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로의 죽음

2007.10.20 02:53

이성열 조회 수:1274 추천:36

최 장로 영감이 죽었다. 그 혈기왕성하던 영감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내가 찾아갔을 때, 그 큰 버거-킹 와퍼 햄버거를 잘도 먹으며, â나에게 처녀를 데려와 보라고, 내 얼마든지 당해낼테니-.ä 하고 너스레를 떨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그였다. 그의 나이도 불과 60을 겨우 넘어섰다.
  입관예배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H장의사에서 대행해서 치러지고 있었다. 장의사 라지만 조그만 채플이나 다름없는 곳에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일찍 안으로 들어가기도 뭣해서 두리번거리다 건물 앞 게시판에 붙여 있는 작자미상의 영어로 된 시 한편을 읽었다.

내 무덤에 서서 흐느끼지 마라
나는 거기에 없고, 나는 자고 있지 않다
나는 불고 있는 수 천 갈래의 바람이다
나는 금강석처럼 눈 위에서 빛나는 반짝임이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위에 태양 빛이다
나는 부드럽게 내리는 가을비이다
당신이 아침의 고요에 눈떴을 때
나는 조용히 회전비행을 하던 새들이
급하게 서둘러 하는 비상이다
나는 밤에 빛나고 있는 부드러운 별이다
내 무덤 가에 와서 통곡하지 마라
나는 거기 없고, 나는 죽지 않았다

╜├┤┬ ╛ε┤└ ╕┴└┌░í ╣┘╖╬ │╗ └º┐í╝¡ ╟╧┤┬ ╝╥╕«░░└╠ ╗²░ó╡╟╛ε┴│┤┘. 그러나 그 망자는 최 장로 영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너무 갑자기 죽었으므로 아직 이런 말을 할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두서없이 하면서 나는 채플로 향하였다.
잠시 후에 들어 간 채플 영안실에는 고인의 유족을 비롯한 평소에 최장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 그리고 교인들이 벌써 와서 그들 중심으로 장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목사의 기도가 있고 곧 설교가 시작되었다.
내 살았다 할 것이 무엇이냐?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곳간에 곡식을 하나 가득 채운 들, 주님이 그 생명 걷어 가면 끝인 것을...... 다만 언제냐가 문제일 뿐,  우리 모두는 그의 앞으로 나아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을. 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주님 앞에 영원한 것, 그곳에 가면 눈물이 없고, 질병 고통 불행이 없고, 죄악과 죽음도 없는 곳, 참된 삶의 근본 목적은 주님 앞에 나아가 영원히 사는 것......é
이렇게 위의 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â믿는 자는 슬퍼하지 말라ä는 목사의 설교가 역설적으로 그곳에 앉아 있는 우리들을 한없이 슬프고 허탈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긴 언제냐가 문제인 것이다. 최 장로는 우리보다 겨우 몇 해 먼저 태어나서 그만큼을 더 살다가 저렇게 굳은 몸이 되어 앞에 누워서 이제 흙 속에 묻히길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의 아들 유준과 동년배임을 감안할 때 그는 우리보다 불과 25여 년을 더 살았고, 저렇게 불귀의 몸이 되어 앞에 누워 있는 것이다. 믿는 자는 죽어서 다시 만난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죽어 봐야 아는 일, 살아 있는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닥치게 될 죽음마저도 끝도 없이 먼 남의 일인 양 다 잊어버리고 발버둥치며 살아가고 있다.
목사의 영결예배가 끝나고 단상에는 고인의 11 살 짜리 손자가 강단에 나와 영결사를 읽고 있다.
서투른 한국어로 할아버지를 영원히 보내는 기막히게 슬픈 메시지를 읽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죽음에 대해서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단지 사람들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한다는 흥분으로 어눌하게 읽고 있는 모습만이 역력했다.
ü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저희를 사랑해 주셨어요...... 할아버지 편안히 가셔요...... 저희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겠어요......é 하는 식의 짧은 영결사가 끝이 났다.
끝으로 고인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참배하고 그 옆에 도열한 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좌석 맨 뒷줄로부터 차례로 앞으로 나오라는 사회자의 말에 따라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자가 누워 있는 관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육신이 땅속으로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지인 들에게 그 모습을 보인다는 이곳 사람들의 희한한 풍습이긴 한데, 나는 이 때마다 별 생각이 다 들곤 했다. 이제 와서 시신을 한 번 더 보면 뭣하고 보지 않으면 뭣한 단 말인가. 그래서 이 때가 되면 아예 시신을 대면하기가 싫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꽁무니를 빼는 조문객들도 상당수 있고 보면,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닌 듯 하였다.
그것도 무슨 재주인지 고인의 얼굴은 생시보다도 더 밝고 환하게 화장을 시켜놓아서 그렇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그 생동감 있어 뵈는 안면 때문에 불쾌감이나 혐오감 같은 걸 갖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나는 그럴 적마다 공연한 두려움이랄까 경외 심으로 시신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앞에 불쑥 나아가 목례를 올리고는 유가족에게 다가가지만, 거기서 조차도 무슨 이유인지 고개를 못 들고 주춤대다가 목례만 서둘러 하고는 얼른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무리 서둘러 나왔다고는 하나 그 틈에서도 상제 격인 고인의 아들 유준과의 일별만은 어떻게 빼먹지 않은 것도 같다.
밖으로 나오니 젊은 사람 두엇이 문 앞에 지켜 서서 나오는 조문객들에게 조그만 전표 하나씩을 건네었다. 식당 식권인 모양이었다. 나는 무심코 받아 주머니에 넣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바로 앞에는 시신 운송을 위하여 검은색 리무진이 대기하고 서 있고, 밖으로 나온 조문객들은 마치 자신들이 천당이나 지옥을 배당 받기 전의 유령들처럼 어정쩡한 모습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눌하게 서 있었다.
그밖에 다른 일들이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빛났으며 정원의 꽃들은 산들거렸다. 도로엔 차들이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었고, 도로경찰들은 문 앞에서 들고 나는 차량 정리를 위해 여념이 없다. 친구 아버지의 죽음을 당해 느끼는 나의 이 비장한 슬픔도 아마 몇 분 후 차를 몰고 길로 나가는 순간 까맣게 잊혀지고 말 것이다.
나는 차를 몰고 장의사를 빠져 나오며 무심히 시계를 보았다. 정오가 가까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조금 전 나오면서 받은 전표가 손에 잡혔다. 나는 그걸 꺼내어 보았다. 이곳 한인타운에서 잘 알려진 뷔페 식당이었다. 점심때가 되기는 했지만 막상 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무거운 장례 분위기에 계속 휩싸여야 한다는데 마음이 걸렸지만, 때가 때인지라 점심식사는 어디 가서 해도 해결해야 했으므로 그리로 그냥 핸들을 돌렸다. 식당이 원체 커놔서 조문객들과 섞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식사는 할 수 있을 거였다.
사실이 그랬다. 뷔페 식당은 넓었고, 조문객은 아직 도착을 안 해서인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막상 구석에 몇 명의 손님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빨리 요기를 때우고 떠날 요량으로 간단하게 음식을 가져다 부지런히 먹고 있을 때, 사람들 몇이 더 식당으로 들어오고 그들 중에 유준도 끼어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잠깐 종업원과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더니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본 즉시 대뜸 내게로 와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몰래 하던 식사를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좀 겸연쩍어 했지만, 그가 ü많이 들게나!é 하며 입을 열었다.
ü자네도 식사 좀 들지, 갑자기 어려운 일 치르느라 수고가 많네.é
ü수곤 뭐......당연히 할 일인 걸...... 헌데 갑자긴 갑자기지.é
아니 어떻게 그렇게 돌연히......? 꽤 건강하신 노익장이신 걸로 알았는데.é
ü건강? 아버지는 건강하셨지... 그런데 아버지는 당하신 거야, 엉뚱한 놈한테-.é
ü......당하시다니?é
ü사실 오늘 영결 예배도 그 목사를 시키지 않는 건데...... 어머니가 뭐 세상에 척 지고 살 필요 있느냐고 우기시는 바람에......é
유준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뇌까렸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분기로 잠시 일그러졌다. 자신의 아버지 죽음을 놓고 목사를 들먹이는 돌연한 그의 태도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목사는 갑자기 왜?é 나는 호기심으로 그의 대꾸를 기다렸다.
ü목사가 그 악마 같은 조카 놈만 데려다 맡기지 않았어도 아버지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야.é
유준은 이렇게 말하고 갈증을 풀려는 듯 앞에 있는 물 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곤 다음 사실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 최 장로는 교회에서도 혈색 왕성하며 뚝심 좋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지금까지도 자신이 투자한 아파트를 그래도 깨끗하게 잘 관리해서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기 앞가리는 제대로 하고 산다는 칭찬을 주위로부터 들으며 살아 왔던 그였다. 이민 올 때 가져 온 돈을 털어 부동산 투자를 한다는 게 조그만 아파트 건물을 하나 사게 되었고, 좋으니 그르니 해도 그 덕에 아직까지 나라에서 주는 웰페어 도움이나 젊은 자식에게(비록 의붓아들이긴 해도) 아쉬운 소리 않고도 노부부가 당당하게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래야 방이 하나 짜리 6개뿐이 없는, 밖에서 보면 단독 주택 같기도 한 조그맣고 조촐한 건물이었다. 그래도 건물의 위치가 그만해서 빈방이 나기가 무섭게 다음 임대가 들어오고는 해서 아직까지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다. 방 6개 중 자신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빼고 방 다섯을 빠짐없이 세로 돌려야만 겨우 수지타산이 맞아떨어진다고 봐야 했다. 아파트를 구입할 때 돈이 모자라 진 은행 빚과 재산세, 보험료 및 관리비, 그리고 각종 공과금 등, 이렇게 빡빡하게 아직도 10여 년은 더 꾸려가야 그 장기 은행 빛을 다 갚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임대자 중에 낼 돈을 미루고 애를 먹이는 자가 있기는 해도, 대개 관리자 격인 최 장로의 뚝심이 세다보니 한 두 번의 통보나 경고를 주면 어김없이 그에게 굽히고 들어와 세를 내던지 이사를 가던지 둘 중 하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떤 관계든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조그만 채권 채무관계도 반드시 상대적인 법이었다. 조금이라도 한 쪽이 말랑하게 보였다가는 평등이나 평화란 존재하지 않고 언제고 한 쪽에 먹히고 만다는 것이 최 장로가 그 동안 어렵게 전쟁까지 경험하고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리였다. 그래서 그는 임대자가 조금만 날짜를 어기거나 약속을 어길 때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경고 장에다 심지어는 강제 퇴출까지 시켜버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그의 아파트에서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혼자 살고 있던 여자 임대자가 갑자기 이사를 나가는 바람에 다시 사람을 들이고자 신문에 광고를 내기 전, 늘 하던 식으로 교회에 가서 공지사항 시간에 교인들께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담임목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이 아파트 근처로 올 테니 만나자는 거였다.
그는 늘 하던 대로 근처에 있는 버거-킹 햄버거 집으로 나갔다. 최 장로가 손님이 찾아 올 때마다 나가는 단골 햄버거 집이었다.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식대부담도 없고, 또 한시간을 앉았건 두 시간을 앉았건 상관하는 사람도 없어서 늘 내 집같이 편하게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날도 음료수를 비롯하여 커다란 햄버거를 시켜놓고는 김 목사에게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다름이 아니고, 장로님의 아파트에 빈방이 나왔다고 해서......é
ü그렇습니다만, 교인 중에 누가 아파트를 찾던가요, 목사님?é
그는 듣던 중 반가워 얼굴을 목사에게 들이밀며 물었다. 그렇게 되면 신문광고를 내지 않아도 되니 적지 않은 광고비를 절약하게 될 것이다.
ü실은 내 조카 뻘 되는 아인데, 이리로 공부를 하러 왔다는데 녀석이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그 부모들이 몹시 걱정을 해요. 그래서 장로님 아파트에 데려다 놓고 녀석 거동도 좀 살필 겸-.é
말을 얼추 듣고 보니 최 장로는 좀 난처해서 허리를 펴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님 조카라면 좀 편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을 듯 싶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땐 할 말도 마음대로 못하겠고, 아무렇게나 마구 대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정색을 하고,
ü아니, 왜 목사님, 다른 곳 마땅한 데가 없던가요?é 하고 물었다.
ü없는 게 아니고, 녀석이 공부한답시고 미국엘 왔는데 도통 뭘 하며 지내는지 알 수가 없대요. 그래서 장로님 눈앞에서 살게 하면, 뭘 하는지 좀 감시가 쉬울 게 아니오? 그래서 저희 부모가 말하기를 내가 추천하는 곳이 아니면 돈을 보내지 않을 테니 아파트 하나를 구해주고 감시를 좀 해 달라는 거요. 그 부모가 돈은 있는 집인데-.é
ü감시라.......é
그는 좀 난처한 기색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조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ü조카 분이 뭐 하시는 가요?é
ü글세, 공부를 한다고 왔다는 데-.é
ü학생인가요?é
ü그런 편이지요, 무슨 영화공부를 한다던가......하여간 아파트 렌트야 낼 만한 집이니까 어떻게 최 장로가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방을 좀-.é
글쎄요, 뭐 좋은 일까지야......é 그는 아파트 비는 낼 만 하다는데 귀가 솔깃해서 그만 승낙을 해 버리고 말았다.
목사님과 헤어진 후 최 장로는 아파트로 돌아와서 4호실의 청소를 시작했다. 독신여성 혼자 쓰던 방이라 별로 더럽거나 수리할 곳이 많지는 않았다. 수도꼭지에 물방울이 좀 떨어지는 것은 고무 부속품을 새로 끼워주면 되었고, 벽면에 났던 못 자국이나 회반죽으로 메워 주면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방에 살던 독신녀 같은 사람만 세입자로 두면 아무런 문제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독신들은 한군데 오래 살지 않고 자주 움직여 이사를 가버리고 마는 데 문제가 있었다.
방황하는 청춘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새로 들어 올 사람도 독신이라곤 하는데 두고 볼 일이었다. 독신도 독신 나름이지 매번 파트너나 바꾸어 데리고 들어와서 자다가곤 하면 도덕적으로 보고 지나치기에도 차라리 참한 부부가 더 나을 거였다.
그렇게 다음 주말이 되어 새로운 입주자 김경하가 나타났다. 처음 인상은 조금 겉멋이 든 보통의 유복한 젊은이처럼 보였다. 아파트를 처음 보러 왔을 때는 검은색 â렉서스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스포티한 차림에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왔었다. 마르고 약간 큰 키에 자세히 보면 입술이 좀 얇았고, 쳐다 볼 때의 눈망울이 좀 안정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불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 오는 날 그는 최 장로와 그의 아내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하고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이삿짐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네가 빌려 네가 끌라는 뜻의 â유홀ä이라는 이삿짐 트럭을 빌려서도 몇 번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혼자 산다는 친구가 웬 짐은 그리도 많은 건지 미처 정돈할 겨를도 없이 거실에다 마구잡이로 부려 놓았다.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더니 영화에 관계된 듯한 짐도 많았다. 촬영기계로 보이는 궤짝은 물론, 필름통 같은 것도 여럿 보였다. 그러더니 결국 짐들은 거실을 다 채우고도 남아 마당에 그득히 싸여 있었다.
젊은이가 온종일 땀을 흘리며 짐을 혼자 나르는 것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저 마당에 남아 있는 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짐으로 저렇게 차도를 막아 놓으면 안에 세워 둔 차들을 밖으로 움직일 수도 없을 것이다. 결국 김 군은 최 장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을 해야 했다.
ü잠깐이라도 좋으니 저 짐들을 제 차고에 옮겨 놓겠습니다.é
예상된 요청이었다. 그러나 그는 퉁명스레,
ü자네 차는 어디에 세우려고?é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당분간 길에다 세우든지......é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안에 세워 둔 차들이 밖으로 나고 들어야 입주자들이 출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아무도 드나드는 차가 없었다.
그는 며칠이 지나도 차고에서 짐들을 치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내에게 와서 가진 넉살을 다 떨며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과자와 쵸코릿 등도 먹으라고 들고 와서 한참동안 너스레를 떨곤 했다. 최 장로는 그런 그의 행동이 마땅치 않았지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가져온 물건들을 되돌려 보낼 수도 없었다. 아내가 말했다.
미스터 김 말이요, 알고 보니 혼자 미국 와서 저렇게 떠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드라구요.é
이유라니...그게 뭔데?é
ü시방 아버지와 살고 있는 에미가 재취라지 뭐유. 친 에미는 일찍 죽고 새로 얻은 새엄마 밑에서 자랐다더만-, 그러니까 저렇게 부모 놔두고 혼자 떠돌지 뭐유.é
글세 그건 그렇구 저 차고 안에 쌓아 둔 물건을 언제 치운다고 합디까?é
내가 뭐 그런 걸 물어 봤나요, 차차 치우겠죠.é
당장 앞마당에 차를 세우니까 길이 막혀서 남들이 불편하니까 그렇지.é
ü난 모르겠네요.é
나 참, 김 목사를 봐서 심하게 뭐라고 말하기도 뭘 하고......é
ü좀 두고 봅시다.é
ü두고 보고 말구지, 그 거실에 쌓아 놓은 짐도 다 치우질 못해 그대로 두고 살던데 뭘. 도대체 젊은이가 웬 짐이 그리도 많은지 원-.é
몇 주간 김 군의 거동을 지켜보자니, 그의 생활이란 게 절도라곤 하나도 없는 생활인 것 같았다. 밤마다 집에는 언제 들어오는 지도 알 수 없었고, 아침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다가 오후가 돼서야 슬슬 거동을 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방엔 낮이고 밤이고 늘 전등불이 켜져 있었고, 화장실엔 수돗물도 잘 잠그질 않는지 질질거려 물 흐르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왔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벌써 데리고 오는 여자들도 한 둘이 아닌 성싶다는 거였다. 그들을 데려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남의 방을 드려다 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뻔한 짓거리를 할거라고 그는 추측했다.
최 장로는 그런 꼴을 곁에 두고 보자니 벌써 신경이 거슬렸다. 하지만 이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남의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는 없는 법이고, 우선 차고에 있는 짐이나 빨리 치워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사정이 거실의 짐조차도 치우질 못하고 사는 그에게 자꾸 불러다 보채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아서 말도 못하고 그저 그 속만 끌어 오를 뿐이다.
김경하가 들어온 이래 최장로는 점점 속이 편치를 않았다. 신경이 그에게 쓰이다 보니 매사가 공교롭게 꼬이고, 더군다나 신경을 쓰다보니 점점 더 그가 호락호락한 상대같이 느껴지질 않아 괜한 강박관념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세를 주고 관리해 왔지만 문제가 그 짐 보따리로부터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리고 녀석의 생활태도가 마음에 썩 내키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상대하기조차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신경을 쓰면 쓸수록 공연히 기분이 옥죄어 들었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싸우자고 그를 마구 상대할 수도 없고, 더구나 목사를 봐서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 녀석과 가끔 대화도 나누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말에 의하면 녀석은 요즘 대단히 풀이 죽어서 다닌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은 그가 친구들과 같이 투자해서 만든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재정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로는 아내의 그 이야기를 물 건너 불 소문처럼 대충 들어 넘겼다.
그런데 다음달 초입이 되어 임대료 납부 일이 지나도 김경하로 부터의 수금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장 독촉통보를 내보내고, 한 달이 지나도 나가지 않을 경우 변호사나 강제퇴거 전문인을 찾아가서 퇴거를 시켜버리면 그만이다. 이럴 경우일수록 빨리 행동으로 옮겨야만 피해가 적다는 걸 그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김 군에게만은 김 목사를 봐서라도 그렇게 야박하게 굴 수가 없었다.
한 달의 미수금은 예치금 받아 놓은 걸로 충당하면 되지만, 그 이상은 변제할 길이 막연했다. 법원에 민사소송을 내 봐야 세월만 흐를 뿐이고, 또 이런 작은 돈이 걸린 소송은 항상 받는 쪽에서 손해를 보게되고 그 소송비용만 날려 버리는 결과가 되기 십상 일반이다.
â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첨부터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이를 어쩐담! 목사에게 벌써부터 내색을 할 수도 없고.ä
최 장로는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런 조그만 아파트 운영이라는 게 뭐 별 수지타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방 하나 얻어 쓰는 것으로 빠듯할 뿐이었다. 임대료 모두 받아서 은행에 융자한 돈 내고, 물 값 전기료, 쓰레기 처분료 내고, 수리 및 유지비 충당하기에도 그리 넉넉지 않았다. 오래 전에 그것도 싼값에 아파트를 구매했기에 가능했지, 지금은 원체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놔 있어 그나마도 어렵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생각다 못해 최 장로는 아내를 내세워 김 군의 속사정을 탐지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녀석의 인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집안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말을 건넸더니 퉁명스레,
ü왜 하기 싫은 일은 하필 나 유? 장본인이 하지 않구선!é 하고 쏴댔다.
제길 헐! 여편네가 그것도 일이라구선......말 좀 들으면 누가 뭐랄까.é
아내는 꼭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좀 어려운 일이 있을 땐 그의 부아를 뒤집었다.   애당초 그들의 사이엔 사랑이 없어서 그런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해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부지간에 깊은 정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는 단지 외롭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같이 살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그가 뒤늦게 후취로 얻은 아내였다. 첫 째 아내와 일찍 사별 후 그럭저럭 혼자 지내다가 혼자보다는 같이 사는 게 나을 거라는 주위의 권고도 있고 해서 친지의 소개로 만난 그녀와 재혼하게 되었다. 단신 혼자이던 최 장로와는 달리 그녀는 다 큰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가 지금의 유준이었다.
젠장 그렇다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는데, 이건 어찌된 게 우선 녀석을 만나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는 한나절까지 죽은 시늉으로 늦잠을 자다가 장로가 일보러 어디를 가는 사이에 빠져나가는지 귀신같이 없어졌다가 남들 다 자는 오밤중에나 슬며시 들어와 잠을 자곤 했다. 장로는 처음 그가 이사를 왔을 당시 한 두 번 코빼기를 본 후엔 다시 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메모 하나를 우선 써서 그의 아파트 문에 붙여 놓기로 하였다. 그는 당장 메모 지를 한 장 꺼내어 몇 자 이렇게 썼다.
  [김 선생,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이 나면 나에게 들러 주시오. -관리인-]
  이렇게 써 들고 그의 아파트로 가려하자 아내가 흘끗 읽어보고 한다는 소리가,
ü아유,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요? 나이 값을 허슈, 아들도 막내나 될까하는 젊은애를 보고 김 선생은 또 뭐 유?é 하고 핀잔을 주었다.
아니, 그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보고 김 군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이거-.é
ü그래도 그렇지 김 선생은 무슨 얼어죽을 선생이유?é
ü아무렴 어때 이 사람아! 그러게 가서 말 좀 하랄 땐 딴 소리구!é
내 원, 젊은애들한테 약점 잡힐 소리나 하구선 쯧쯧......é
  공연히 아내는 이렇게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편치 않은 그를 더욱 부채질했다.
어쨌거나 상관 않겠다고 그대로 갖다 붙여 놓은 쪽지는 다음날 보니 말짱하게 없어졌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녀석은 얼씬도 하질 않았다.
정말 선생이라고 부르니 이쪽을 말랑하게 보는 건가, 그는 홧김에 다시 그의 아파트로 내달아 가서 노크를 쾅쾅 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방안에 아무도 없는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왠지 뭔가 속고 있다는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냉장고로 달려가서 냉수를 꺼내어 벌컥거리며 들이마셨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도 그로부터 일언반구의 연락이 없자, 최 장로는 굳게 작심을 하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그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도망을 가도 설마 이렇게 일찍 이야 나갔을 리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문을 두들겼지만 역시 한 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리용 열쇠를 꺼내 아파트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시오! 안에 누구 있소?ü
소리를 지르고 안을 들여다보니, 거실엔 아직도 이사올 때 쌓아 놓은 짐들이 수북히 쌓여 있고, 보따리들 사이로 난 몸 하나 간신히 들어 갈 통로만이 침실을 향하여 뚫려 있었다. 안에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엌 벽 쪽에 붙어 있는 꼬마 등이 켜져 있고, 텔레비전인지 라디오인지 자그맣게 웅얼거리는 소리도 들려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소리 쳤다.
ü안에 누구 있냐구! 여보시오! é
잠시 후 안에서 ü누구세요!é 하는 인기척 소리가 들리더니, 침대에서 쿵! 하고 마루 딛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침실 방문이 부스스 열리며 윗도리를 벗어붙인 김 군이 얼굴을 내 밀었다.
ü나요! 아파트 관리인인데......é
그가 고개를 디밀고 말을 얼버무리자 김 군이,
ü아-, 곧 나가겠습니다.é하고 대꾸했다.
ü일찍 깨워서 미안하지만, 다름이 아니고 일어나는 대로 내 사무실에서 나 좀 봅시다. 그리로 좀 와 줘요!é
ü네,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é
그 말을 듣고 최 장로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렇게 만날 약속이라도 받아놓고 나니 가슴이 좀 시원해졌다. 그는 자신이 방 겸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곳에 돌아 와서 기다렸다.
얼마 후 김 군이 옷을 입고 사무실로 와서 문에 노크를 했다. 최 장로는 얼른 나가 문을 열고 그를 들였다. 그리고 소파에 앉으라고 손으로 권한 다음 다짜고짜 물었다.
ü기일이 벌써 5일이 지나도 아직 방세를 안 내다니, 무슨 일이오?é
이렇게 묻자 김 군은 머리부터 조아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다.
ü네, 알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하던 일이 원만하게 돌아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되는대로 곧 갚아 드리겠습니다.é
ü글쎄, 하던 일이 돌던 안 돌던 나는 상관할 바 아니고, 나는 방세가 2-3일 안에 안 들어오면 부득이 강제 퇴출을 의뢰하는데, 김 목사의 얼굴도 있고 해서 지금은 참고 있다만-.é
그가 다시 머리를 숙이며,
ü며칠만 참아 주십시오,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é 했다.
밤새 술을 마셨는지 아니면 잠을 설쳐서인지 얼굴은 부석부석했고,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다.
ü사정이 그렇다면 뭐 가타부타 사정 이야기라도 미리 했어야 하는 것 아니오?é
ü네, 잘못했습니다.é 그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만 조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주일이나 지나도 그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일로 해서 최 장로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 갔다. 문제는 이 골칫거리의 해결을 위해서 과연 강제추방 변호사를 찾아야 하느냐, 또는 목사를 찾아가서 상의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변호사를 찾아가자니 비용도 만만찮겠고, 또 김 군이 김 목사의 조카인데 그렇게 까지 하기엔 좀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보다는 일단 김 목사에게 이야기를 한 후에 그런 조치를 취해야 받게 될 비난을 면할 것도 같았다. 까짓 아직 한 달 치의 임대료도 밀리지 안은 걸 가지고 너무 강경하게 대했다간 교회에서 김 목사를 보기에도 너무 한다 싶겠고, 또 소문이 교회에 퍼지면 좋지 않은 일로 융통성이 없는 인색한 사람이라는 구설수에 말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우선 다음 일요일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보기로 마음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그때 가서도 소식이 없다면 김 목사를 찾아가서 상의해 보리라.
그런데 다음 토요일 오후가 되었을 때, 김 군은 머리를 숙이고 장로에게 나타났다. 허우대가 멀쩡하게 차려 입은 그는 최 장로에게 굽실거리며 말하기를,
ü장로님, 번번이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만든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당장 돈이 돌질 않아서 그럽니다. 어떻게 어려우시겠지만 다음달까지만 기다려 주신다면 밀린 임대료와 내달 분까지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다음 달엔 친구에게 빌려준 돈 받을 것이 있거든요. 부탁합니다.é
장로는 난감했다. 하지만 다른 어쩔 방도가 없지 않은가? 한 달쯤이야 정 뭣하면 받아 놓은 예치금이 있으므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허나 그 다음 달부터는 이런 식으로 미루면 그대로 당하는 꼴이 된다. 그는 잠시 생각 끝에,
ü꼭 이야, 다음 달에 갚는다는 것, 만일 안 가져오는 날엔 강제로 퇴출 시키는 건데 김 목사님을 봐서 참는 거라구, 알았지?é
예, 감사합니다.é 하고 그는 물러나면서 장로에게 분홍색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극장 입장권이었다.
ü시간 있으시면 한 번 가 보십시오, 저희가 만든 영화입니다.é
그는 책상 위에 티켓을 놓고 꾸벅 절을 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를 보내 놓고 최 장로는 비록 돈을 받지는 못했어도 처음으로 기분이 썩 나쁘지 만은 않다는 걸 경험했다.
â하긴 돈이 사람을 속이지, 사람이 속이나. 말을 하고 보니 과히 나쁜 녀석은 아닌 걸ä 하고, 혼자 중얼대며 녀석이 놓고 간 극장 표를 보았다. 영화 제목이 <태권 파우어, 할리우드 오다> 라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좀 긴 제목이었다. 괴상한 이름의 극장도 어디에 있는 극장인지 좀체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는 티켓을 책상 위에 던졌다. 아마도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부엌에 있던 아내가 나와서 티켓을 보더니, ü이건 뭐 유?é 하며 집어들었다.
ü 당신이나 가구려!é
극장이라면 좋아하는 아내지만, 잘 알려진 영화라면 몰라도 생판 듣지도 보도 못한 영화를 보러 갈 성싶진 않았다.
그는 다음날 교회에 가서 목사를 만나서도 아무 내색은 하지 않았다. 김 군이 말 한대로 다음 달까지 약속만 지켜준다면 문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예치금으로 한 달치 방세만큼만 더 받으면 되는 거였다.
며칠 후 밤늦게 사무실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번쩍 빛나기에 밖을 내다보니 김 군의 차였다. 그렇게 차를 돌리더니 도로변에 세우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배당된 차고는 그의 짐으로 꽉 차 있으므로 차도 변에 그의 차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엔 웬 여자의 하이힐 또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다시 밖을 보니 김군 옆에 웬 여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그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고, 그들은 곧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늦은 밤 11시를 넘고 있었다. 방세도 못 내는 주제에 애인도 있었나? 뉘 집의 딸인고, 이 늦은 밤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비록 여자는 단발머리에 어려 보이긴 할지라도 제 몸 가지고 제가 마음껏 살아가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는가, 이 자유의 나라에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의 머리는 착잡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도 그들 아파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고요하기는 그 방 뿐 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평온했다. 모두들 출근을 마친 후에 햇살은 벌써 아침이슬을 거의 다 말리고 있고, 새들도 얼추 배들을 채웠는지 지금은 한가히 양지를 찾아 날았으며, 길거리에 자동차 소음도 한결 누그러졌다.
녀석은 아직도 계집과 함께 자고 있나?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모두는 평소와 다를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공연히 자신만이 지나치게 신경을 써가며 전전긍긍 할 뿐이다. 어젯밤 자신이 본 것도 아마 허깨비였는지도 몰랐다. 아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질투심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여자를 데려다가 침대에서 굴리든, 아니면 처녀 도둑질을 하든, 그런 건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밀린 방세를 받아야 하는 것, 그는 공연히 자신이 염려할 일도 아닌 걸 가지고 노심초사하는 자신을 보고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다시 새 달이 되고 몇 날이 더 지났으나 김 군으로부터 이런저런 소식이 없었다. 최 장로는 그의 고민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냥 변호사를 찾아가서 강제 퇴출 수속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김 목사를 찾아가서 먼저 상의를 해 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본인을 만나 다시 자초지종 그의 말을 들어 본 후 결정을 할 것인가.
그는 이런 방법론들을 놓고 너무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 진퇴양난에 빠져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갔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마땅한 해결책이 되질 않을 성싶었다. 강제 퇴출을 하기에는 너무 야박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우며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언제도 한 번 세입자가 월세를 미루고 안 내기에 이곳 법 절차인 3일 안에 납부하던지 나가던지 하라는 통보를 낸 다음, 그래도 반응이 없기에 전문 법무사를 시켜 법원에 퇴거 신청을 넣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상대도 가만있지 않고 법원에 가서 소위 답변을 접수시켰는데, 그게 적반하장이었다.  자신이 월세를 안낸 이유는 아파트가 낡고 변기도 고장이며 수도 파이프조차 낡아서 물이 샌다는 둥, 있는 구실 없는 구실을 다 첨부하여 고쳐 놓으라는 으름장이었다. 그의 저의는 이런 식으로 소위 약자 편을 드는 법원을 혼란시켜 그 동안 월세 없이 공짜 거주를 가능한 길게 살려는 수작인 것이다. 그럴 경우 재판소의 판사는 분명 그런 고장을 다 고친 다음에 다시 법원에 들어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연기를 선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세입자는 그 다음 결정이 날 때까지 돈 안내고 몇 달을 실컷 살다가 꽁무니를 빼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인심 좋은 미국에서는 가난한 세입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하여 이렇게 뻔히 법을 악용해서 사기행각을 벌리고 있음에도 그들을 돕는다고 부추겨 사회가 혼란해지고 나쁜 풍조를 조장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내는 돈도 결국 어떻게 법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니 손해를 보는 건 늘 선량한 중산층 또는 건물주들이다. 그리고 또 재판은 왜 그리도 시일이 오래 걸리는지 신청 해놓고 기다리는 기간만도 2-3 개월은 족히 되기 때문에 서둘러 발 빠르게 준비를 한다해도 그 동안 못 받은 월세와 법원비 등 그 손해를 한 달치 더 받는 예치금으로는 감당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세입자들을 달래보기도 하고 타협도 해 보지만, 한 번 그런 파렴치한 사기 극에 맛들여 본 자들은 재미를 붙여 상습적으로 건물주들을 골탕 먹이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신용조사를 철저히 하면 그런 악질 세입자들을 골라 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매번 꼭 말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김 목사를 찾아보는 문제도 그랬다. 교회 일도 아닌 사사로운 돈 문제를 가지고 만나서 상의해 보았자 그도 자식도 아닌 조카문제를 가지고 어쩌겠는가? 본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본다 하지만, 그도 시원한 대답을 가진 녀석이면 왜 스스로 찾아오질 않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하다가 그는 결론을 짖고 곧 행동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선 본인을 만나보고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목사에게 통고를 한 다음,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하는 수 없이 강제 퇴출을 하는 수 순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최 장로는 격투를 준비하듯 마음을 다잡아먹고 아파트 4호실로 가서 방문을 두드렸다. 두드리고 한 참을 기다려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다시 이번에는 더 크게 문을 두드리고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 인기척이 나질 않는다. 혹시 안에 있으면서 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어 보았다. 아직도 입구서부터 거실 가득히 짐들은 쌓인 체로 정리가 되어 있질 않았고, 방에선 냉기만 가득한 게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는 마루에 발을 두어 번 굴러 인기척을 하고는 문을 도로 끌어 닫고 잠갔다.
â녀석 또 여자와 외박하느라고 안 들어 왔나? 돈이 없다는 녀석이 어떻게 여자를 데리고 다니며 연애를 한담, 꿈쩍하면 돈인데.ä 이렇게 구시렁거리며 사무실로 돌아 왔다.
ü고것 고의적으로 피하는 것 아니유?é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아내가 거들었다.
낸들 아나?é
ü천상 저녁에 들어오길 기다렸다 냉큼 잡아 닦달을 해요.é
ü저녁엔 몇 시에 들어오는지 그걸 알아야지, 하는 수 없이 메모나 다시 그려 붙여 놓는 수밖에......본래 방세를 안내는 녀석들은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일종의 생활습관인 거야. 그런 녀석들이 먹는 것은 제일 좋은 것만 찾아먹고, 또 입고 다니는 것도 기생오라비처럼 하고 다니지. 생활에 제일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녀석들이야.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주거가 아닌가. 생활의 삼대요소 의식주 중에 먹는 게 급해, 아니면 번지르르 입는 게 급해? 만일 춥고 비오는 날 주거지가 없어 봐, 그래서 이슬이라도 이마에 내려봐, 그 꼴이 뭔가. 차라리 며칠 굶는 게 낫지. 비 맞고 밖에서 차마 그 짓을 하겠는가? 그런데도 다른 짓은 다 하면서 주거비를 안 내겠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입고 잠도 다 자면서 남이나 골탕 먹이겠다는 천하 도둑놈 심보인 거야.é
ü글세, 그건 김 군에게나 타이를 때 해야할 말이구......이번엔 또 그저 김 선생, 그런 존댓말을 쓰진 말우. 선생은 무슨 빌어먹을 선생이야, 새파랗게 젊은애를 가지고...é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é
글세, 그렇게 쓰질 말란 말이유! 당신이 그렇게 굽히니까 만만하게 보고 그러는  거 아니유?é
조용해! 뭐 알지도 못하면서-.é
장로는 아내를 이렇게 윽박지르고는 다시 앉아서 메모 쪽지에 몇 자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도 아내의 말처럼 선생이라는 호칭을 내 던지고 Mr. 김이라고 썼다. <Mr. 김, 이 메모를 보는 즉시 연락해 줄 것. 기다리고 있음.-아파트 매니저-> 그는 이렇게 써서 다시 4호실 아파트 문에 가져다 붙여 놓고 오면서 별 생각을 다 하였다. 혹시 아파트가 4호실이라 제수가 없는 건 아닌가. 원래 동양인들은 4자를 꺼린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렇지 않았고, 대신 13자 금요일을 금기로 여긴다. 그 유래는 중세기 종교탄압이 심할 때 교황이 13일 금요일에 자신의 반대파 기사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데 기인하였다. 그러니 명색이 교회 장로인 그도 그렇게 유래하는 미신 따위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처음 지어놓은 대로 써오고 있었다.
메모를 붙인 지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김 군은 사무실에 나타나 그 문을 두드렸다. 최 장로의 관심은 혹시 밀린 임대료를 가지고 왔나하고 그의 손만을 보았으나 아직도 빈손이었다. 그는 그걸 보자 부아가 있는 대로 들끓어서 녀석의 면상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ü어떻게 된 거야! 다음달이라 더니, 소식도 없이 정말 이러기야?é
그가 풀썩 소파에 앉으며 머리를 싸매는 시늉을 했다.
ü어떻게 방세를 가져 왔나?é
장로는 다시 그를 노려보며 다그쳤다.
ü아닙니다. 지금 제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빚쟁이들한테 타고 다니는 차마져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친구 집에 가서 머물고 있습니다.é
ü잘 됐군, 그럼 그리로 짐을 모조리 옮기면 되겠군. 그래 언제 방을 비울 거야?é
그는 계속 고개도 들지 못하는 김 군을 노려보며 이렇게 다그쳤다.
ü그게 아닙니다. 한국엘 들어갔다 올까 합니다. 부모님을 찾아 뵙고 사정을 말씀드리면 어떻게 아파트 값 좀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é
ü그 때가 언제란 말이야?é
ü가능한 빨리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봐 주시는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é
김 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 하기도 하고, 또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가면 어느 부모가 자식 일에 발 벗고 나서 도와주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성경에도 그 예가 있는 것처럼, 자식이 비록 탕자가 되어 돌아와도 외면하지 못하고 반갑게 맞아주어야 하는 심정이 바로 부모심정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하였다. 그래서 목소리를 낮춰서,
ü그래, 한국에는 언제 갈 작정이야?é 하고 물었다.
ü내일이고 곧 떠날까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로 곧 찾아 뵙겠습니다.é
이렇게 또 한 번 그의 말만 믿고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정말 그 한 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며 보낸 한 달이었다. 김 군은 그렇게 사라진 이래 아파트에는 코빼기조차 내밀지 않았다. 아직도 짐은 산처럼 쌓아둔 채로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최 장로는 마침내 목사를 찾아가서 사실을 알리고 상의하기로 마음먹었다. 벌써 3 달째 아무런 세도 받지 못하고 젊은 김 군의 거짓말에 속아 이렇게 저렇게 시간만 허비하였다.
교회 집회가 끝나고 성도들의 교제시간이라는 식사회동 시간도 다 끝나 교인들이 거의 빠져나간 다음, 최 장로는 목사를 만나 그간의 김 군과의 사정을 소상하게 말했다. 그 사실을 듣자 김 목사는 오히려 얼굴을 확 붉히면서 큰 소리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ü그걸 왜 이제까지 말 해 주지 않았소? 그래서 최 장로에게 미리 부탁을 하고 맡긴 것 아니오? 그런 못 돼 먹은 놈! 그래서 감시 좀 할 겸 그리로 이살 가게 했더니 원! é
최 장로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막말로 좋은 일하고 뺨 맞는 격이었다. 그렇지만 목사에게 면전에서 막 받아 대들 수도 없어서 마루만 쳐다보고 얼굴을 붉히고 앉아 있었다. 목사가 화가 나서 계속 고함을 질렀다.
ü녀석이 무슨 영화를 만들었겠어! 동아리 패들과 만나 비디오나 가지고 장난이나 치고 다니겠지. 다 거짓말이에요. 서울 아우에게서 연락이 오는데 돈은 아무리 보내줘도 그 모양이라는 군. 저희 에미가 죽은 후 애비 속을 무던히도 썩이는 모양이야. 에미 없는 자식이라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원!é
목사는 이제야 속내를 다 털어놓기로 작정을 했는지 서슴없이 말을 가리지 않고 토해 놓았다. 최 장로는 원체 큰 소리로 떠드는 목사의 서슬에 눌려 오히려 할 말도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김 군이 여자들과 밤늦게 돌아다니고 한다는 말 따위는 입밖에도 내지 못하고 대책 없이 목사 앞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랬는데 그 다음날 김경하가 어디서 왔는지 아파트 사무실로 달려 와 거칠게 문을 흔들었다. 내다보니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이 한 눈에 보아도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그는 최 장로의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대뜸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이렇게 외쳤다.
왜 내 문제를 가지고 큰아버지에게 가서 말하고 그러는 거요? 그까짓 돈 몇 푼 떼먹지 않는다고 그랬잖아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é
이렇게 소리치고 대들며 그는 최 장로에게 폭력이라도 쓸 양으로 노려보았다. 장로는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혼비백산해서 이렇게 대꾸했다.
ü자네, 젊은 사람이...... 김 목사를 봐서라도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니, 자네 어머니-, 죽은 어머니가 이렇게 무례하게 가르쳤냐구?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é
이때 김경하는 최 장로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놓더니,
이 늙은이야, 죽고 싶어? 왜 이젠 또 우리 죽은 엄마를 쳐들고 그래? 큰아버지에게 고자질 한 것만도 울화통 터지는데 우리 죽은 엄마는 왜 쳐들어?é
최 장로는 그의 억센 손아귀에 매달려 버둥거렸으나 속수무책이었고, 그 때 그 주위에조차 말려 줄 아무도 없었다. 같이 사는 아내마저 이웃에서 세탁 업을 하는 한국사람에게 가고 없었다. 최 장로는 그의 팔에 매달려 이렇게 악을 썼다.
ü네 이이이놈, 김 목사를 봐서 이제까지 내 쫓지 않고 봐 줬더니, 이제 와서 배은 망덕한 놈! 당장 나가라, 이-이놈! 짐 보따리 당장 치우지 못하면 다 쓸어버릴 테다, 이- 노옴!é
나가는 건 내 맘이야, 이 까진 썩은 아파트! 해 볼 테면 맘대로 해! 늙은이야!é
ü네가 김 목사를 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어? 자네 죽은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쳤냐?é
ü이 늙은이가 죽구 싶어? 왜 죽은 우리 엄마를 또 쳐들고 그래? 내가 돈 갚고 내 짐 찾아 갈 때까지 내 물건 건드리면 세상 끝인 줄 알아, 이 늙은이야! 명색이 교회 장로인 주제에 돈 몇 푼 때문에 떠들고 다니며 이제 죽은 엄마까지 들먹여?é
네, 이노옴! 너 어디다 공갈 치냐? 이 노옴!é
그는 김경하의 팔에 매달려 고래고래 악을 써 댔지만 아무도 와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후 김 군은 흔들던 그의 멱살을 놓고 유유하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가고 최 장로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늙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치는 힘도 힘이려니와 분기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체 저 놈을 어찌해야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난감하기만 했다. 한 참 후 돌아온 아내에게조차 기가 꽉 막혀 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잠도 한 숨 못 들었다. 3달째 임대료를 못 받은 건 고사하고, 언제 나가 줄지도 모르는 녀석에게 멱살까지 잡히는 봉변을 당한 거였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새파란 젊은애에게 모욕까지 받은 생각을 하면 잠은커녕 치가 다 부들부들 떨려왔다. 평생 처음 당해보는 모욕이었다. 그는 아내조차도 귀찮고 아무 소용없다 생각되어 서재에서 쪼그리고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밤을 지새웠다. 놈을 몰아 내고 저 짐을 다 치울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 놈이 언제 또 나타나 행패를 부리고 자신을 모욕하고 덤벼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최 장로는 이제 녀석이라는 존재가 무섭기까지 한 판국이었다. 이러다가는 아파트 운영 10여 년만에 패가 망신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한눈도 붙이지 못한 채 새벽이 되어 화장실에 갔다. 잠을 통 못 자서인지 사방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간신히 변기로 가서 변을 보는데 갑자기 설사 비슷한 기분의 멀건 액체가 마구 쏟아진다고 느껴졌다. 엉덩이를 들고 변기를 들여다보니 시커먼 혈 변이 변기에 가득했다. 그래서 이게 뭔가 하고 벌떡 일어서려는데, 그만 아찔하고 현기증과도 같은 기분에 머리가 빙글 돌더니, 곧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내출혈로 인한 하혈이었다.
갑자기 쿵 소리를 듣고 이상해서 달려나온 그의 아내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대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아들에게 연락을 했고, 유준이 911 긴급 구조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최 장로는 그렇게 구조 팀에 의하여 병원으로 끌려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의사 말에 의하면 과도한 신경성 내분비 출혈에 의한 사망이라 하였다.
유준은 계속했다.
모든 책임은 그 녀석을 아버님께 데리고 온 김 목사에게 있고, 그래서 우리는 입관예배조차 다른 이를 세우자고 했었지. 그러나 어머님께서 다 끝난 마당에 뭐 하러 척 지며 살 것이 있냐 하며 그냥 김 목사를 세우자고 우기시는 바람에 그냥 따르기로 했었지.é

그는 말을 마치고 물 컵을 들어 입술을 추겼다. 나는 유준의 말을 듣고 아무런 할 말을 잃었고, 그렇게 건강을 자랑하던 분이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운명을 달리 했다는 말이 액면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을 뿐이었다.
유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연히 어려서 읽은 무협지 삼국지 일화가 생각났다.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기상천외로 많이 벌어지는 이야기인 만치, 그럴 적마다 중국인들의 떠벌임은 대단하구나, 그렇게 치부하며 대충 읽었었다. 그 중 나이 40이 채 못된 주유의 사망 일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오나라 대도독 주유는 총력을 기울여 유비의 형주를 취할 양으로 몇 날과 밤을 새워가며 모의한 끝에 야밤 도강을 결정하고 시도해 오니, 제갈공명은 이미 그의 계락을 다 알아채고 부하 장수들을 시켜 완벽하게 대비케 한 후에 자신은 뻔히 보이는 누각에 앉아 한가로이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군의 대도독 주유의 약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결국 작전에 실패하고 참패한 주유는 그걸 보자 탄식하며 이렇게 외쳤다는 것이다.  â신이여 당신은 왜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하고 또 제갈양을 나게 하였습니까!ä 그리고는 분에 못 이겨 이전에 다친 금창이 도져 요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준의 주장대로 최 장로의 사인이 한낮 세입자의 무례함 때문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건강하고 무적이던 사람도 주위에서 너무 쉽게  천적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바로 저승사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한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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