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편지

2007.06.05 07:07

성영라 조회 수:939 추천:127

비에 젖은 낙엽처럼 한없이 가라앉는 날이 있다. 그저 막막하고 이상스레 슬퍼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나도 모르게 낡은 편지함을 뒤적이게 된다. 낯익는 이름들과 글씨 속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집어 든다. 매번 아버지의 편지에 손이 먼저 가는 것은 아마도 결혼과 함께 시작한 이민 생활 초기에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의 일 관계로 서울에서 몇해를 살다 돌아 온 이후로는 좀 뜸해졌지만 대체로 아버지의 편지는 책이나 신상품 옷, 약재 등을 동반하여 계절과 계절 사이를 부지런히 넘나들곤 했다.  십대 취향의 깜찍한 캐릭터 카드에서 은은한 무늬의 편지지, 또 가끔은 A4용지에 이르기까지 사용한 편지지 만큼이나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우리집 단감이 제법 커 간다. 땅에 심겨진 것들 모두 잘 자라고 있는데 모과가 그만 병이 들었다. 올 겨울엔 목감기에 잘 걸리곤 하던 네가 더 마음에 걸리는 구나.” 감기 예방에 좋은 한약재를 일 회 분씩 포장하여 부쳐 주시며 동봉한 글이다. 그 겨울, 고국에서는 달고 다니다시피 하던 감기에 한번도 시달리지 않고 지냈다. 사실 그 약재들은 두어 번 먹은 이후로 계속 냉동실에 보관 중이다. 여러 해가 지났건만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의 편지가 내겐 종합 비타민이요, 예방 접종이었던 셈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 미국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몸도 마음도 몹시 지쳐있을 때 보내주신 편지에 담긴 성경구절 이다. 언제든지 필요할 땐 전화선 저 쪽에서 기도해 주시는 믿음의 선배. 살아계심 그 자체만으로도 아버지는 든든한 산과 같은 존재이다.

이민 생활 첫 해에 “지금 그리고 여기에” 라는 단 한 줄을 적은 카드를 띄우신 적이 있다. 단어들이 화살처럼 박혀 가슴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내가 아무 말 안 해도 아버지는 내 웃음 속에 묻어나는 눈물을,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감지하셨던 거다. 나 또한 이 한 줄에 숨어있는 뜻을 읽어내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떠나 온 하늘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움으로 묻어 두자고, 이제부터는 지금 이 순간 이 곳을 사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날 이후로 새로운 땅에서의 모험을 즐기고 찾아 나설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기 전에 다 써 놓으려고 했으나 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이제야 정리하여 보낸다. 네가 알아 두면 도움이 되리라 믿고 이 글들을 보낸다……너의 이름이 지워진 호적등본을 보는 순간 팔이 떨어져 나가는 심정이어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 A4용지 10장에 빼곡히 딸의 탄생에서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떠나기 전까지의 흔적을 회상하시며 타이핑 한 편지다.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날 이야기와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어 마치 단편 소설 한 편 읽는 맛이 난다. 육아일기가 이런 걸까 싶게 아버지는 나의 성장 과정을 세밀하게 기억하시며 그때의 소감을 생생하게 일러주셨다.

결혼하여 새로운 둥지를 찾아 먼 나라로 딸이 떠난 후, 아버지는 딸이 지내던 방에 홀로 앉아 여러 날을 펑펑 우셨다고 한다. 그리곤 컴퓨터 앞에서 또 몇날을 보내시더라고 나중에 어머니가 귀띔을 해 주셨다. 한글 자판 위에서 더딘 솜씨로 수없이 지우고 타이핑 하기를 반복하셨을 아버지. 한 자 한 자 아버지의 사랑이 묻어나는 글들을 가슴에 새기며 나도 많이 울었나 보다. 종이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다.

“서점에 들렀다 신간 코너에서 눈에 띄는 게 있길래 샀다. 네가 좋아하는 작가 맞지?”  얼마 전에 소설가 김형경의 신간 소설 두 권을 받아 보았다. 갓 나온 뜨끈뜨끈한 소설책을 읽으며 뜨끔거리는 눈을 연신 문질러야만 했다.

뜨듯한 아랫목에 아버지와 나란히 엎드려 원고지에 채워진 각자의 글을 돌려 읽으며 행복해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안개처럼 피어 오른다. 감성이 풍부해 시작(詩作)도 종종 하시고 글쓰기를 즐겨 하셨던 아버지. 지금도 가끔 자작시를 읽고 평해달라며 건네 주시곤 하는 걸 보면 꼬맹이 시절부터 아버지는 글친구로서 나를 꽤나 아껴주셨지 싶다.

우리는 참 많이 닮아 있어 때론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발견하는 싫은 점이 내 속에도 존재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자연히 서로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뒤집어서 보면 그만큼 서로를 이해하기도 쉬웠을 텐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 편지를 통해 아버지와 나의 잠시 벌어졌던 틈새를 메우고 있다. 이 행복을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다는 바람을 마음속 깊이 되뇌이며 아버지의 편지를 쓰다듬어 본다. 아버지의 마음이 녹아 있는 글자 하나 하나 그리고 행간들 사이에서 그의 손길을 느낀다.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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