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빗 하나, 버선 한 짝

2007.02.12 07:31

성영라 조회 수:989 추천:119

  젖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진 낡은 참빗은 미처 붙잡을 틈도 없이 타일 바닥 위에서 두 동강이가 났다. 빛 바랜 몸뚱이에 사이사이 빗살마저 떨어져나가 볼품없었던 것이 반쪽의 신세가 되어 온기하나 없는 딱딱한 바닥 위에 드러누워 있다. 석양이 질 때의 불타는 하늘빛처럼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던 단풍잎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찬바람 부는 길바닥 위에 그들의 몸을 누이듯이 그렇게.

  종이에 잘 싸여져 십 여년을 고이 잠들어있던 할머니의 빗. 다른 유품들과 함께 태워졌으리라 여겨 내심 아쉬워했건만 작년 겨울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의 서랍에서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탄성을 내지르는 나를 바라보시는 부모님의 의아한 눈길을 뒤로한 채, "제가 잘 보관할게요."라며 냉큼 집어 들고 와서는 지금껏 아침마다 할머니에 이어 손녀에게까지 충성을 다하는 그 물건을 얼마나 이뻐하며 사용해왔던가. 요즘의 플라스틱 빗들에 비해 대나무로 만든 자연미와 낡고 오래된 것이 주는 다정함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하신 할머니를 좀 더 친밀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살아 생전 늘 이 참빗으로 아침마다 숱 많은 백발을 정갈하게 빗어 내리곤 했다. 가끔은 외출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어보면 할머니는 머리카락들을 죄다 앞으로 쏟은 채 정성껏 빗질을 하고 계셨다. 바깥출입도 못하면서 기름까지 발라가며 웬 머리손질 이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난 그녀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그 참빗으로 머리를 빗을 때 생겨나는 머리칼과 빗살의 속살거림이 듣기 좋아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곤 했다. 어떤 향을 가졌었는지 기억도 나지않는 그 머릿기름 때문이었을까? 아님 오랜 세월동안 할머니의 손때가 배어서인가. 반들반들 윤기마저 돌던 밤 껍질 빛깔을 띄던 그 물건이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었다.

  할머니는 꽤 쓸만한 자개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을 보따리 보따리 만들어 벽 한쪽에 쌓아두고 사용하셨다. 왠지 퀴퀴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오래된 그녀의 물건들을 보기도 싫어했건만 유독 그 참빗만은 맘에 들었었다. 외국에서 지내던 여러 해 동안 할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유일한 유품이라 여겼던 그녀의 고운 옥빛 버선을 꺼내 볼적마다 낡은 참빗을 떠올리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 겨울 어느날 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던 논바닥 위에 넘어지면서 무릎을 다치셨다. 그후로 여러 가지 치료를 했지만 효험이 없어 여든 둘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노년의 20여년 세월동안 앉고 눕는 것 외에는 엉덩이를 끌고 이 방 저 방 다니는 것이 가장 큰 활동인 채로 사셨다. 다섯 살 되던 해 교육자셨던 아버지가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할머니와의 한 지붕 생활은 짧은 이별을 맞았다. 아홉 살 되던 해 다시 합쳐 먼 길 가시던 그 날까지 고운 정 미운 정 두루두루 쌓아가며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본래 여장부 기질에 깐깐함이 합쳐졌던 성격은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후로는 수그러들긴 커녕 악다구니가 합쳐져 더욱 혈기왕성한 듯이 보였다. 시어머니 병수발에 좋은 시절 다 보낸 어머니의 하루하루는 몹시 고단하였을 테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야 했던 일상사가 힘겹기는 어린 동생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린시절 할머니 등에 한번 업혀본 기억도 없이 괴팍한 노인네로만 내 눈에 비쳤던 그녀와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가끔은 햇볕이 잘 드는 마루 한 켠에 앉아 하염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노인네다운 어수룩함과 측은함이 배어나와 한발 다가서고 싶기도 했다.

  날로 풍만해져 가는 젖가슴, 초롱한 눈빛, 그리고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안경 없이 책을 줄줄 읽어내려가는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영영 우리가족을 몸종으로 부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가을이 끝나 갈 무렵부터 할머니가 일체 거동을 못하고 말문이 막힌 채 누워만 계셨다. 겨우 물과 깨죽만 삼키는 앙상해져가는 몸에 기저귀를 채우고 욕창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자세를 바꿔드려야 했던 6개월 남짓. 젊은 시절엔 전쟁과 가난으로 고난의 삶을 살았고 나이 들어선 부담스러운 병든 육체와 어찌 할 수 없는 외로움과 싸웠을 늙은 여인의 깊은 슬픔을 보았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는 살가운 말 한마디, 따스한 웃음조차 인색했던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아름다움이 다 빠져버린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는 나의 손이 아픔으로 저렸었다. 어느 날인가 간병인도 오지않고 텅 빈 집에서 혼자 병상을 지키고 있던 그 날 잠시 방을 비운 사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변을 누셨다. 마음 속에 쌓인 한도, 몸 속의 찌꺼기도 다 비우고 가시려는 듯 며칠동안 참으셨던 분비물을 쏟아내셨다. 방바닥 여기저기 묻어있는 자국들을 비눗물로 씻어내고 닦아내는 동안 할머니는 우셨고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괜찮아요"를 되풀이했었다.

  할머니의 손짓을 좇아 찾아낸 옥색버선 한 짝에서 그녀의 쌈짓돈을 찾아냈고 그것은 이생에서 남기신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며칠 후 할머니는 온 세상이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고 있던 한밤에 조용하고 부드럽게 죽음을 맞으셨다. 가죽만 남은 여윈 두 손으로 나의 손을 꼬옥 잡으며 애처로이 미소짓던 그 얼굴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건만.

  이제 할머니는 생전에 그리도 가고싶어 하셨던 고향의 과수원 한 자락에 몸을 누이고 천지에 가득한 달콤한 사과향기 속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맘껏 쬐이시리라. 우리가 함께 사랑했던 낡은 참빗도 추억속에 묻힐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찬란한 한 때를 누리고 다시 시들어간다. 한번 지나간 그 순간은 되돌릴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 우리네 인생. 커튼 콜을 받으며 다시금 생의 무대 위로 나올 순 없을지라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삶을 꾸리기 위해 좁은 속이지만 조금만 더 넉넉한 마음으로 나의 사람들을, 이 세상을 보듬으며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5 불치병 성영라 2013.10.30 369
24 뒷마당이 수상하다 성영라 2014.04.29 420
23 팔월의 어느 날 성영라 2013.08.23 440
22 안부를 묻다 성영라 2013.04.14 633
21 초승달 성영라 2011.12.01 660
20 역전(逆轉)에 산다 성영라 2007.03.04 767
19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영라 2007.04.25 795
18 바람을 생각하다 성영라 2007.03.03 800
17 사랑하려면 그들처럼 성영라 2007.05.11 858
16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성영라 2011.10.01 901
15 아버지의 편지 성영라 2007.06.05 939
14 우리는 지금 아이다호로 간다 (1) 성영라 2007.02.10 953
13 마중물 성영라 2007.02.12 964
» 참빗 하나, 버선 한 짝 성영라 2007.02.12 989
11 호박넝쿨 흐르다 성영라 2011.10.01 1055
10 그늘 한 칸 성영라 2007.08.07 1085
9 어느 여름밤의 단상 성영라 2007.06.12 1116
8 은행을 줍다 성영라 2008.01.21 1168
7 카이로의 밤 성영라 2008.03.13 1283
6 대추에게 말걸기 성영라 2009.11.03 1310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60,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