그렇다면 어린 제니가 의도적으로 어른인 우리 사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이중성격의 술수를 쓰고 있단 말인가?
사실이 그렇다 해도 나는 혜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딸의 그 유치한 수법을, 자신의 인생 설계에 대한 방해 음모를 전혀 의식하거나 알지 조차도 못하고 있다니-. 그 애틋한 모정이 안하무인의 버르장머리없는 딸의 품행도 까막눈으로 가리고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당연히 더 늦기 전에 고쳐줘야 할 나쁜 버르장머리를 그냥 방치하고 키우게 되는 건 아닐까? 도대체 제니 는 자기 집에 온 손님, 아니 그가 누구 건간에 어른들을 존경하고 존중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혜수에게 어느 정도라도 이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어요. 아주 예상 밖이었어요. 제니는 나에게 자기 집에서 가라고 까지 했어요. 공을 치면서도 나에게 불만이 어찌나 많았는지 몰라요. 이래도 저래도 생트집뿐이었어요. 심지어는 나에게 돼지라는 말까지 했는데 혜수씨는 몰랐단 말이에요?é
이러한 어른이 해대는 고자질을 듣고 혜수는 망연한 듯 한참 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진심에서 울어 나오는 이러한 충고까지 곁들였다.
버릇없게 된 딸의 이러한 문제들을 엄마가 나서서 고쳐야지 그밖에 누가 고칠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은 고치려해도 되지도 않을 뿐더러, 까딱 잘못하면 아동학대로 오해나 받기 쉽고 아이는 아이대로 그르칠 수밖에 없거든요. 나도 가끔 친구 집엘 가거나 또는 친척집엘 가서 그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도 보지만 이렇게 힘들기는 처음이었어요. 대개의 아이들이 다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왔어요.é
그제야 혜수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전화기에서 전지라도 빠져나간 듯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고 피곤하게 들려왔다.
제니는 그렇게 말을 하지 않던데요. 아저씨와 잘 놀았다고 만 했어요...... 어쨌든...... 제니는 양부모 밑에서 그늘 없이 자란 애가 아니란 걸 이해해 주세요.é
맞아요,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가 성격이 바르지 못할 수가 있다는 걸-.é
이 말에 혜수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그렇다고 세상의 문제아들이 다 한 쪽 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만은 아니잖아요?
양쪽 부모 밑에서 자랐건, 한 쪽 부모 밑에서 자랐건, 자라면서 비뚤어 질 수 있는 확율은 거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물론 양 쪽 부모가 있으면 다루기가 나으니까 조금은 낫겠지요.é
나는 혜수가 흥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 말엔 동감입니다.é
혜수가 계속했다.
저도 아이를 기르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어요. 우선 아이를 때려서 길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해도......, 저는 생각다 못해 매는 들지 않기로 했어요. 왜냐면 제가 어릴 때 경우를 보더라도 매 맞은 기억은 오랫동안 잊혀지질 않고 상처로 남아 있거든요. 경험이 없으시면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래서 매를 들지 않고 기르다보니 아이가 버릇이 없고, 그래서 요즘은 역시 때려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들 때는 있어요.é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렇지 그거야, 바로 아이들은 때려서 길러야만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지... 말가죽도 때린 가죽이 더 좋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야... 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이렇게 우회적인 말로 덧붙였다.
ü이웃 어른들이나 어머니처럼 아이를 기른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그 문제를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요. 저도 아이들을 꼭 때리며 키워야 한다는 걸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수 있도록 어떤 방법으로든 처벌을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팔을 들어 벌이라도 받게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é
ü하지만 저는 지금에 와서 지나간 일을 가지고 다시 끄집어내어 아이에게 트집을 잡고 야단치고 하는 따위는 하고 싶지 않군요.é
ü아니 뭐, 내 말은 지금 당장 제니를 처벌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 뜻은-오해하지 마세요..é
그 때 혜수는 자포자기한 분위기로 말머리를 바꾸었다.
아무래도 전, 인철씨의 상대로선 부적격자인 것 같아요. 어떠세요? 저에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걔는 아이가 딸리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그 애를 소개해 드리겠어요...... 나이는 저와 동갑이고... 그냥 올드 미스예요.é
그녀의 이런 제안을 듣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잘 해 보자고 충고를 해 주는데 어떻게 대화가 이런 식으로 틀어질 수 있는가. 나는 그녀와 그녀의 딸 제니의 앞 날을 진심으로 우려하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남의 집안 일에 감 놔라 배놔라 상관을 하겠는가? 혜수도 마땅히 더 나이가 먹기 전에, 또 제니가 더 자라서 말썽을 부리게 될 10대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니 마땅한 남자를 만나면 당연히 모든 일을 제쳐놓고라도 일이 성사되도록 전력을 다 해도 될까 말까한 마당에 이토록 소극적으로 일을 그르치려 하다니-.
더욱이 그녀에겐 제니 라는 말썽꾸러기가 덤터기로 붙어 있다. 나는 실망과 함께 그녀의 일종의 소극적이고 자포자기하는 태도에 분노까지 사기 직전이 되었다.
ü왜 그런 소릴 하세요? 입장을 한 번 바꾸어서 생각해 보세요. 혜수씨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려 하는데, 제가 혜수씨에게 저는 그만 두고 제 친구나 소개 해 드릴 테니 잘 해보라고 한다면 혜수씬 기분이 어떻겠어요?é
이런 나의 원망 섞인 항의에 그녀는 의외로 태연했다.
ü전-, 상관치 않겠어요. 저는 진심으로 인철씨가 보다 나은 상대를 만날 수 있도록 해 드리겠다는 의도이니까요.é
우리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가 보이는 이런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내심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ü말도 안돼요. 그렇게 미지근한 태도는 곧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 아닌가요?é
ü전 예전 같지 않아요. 주님을 믿고 구원의 희망을 가진 후부터 그런 세속적인 것에 욕심을 저버린 지 오래 에요. 전 이렇게 혼자 아이를 기르며 살다가 행여 아이를 더 좋아하고 걔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때에 가서나 결혼을 생각해도 괜찮겠어요. 그렇지 못하다면, 저는 그냥 혼자 지내다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 오늘은 그만 늦었으니 이만 끊겠어요.é
전화는 이렇게 끊겼고, 멍하니 들고 앉아 있는 내 수화기에선 공허한 전화음 만이 왱-하고 대체되어 들려왔다.
<11>
수화기를 놓고 나는 미진한 기분으로 그녀가 한 말에 대해서 곰곰히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 보아도 그녀가 한 말의 뜻은 결국 그녀는 나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게 분명했다. 아니 설사 조금 있다고 해도 그건 별로 대단치 않은 관심이었다.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욕심을 저버릴 수 있는가. 교회에 입문한지 불과 얼마밖에 안된 평신도가 세상을 얼마나 달관하고 득도한 도사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태도라니-.
그날 밤 나는 잡다한 생각에 잠도 설쳐가며 뒤척였다.
그녀의 말과 태도를 분석해 보면 그녀는 뭐 그렇게 각별하게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뜻에는 별 상관없이 누구든 딸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아이를 함께 키우기 위해서 남은 여생을 아무렇게나 살아 주겠다는 것이다. 주님만 믿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생에 결혼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로도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그런 미온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나는 결국 뭔가? 사랑이란 이런 건가? 결국 일방적으로 열내고, 혼자서만 좋아하다가 헛물켜게 하는 그런 등식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게 사랑인가?
그녀의 생각은 분명 옳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딸 때문에, 또는 믿는 종교 때문에 그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할 아무런 명분도 이유도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석가의 말처럼, 신도 개인의 축복과 영생을 위하여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의 내용도 대부분이 나를 위해 무엇을 바란다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자를 잘되게 하기 위해 개인이 기도 올리는 일은 많지 않다.
제니 문제도 그렇다. 앞으로 10년이면 그녀는 다 성장해 버릴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 무한히 펼쳐진 삶을 살아 갈 것이다.
그 때는 오히려 혜수가 그녀의 짐이 될 것이다. 아니  10 년도 다 필요가 없다. 제니는 10 대만 되면 자신의 친구들을 따라서 부모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왜 혜수는 가엾게도 종국에 가서 딸 자식의 귀찮은 짐으로 전락해 버리려 하는가? 자기자신의 삶이 바쁘고 고달퍼서 엄마의 존재를 몸 한구석 부분만큼도 안 생각해 줄 자식을 위하여 왜 자신 인생 전부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려 하는가. 그런 건 딸도 자신도 사랑하는 게 아니며, 현명한 삶이 아닌 것이다.
나는 벌써 어린 제니가 자신의 어미에게 하는 짓을 똑똑히 보았다. 아이의 머리는 확실히 단순하고 우둔하다. 그 우둔함을 바로 잡아주지 않고 그대로 자라나게 한다면 어미 양이 늑대 새끼를 기르고 있는 거나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자식의 육신이 어미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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