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게더

2003.02.09 08:06

이성열 조회 수:687 추천:34

나는 오늘 이 검사가 끝나는 대로 그를 찾아 가 따져 볼 심산이었다. 그는 관공서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니까 5시 까지는 사무실에 앉아 있을 것이다. 만일 오늘 5시까지 가서 그를 만나지 못하면 다른날 근무시간에 그를 다시 찾아 와야 하고, 그렇게 될 경우 또 하루의 공사장 일을 빼먹게 된다. 그러면 나는 생계로 받아야 할 하루의 일당을 또 까먹게 된다.
도대체 이번 징집에서 빼준다고 나한테 돈까지 받아 꿀꺽할 때는 언제고 신년 벽두부터 신체검사를 받으라고 통보를 내면 어쩌란 말인가? 내가 오늘 이렇게 일을 못 가고 받지 못 할 일당 손해는 그렇다 치자. 저 번에 뼈 빠지게 일해 모은 돈 두 달치 임금을 몽땅 가져다 바치지 않았냐 말이다.
3대 독자 덕에 내가 성장하자 마자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다 내 어깨로 떠 맡고도, 겨우 늙은 어머니 부양하라는, 법으로 정한 징집 면제조차 이렇게 원칙대로 되지 않고, 빽을 쓰고 돈을 가져다 받치고도 이 모양으로 징집 통보가 매번 나와서 겁을 주다니-. 하긴 그 빽이라는 게 시원치 않으니 이 모양이다만......해 마다 봄만 되면 신검통지요, 또 심지어는 징집 영장까지도 툭하면 내 보내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없는 돈을 마련해서 병무청 징집 담당자를 찾아 가서 막아야 하고, 이런 비리가 오늘 내일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걸 알았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군대를 갔다오고 말았을 일이었다.
국가에선 그래도 우리같은 처지의 가난한 â부선망 독자ä들의 사정을 감안해서 â의가사 면제ä라는 제도를 만든 모양인데, 문제는 이 제도를 악용해서 돈을 착취하는 일선 공무원들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그 법이라는 것이 당장 면제증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계속 연기로 끌어가다 나이 30이 넘어야 면제증을 준다니, 어떻게 한 두해도 아니고 10년을 진흑탕 속에서 살아 가야 한단 말인가. 한 해에도 몇 차레씩 내 보내는 징집 영장 통보 때문에 미쳐 군에 가야 할 준비가 안된 나는 발등에 붙은 급한 불을 끄러 임시 방편으로 돈을 들고 병역 담당을 만나러 뛰는 수 뿐 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이 검사가 끝나는 대로 관청으로 뛰어 들어가 담당 공무원의 멱살을 잡고 늘어 지던지, 갖다 준 돈을 도로 내놓던지 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당장 검사 후 영장이 내 달을 것이 불을 본 듯 뻔 한 노릇이었다.
고향 군청 소재지인 수원 무슨 학교인가에 소집된 우리 젊은 애들은 모두 팬티만 걸친채 벌거 벗은 몸둥어리를 양 팔로 싸매고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3월이긴 해도 꽃샘 추위라서인지 날씨는 매섭도록 추웠지만, 당국은 그런 사정따윈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넓은 교실 안 가운데에 조그만 조개탄 난로 하나가 겨우 타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들의 몸은 추워서 잡아 놓은 닭살처럼 파랗게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 얼어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젊음때문인지 아무도 쓰러져 나자빠지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도대체 이건 너무 하는 게 아닌가. 우린 아직 군인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â하라면 했지ä 하는 식의 발상은 너무 독단이 아닌가? 이러다가 추워서 병이 나는 애들도 없지 않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우리들은 넓은 교실에서 늘어진 뱀처럼 한 줄로 죽 늘어서서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기만을 고대하며 기다렸다. 추우면 추울수록 빨리 검사를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는 공통 목표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말도 없이 자신의 차레가 빨리 돌아 오기만을 떨면서 고대했다. 왠 검사는 그렇게 많고 또 검사관들은 그렇게도 줄줄이 돌아 가며 앉아 있는지. 우리는 10여 군데도 넘는 그들을 다 지나쳐 통과 해야만 갑종합격ä 또는 â을종합격ä 하는 식을 판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애들은 닭공장에서 가공을 위해 돌아 가는 비틀린 모가지의 털뽑힌 닭처럼 잔뜩 목들을 움추린 채 팔장을 끼고 서서 떨면서 차레를 기다렸다.
첫 번째 관문은 적성검사인 모양이었다. 자신의 특기나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따라 군에 나가 맡게 될 분과를 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검사는 별 착오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진행 속도라면 오후 4시 전에 모든 검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내 차레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바로 내 앞에 서 있던 애가 자신의 특기를 말했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지체가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특기가 가수이고 따라서 징집 후에 연예분과로 배속돼기를 원한다는 거였다. 그러자 이제까지 근 두어 시간을 지루하게 이끌어 가던 담당관의 눈에 불빛처럼 광채가 난다 싶더니 그가 등을 의자에 길게 기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 특기가 가수라고? 그럼 잘 됐군! 그럼 거기 서서 노래 한 곡조를 볼러 봐! 내가 들어 보고 잘 한다고 생각해야 연예분과로 갈 수 있으니까-.é
녀석은 담당관의 요청을 듣고 조금 쭈볏쭈볏 하더니, 군에 가서 남들은 피땀 흘려 노동칠 때 시절 좋은 매미처럼 가수로 편하게 지내려면 이 과정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 몸을 굽히면서 기타를 퉁기듯이 아랫도리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러더니 서양노래 한 곡조를 목을 빼고 이렇게 뽑아대기 시작했다.
너와 나 상상해 봐-/ 낮과 밤, 너만을 생각하는 걸/ 내가 사랑하는 여자만을 생각하고/ 그녀를 꼭 껴 안고/ 그러면 함께 행복하고-/ 해피 투게 더- é
곡목은 당시 유행하던 터를스의 해피 투게더ä 였다. 노래가 끝나자 교실안에선 지루하게 서서 검사를 받던 애들로부터 우뢰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검사에 열중하던 검사관들 마져 잠시 일손을 놓고 녀석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노래가 암시하듯 녀석이야 말로 정말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놈이아닐 수 없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 만면에 웃음들을 띄우고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엔 그 바로 뒤에 서 있던 나도 신이 나서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팬티만 입고 흔들어 대는 녀석의 엉덩이 생각만 해도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노래부분의 â해피 투게더ä 의 마지막 â더-ä를 녀석이 길게 뽑으면서 감은 눈과 약간 벌린 입 그리고 달달 떨고 있을 목젖과 한 쪽 발꿈치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야말로 정말 싱싱한 매력의 소유자이고 우리 애들의 우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젊은 애들 중 그 영어노래를 녀석처럼 잘 불러 보고 싶지 않은 애들은 한 명도 없었을 테니까-. 일시에 그 노래로 교실내는 활기들이 솟구쳤다.
그런데 녀석의 노래는 단 한 곡으로 끝나질 않았다. 왜냐면 그 후부터 검사관들마다 녀석의 차레가 되기만 하면 하던 일들을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자네, 진짜 연예분과로 가려면 내 앞에서 노래를 잘 해야만 갈 수 있는거야! 어서 다시 한번 불러 봐!é 하며 늑장을 부리는 거였다.
그러면 녀석은 번번히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면구스러운지 벗은 몸을 꼬며 생각하는 듯 시간을 끌었지만, 별 다른 레퍼토리가 없는지 마지 못한 척 같은 노래만을 반복하곤 하는 거였다.
나와 너, 너와 나/ 운명이 어찌되던/ 오직 하나 나를 위해선 네가 있고/ 너는 나를 위해주니/ 그러므로 우린 함께 행복해/ 해피투게 더---/ 해피 투게 더---
-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é
그렇게 해서 자연히 검사진행은 점점 지연이 돼 가고 있었다. 교실을 한 바뀌 돌며 새로운 검사관 앞에 녀석이 설 때마다, 그들은 허리를 펴고 녀석에게 노래를 하라고 강요했다. 시간이 갈수록 녀석의 바로 뒤에 따라가던 나에겐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오후인데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오늘내 5시 안으로 병무청을 들러 담당 공무원을 만나야 할텐데, 검사 진행은 계속 녀석의 노래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다.
처음 들을 때는 그 제목처럼 함께 행복했던 그 노래가 바로 뒤에 서 있는 우리들을 점점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벌써 녀석은 똑 같은 노래를 우리 앞에서 일곱차레나 부르고 있었다. 여전히 홀딱 벗어 닭살이 된 채로, 기타를 퉁기는 흉내까지 내가며 그 다리와 엉덩이를 흔들며서, 노래는 반복되고 있었다..
상상해 봐, 너와 나/ 나는 그래, 낮과 밤을 당신만을/ 생각하는 걸 어쩌구/ 우린 함께 행복해-/ 해피 투게 더---/ 해피 투게 더---
-바-바-바-바-/ -바-바-바-바-/ -바-바-바-바-é
뒤에 서 있던 나는 참담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진행 속도로는 제 시간내에 검사를 다 마치게 될지도 의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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