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밤의 단상

2007.06.12 08:40

성영라 조회 수:1116 추천:124

    생명의 몸짓으로 분주하던 모든 것들이 잠잠해진 밤. 미처 잠들지 못한 나의 의식을 추스려 발코니로 나간다. 맨발에 와닿는 감촉이 적당히 기분 좋은 여름밤이다.

    먼 산에서 들려오던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그쳤고 거기에 장단 맞추던 동네 개들이 짖어대던 소리도 끊겼다.  사방이 고요한데 유독 빛나는 것들은 별과 달이다.  잠들지 않은 자에게 더없이 좋은 벗,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손톱달(초승달)과 개밥바라기별(금성)이 마주보고 있는 밤하늘은 아니지만 깨어있어 놓치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 감사하다.

    보름이 가까운가 보다. 둥글고 환한 달이 떴다. 그 빛에 질세라 별들도 충실하게 어둠을 밝힌다. 가로등이 없는 동네라 저들의 존재가 더욱 도드라진다.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저 수많은 이름 모를 별들.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외로우나 슬프나 스스로 빛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것들을 ‘잔별’ 대신 ‘싸라기별’이라 불러준다. 매우 귀한 물건을 ‘금싸라기’에 빗대는 것처럼, ‘자잘하지만 매우 귀한 것’을 뜻한다는 싸라기. ‘싸라기별, 싸락별…’ 속으로 불러보면 너무나 정다운 이름이다. 꼭 어울리는 이름이지 싶다. 이 땅에도 싸라기별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박하향 같은 것이 난다. 우리 집 담벼락에 바짝 붙어 사는 뒷집 소나무 냄새다. 쌉쌀한 듯 향긋한 그 향에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 여러 번 고민을 했다. 결론은 박하향이다. 여름밤에 공기 중에 퍼지는 소나무 향을 맡고 있으면 그냥 박하향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여름밤에 자면서 쑥쑥 자란다는데 소나무도 그런건가? 모두가 쉬고 있는 이 밤에도 소나무는 자라기를 멈추지 않고 성장의 흔적을 향으로 피워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유독 여름밤이면 향이 진해지는 걸로 봐서 그렇게 짐작해 보는 거다. 팔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에 가지들이 손을 내밀고 있다. 내게 뭔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팔을 벌리고 나무처럼 서본다. 낮 동안 서먹하다가 지금은 왠지 아주 친해진 느낌이다.
  
    고개를 살짝 틀어 윗집을 쳐다보니 뒷마당으로 난 창에 불빛이 환하다. 캐리 할머니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불을 켜 놓은 채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십 수 년 전 남편이 먼저 하늘로 이사간  후 혼자 살고 있는 그녀. 두 집 건너 사는 70대 중반의 아들 내외가 매일 오가며 돌봐 드리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다. 가능한 한 스스로 이것 저것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았어도 여전히 해맑은 얼굴과 미소, 그리고 명랑한 음성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닥 우울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칠순이신 나의 시어머님을 두고 ‘아직은 병아리’ 라고 말하며 깔깔거리곤 하는 그녀. 그 웃음소리가  불빛을 타고  흘러다니는 것 같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한번 달아난 잠은 꼭꼭 숨어버렸고 가슴속에는 이상한 희열감마저 샘솟는다. 나는 지금 어둠 속에서 점점 어둠이 되어가는 것인가. 어수선하던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모든 것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레몬나무, 복숭아나무는 위용당당하고 장미의 검붉은 향에도 민감해진다. 달짝지근한 여름밤 바람에 살포시 기우는 풀들의 소리에도 귀를 바짝 세운다. 내 눈에 내 귀에 내 가슴에 와닿는 모든 것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품고 싶다.

    문득 예전에 자주 읊곤 했던 헤르만 헤세의 ‘안개 속에서’라는 시가 생각난다. 안개 속에서는 나무도 돌도 사람도 저마다 외롭고 서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모두가 혼자라고, 어둠은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가만히 떼어놓는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혼자인 듯 또 혼자가 아니다. 따로이면서도 또 함께인 이 여름밤의 은밀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도 이 순간만은 잠시 머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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