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연못

2007.02.19 23:21

정순인 조회 수:457 추천:48

    나는 가끔 산으로 간다. 계절이 바뀔 때나 기분이 뒤숭숭해지면 식구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짐을 챙긴다. 그래봤자 2, 3일 머무는 것이 고작이지만 온 몸으로 산을 느끼며  거닐다 오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지난 여름에도 계곡으로 한 발 빠진 나무를 툭툭 치며 흐르는 물소리가 불현듯 듣고 싶어 집을 나섰다. 요 몇 년 사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생겨 마음 내기가 쉬웠는데 그 산에 가면 잠자리와 끼니를 부탁할 수 있는 절이 있어 좋다.
   편한 마음으로 가는 그 산은 그리 높지가 않다. 계곡도 깊지 않아 폭포나 우레와 같은 물소리는 들을 수 없다. 걷다 보면 숨어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만나고 사이사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날은 법당 앞쪽으로 나있는 평평한 소나무 숲을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다가 오고 또 다른 날은 법당 뒤편에 있는 등산길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뒷길은 조금 힘들다. 암벽이 턱하니 버티고 서있어 몸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 올라갈까말까 망설이게 한다. 이곳에 오면 법당을 두고 쉬운 길과 힘든 길이 뚜렷이 나누어진다.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선택이 여지없이 이곳에도 있다는 듯이.
   그 산에는 A라는 남자의 연못이 된 웅덩이도 있다.
   처음 봤을 때, A는 마주하기가 어쩐지 두려운 남자였다. 새로 온 관리인이라고는 했지만 깡마른 체구에 피부가 검고, 인상을 써서 생긴 듯한 주름이 얼굴에 많았다. 입은 옷도 허름하기가 오랜 세월 노숙한 사람의 차림새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까이 가면 소주냄새가 폴폴 나고 말을 실수했다간 욕설이 함부로 나올 것같이 보였다.
   몇 차례나 갔어도 느긋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탓도 있다. 공양간에서 밥 먹고 맨 먼저 나가는 사람이 그였고,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는 법도 없었다. 해서 간혹 산책길에서 만나도 그가 먼저인지 내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짧은 목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얼른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런 A가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을 듣게 되었던 건 바로 지난 여름, 계곡물소리가 듣고 싶어 갔을 때였다.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법당과 여기저기의 나무그늘 아래에 모여 있었다. 조용하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짐을 풀고 알아보니 그들은 참선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 했다. 며칠 동안 머물거라 했는데 참선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의 움직임에는 거의 소리가 없었다.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더 두드러지게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A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마당에 앉아 있었다. 이제까지 대로라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아야 했다. 일을 하고 있거나 경내를 배회할 때라도 사람들이 모인다 싶으면 피하곤 했던 그의 이전행동으로 보아 마당 한 구석에 의자를 갖다놓고 머리를 떨구고 앉아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의외였다. 게다가 그곳은 수각(水閣)에서 넘처난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땅을 기어가다가 한 곳에서 만나는, 얇게 파인 웅덩이가 있던 자리였다.
   이튿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셋 달린 작고 위태로워 보이는 둥근 의자에 엉덩이를 겨우 걸친 모습으로 역시 앉아 있었다. 궁금했다. 봄에 봤을 때는 흙탕물만 고여 있어 지저분하게 생각했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있을 때 가보기는 싫었다. 없을 때 가보리라 작정하고 산책하면서도 그 쪽을 쳐다보고 방안에 있을 때도 간혹 문을 열어 그 자리가 비어있나 확인했다. 우연인지 내 호기심이 웅덩이로 갈 때마다 그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햇빛이 강해질 무렵 선방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타종소리가 들렸다. 나도 덩달아서 소리 따라 방을 나왔다. 마루에 서서 사람들이 선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웅덩이 쪽을 돌아보자 이번엔 그가 없었다. 재빠르게 움직여 그 자리에 갔다.
   웅덩이엔 미나리밖에 없었다.
   연초록 포기 사이로 작은 물방울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곤 했지만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더러운 물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미나리가 예쁘기는 해도 별 것은 아니었다. 괜한 호기심으로 시간을 보낸 게 멋쩍어 웅덩이를 한바퀴 돌았다. 그가 줄기차게 앉아있는 이유를 찾지 못해 아쉬워서였다. 다시 한바퀴 더 돌아 의자가 있는 자리에 서자 뒤에서 “물고기가 잘 놀지요?”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A였다. 비밀을 찾아내려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해서 얼른 자리를 비키려다 되물었다.
   “어디에요?”
   그가 손짓으로 거품처럼 물방울이 생겼다 사라지는 곳곳을 가리켰다.“이런 물에서도 고기가 사네요”라는 말로 대화를 텄다. 짧긴해도 말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웅덩이는 A와 만나 말을 나누는 유일한 장소가 됐다. 툭툭 던지듯 내뱉기는 해도 그곳에서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에는 생기와 편안함이 감돈다. 그럴 때 보면 웅덩이에 사는 모든 것이 그에겐‘사랑’이지 싶다.
   요즘도 그곳에 가면 웅덩이 주변에서 자주 A를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치 금괴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앉아 있는데 좀 지나친 게 아닐까 싶다가도 마음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한다. 순수하게 관심을 쏟아 부을 수 있다면 대상이 웅덩이면 어떻겠는가.
   A가 정성을 쏟는 만큼 웅덩이는 변해 간다. 여름에는 자잘한 돌과 풀꽃들의 장식으로, 가을에는 가을대로 색깔 있는 단풍들을 물에 담아 화첩이 되면서 그 남자의 연못이 되어간다. 이제 그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주름으로 굳어있던 얼굴이 밝아졌다. 자연이 대상이긴 해도 애정을 가져서인지 그의 모습에서 세상을 떠돌았던 흔적이 없어졌다.
   언제쯤 그의 '사랑'의 대상이 인간으로 바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때가 되면 A의 얼굴은 넉넉한 표정을 갖고 있는 마애불을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흙탕물 웅덩이가 순박하고 예쁜 연못으로 변했듯이 말이다.

수필가. 정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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