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한 끼의 밥상

2007.11.06 02:23

성영라 조회 수:1363 추천:186

  먹는다는 것은 참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또다른 증거다.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받는 밥상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굳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서로의 생각과 시간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는 영혼을 나누는 일이라고 했다지.

  올 여름에 빨강머리의 미국인 친구 카산드라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면허를 갓 딴 열 여섯살짜리 소녀가 운전하던 차에 받쳐서 허리와 엉덩이뼈를 다친 것이다. 두 달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식사를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였다. 남편 아트루가 직장에 가면 그녀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은 그가 해결한다고 해도 점심은 어떡하나. 친구 여럿이서 당번을 짜서 나르기로 했다.

  교회에서 몇 번 눈인사만 했을 뿐,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 없었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케이와 내가 며칠 후에 점심을 가지고 갈 것인데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한국음식을 좋아하고 김치도 먹는다는 것이다.

  “그럼, 김치볶음밥도 먹나요?”
  “네. 그런데 나랑 같이 밥 먹을 수 있나요? 그냥 주고만 가지 말고...”
  “물론이죠.”
  전화를 끊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당신, 외로웠구나......

  목요일. 휠체어에 앉아서 우리를 맞이한 카산드라는 자신의 친구라며 검은 고양이와 빨간 금붕어 한 마리를 소개시켜 주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대낮인데도 침침한 거실과 방 양쪽을 오가며, 고양이와 뽀그르르 거품을 뱉어내는 물고기에게 말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유케이가 카산드라와 말동무를 했다. 그 사이 나는 얼른 6인용 전기밥솥에 지어 온 밥과 넉넉히 잰 갈비, 그리고 신김치를 잘게 다져 양념한 것들을 꺼내놓고 요리를 했다. 김치볶음밥에 계란부침을 올리고 갈비를 구워 한상 차려 놓고 몇 년 사귄 친구처럼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가며 점심을 먹었다. 정겨운 밥상과 사람의 온기가 그녀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한 것일까.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 지난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내내, 그녀와 여동생은 엄마로부터 “나는 너희들을 한번도 원한 적이 없어. 낳고 싶지 않았어” 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엄마의 사랑 따위는 받아 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엄마와는 서로가 없는 듯 여기며 살고있다 하니 이런 슬픔이 또 있을까. 고통스러웠을 시간을 잘 견디며 살아 온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말 대신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그녀 속에 쓴뿌리로 자리잡고 있는 엄마에 대한 미운 기억이 옅어지기를 바랐다. 손찌검을 자주하던 전 남편과의 두려웠던 기억도 잊고, 한 직장에서 만나 재혼한 아트루와 오래오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기를 기도했다.  

  그날 우리는 밥 한 끼 같이 먹으면서 몇 년 동안 풀어놓지 못한 이야기와 정을 나누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데도 유난히 내성적이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를 어려워하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먼저 우리에게  발보아 공원에서 종종 만나 걷기도 하고 밥도 먹자고 말해 까르르 웃음이 피어올랐다. 넉넉히 준비해 간 음식으로 부부의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아파트를 나서는데 가슴에 날아와 안기는 한마디.

  “나, 이렇게 따뜻한 식사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고마워요, 정말......”

   오늘같이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일하러 가기도 싫은 날에는,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를 돌돌 말고 누워있고 싶다.

  “갈치구이랑 김치찌개 차려놨다. 퍼뜩 일어나 밥 묵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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