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넝쿨 흐르다

2011.10.01 06:20

성영라 조회 수:1055 추천:115

                                     호박넝쿨 흐르다
                                                          
                                                                                       성영라

    장미나무와 복숭아나무 사이, 볕이 잘 드나드는 땅에 푸른 물결 흐른다. 호박넝쿨 강물이다. 시든 호박 묻어 둔 곳에서 피어난 기쁨이다. 거름으로 썩어질 것들은 뭐든 흙 속에 묻으시는 어머님의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는 양 옆의 이웃과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 씩씩하게 잘 자라주고 있다. 무심한 듯 거침없이 생명을 키워가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호박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나 자신 유순한 강이 되어 흐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열흘이면 손바닥만한 웃음으로 피어나는 잎들. 두어 차례 그 호박잎 쪄서 쌈 싸먹고 된장찌개 끓여 먹고, 한번은 연한 잎 가려 이웃에게 주었다. 어느새 두 팔을 벌린 것보다 웃자란 넝쿨을 만들었다. 며칠 전엔 봉오리더니 오늘은 노란 꽃들 별처럼 달려있다. 신라면 면발보다 디지털파마 머리카락보다 예쁜 웨이브를 가진 호박손을 건드려보다가 내친 김에 물까지 준다.

    일주일 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넝쿨 줄기 속이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내부가 마치 터널같이 뻥 뚫린 수관. 잎을 통해 흡수된 물을 넝쿨 전체로 전달하는 역할 담당이 바로 줄기관이었던 것이다.  

    딴에는 잘한다고 제법 넉넉히 줄기부분까지 똑똑 따버리다가 아차, 싶었다. 잎과 줄기가 연결된 곳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한다고 어머님이 당부하셨지. 호박넝쿨이 건강하게 살려면, 어린 잎들뿐만아니라 벌레에게 파먹혀 상하거나 쇠해진 잎들이라도 적당히 한 몸으로 붙어있어야 하는 거라고 혼잣말처럼 하셨다. 그래야  물이 넝쿨 전체로 골고루 공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올 여름, 16년 동안 한집 살이를 하시던 어머님이 독립하여 살아보시겠다고 노인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집과는 10분내 거리에 있는 곳으로 한인은 어머님 한 분뿐이다. 오전 내내 눈부신 햇살이 침실과 거실을 쏘다니고 동쪽으로 난 창 앞에는 우듬지가 풍성한 나무 한 그루 든든하게  서 있다.

    삼십오 년 전 이민하실 때 만큼이나 어머님에게는 큰 모험일 것이다. 사방 국적이 다른 이웃들과 어떠한 화성법으로 노년의 삶을 연주하실까. 홀로 자녀들 키우며 꿋꿋하게 꼿꼿하게 이 땅에 뿌리내렸던 그 세월의 힘으로 거뜬히 버텨내실까...

    이사하시기 전 심은 늙은 호박이 푸른 넝쿨을 이루었다.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호박잎들 다시 자라주었다. 고맙다. 물 주던 것 멈추고 호박잎 두 손으로 받쳐본다. 푸른 강물 내 맘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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