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는 뜨고 싶다

2007.11.29 14:05

성영라 조회 수:1330 추천:170

  며칠 전, 한국어방송을 시청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일상에서의 상식이나 지식 등을 모아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스펀지’ 라는 교양 오락프로그램 인데, 그날의 첫 번째 명제는 ‘참외는 물에 뜨는 것만 먹을 수 있다’ 였다.

  참외는 밭에서 수확하자마자 물에 넣어 위로 뜨는 것만 판매한다고 한다. 물에 뜨는 참외는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해 맛있는 반면 가라앉는 것들은 씨가 곯아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마켓에서 사먹는 참외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합격한 것들이기 때문에 단맛이 좀 덜할 수 있어도 곯은 것은 없었나 보다.

  실험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순서. 비닐하우스에서 금방 딴 참외 한 광주리를 물에 쏟아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네댓 개의 참외가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가라앉은 참외 하나를 실험자가 맛을 본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도로 뱉어내고 만다. 시큼한 알코올 냄새와 맛이 난다며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먹으면 탈 나요” 하고 옆에 있던 참외밭 주인이 한 마디 거든다.

  클로즈업 된 화면 속에서 참외들은 탐스러운 노란 빛깔에 모양도 반듯하니 모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속으로 곯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만큼. 그래도 참외는 애초에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을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지만 어디 사람은 그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외모상의 뚜렷한 차이점을 분별할 수는 있어도, 참외처럼 ‘될 사람과 안 될 사람’ 으로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겪어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요, 그 사람의 내면일 테니.

  실험에서 탈락한 참외들은 상품가치가 없으므로 여지없이 버려지지만 사람의 경우는 어디 그렇던가. 스스로를 수양하고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차이가 나고, 죽는 순간까지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게 사람이다. 쉽게 포기되고 버려지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될 터이니 자신이나  남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몇 해 전부터 불었던 웰빙(well-being) 바람이 해가 바뀌고 또 바뀌려고 하는데도 식을 줄을 모른다. 먹거리나 의류, 스포츠, 가구, 집을 뛰어넘어 연예인이나 일반인들의 누드화보 에도 웰빙 컨셉트를 이용하고 있다.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에 고급스러움을 더해 웰빙을 우려먹는 게 아닐까 싶다. 일부에서는 진정한 웰빙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육체의 건강 뿐 아니라 정신을 잘 가꾸고 평안하게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웰빙이지 않을까. 부지불식 중에 향기를 뿜어내는 내면의 정원을 매일매일 닦아주고 가꾸는 일에 더 열심을 내야겠다. 바른 정신이 깃들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란 쓸모없는 참외 같을 테니까 말이다.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생각보다 의외로 단맛이 많이 나는 사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맛을 느끼게 되는 사람, 처음의 인상보다 쓴맛이 숨어있는 사람, 자꾸만 멀리하고 싶은 사람 등이 생겨난다.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참외로 보일까? 물 속에 들어가자마자 맥없이 가라앉아 버리는 참외처럼 단맛도 없고 신냄새나 풍기는 건 아닐까? 잠자리에 들어서도 ‘물위로 뜨는 참외'와 가라앉는 참외'의 모습이 자꾸만 나를 뒤척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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