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혹은 사실의 색

2007.04.02 17:21

정순인 조회 수:672 추천:52

      
  가만히 있어도 무엇인가 절로 될 것 같은 날이 있다.
  그런 묘하고 나른한 날 오후, 질녀가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면서 부자가 되려면 빨간 색 지갑을 가져야된다는데 고모는 있냐며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이라 귀가 솔깃해져 근거 있는 거냐고 했더니 친정 엄마에게서 들은 거란다. 그쪽 모임의 사람들이 핸드백을 열 때보면 거의 다 빨간 색 지갑을 갖고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친구도 그런 이야기를 했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올케가 만나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기억나 당장 질녀를 대동하고 사러 나섰다.
  마침 백화점은 세일 기간이었다. 다니면서 모양을 고르다가 카드나 동전 넣기 편한 반지갑으로 골랐다. 표시된 가격에서 30프로라는 세일 가격을 제하고 돈을 내밀었더니 아가씨가 다른 것과 달리 빨간 색은 20프로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자 되는 색이라서 그렇다며 다른 상점도 마찬가지란다.
  옳거니, 사실이구나. 두 말없이 돈을 지불했는데 그때부터 손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비싸서 망설였던 물건도 사고 질녀에게 원하는 걸 말하라며 호기도 부렸다. 부자가 되는 지름길을 발견했으니 까짓 걱정할게 무에랴. 마침 투자해 놓은 것도 있으니 빨간 지갑이 다 알아서 돈을 만들어 채우겠거니 싶었다.
  그날 계산대에 서있는 사람들이 꺼내는 지갑 색이 뭘까로 그들의 부를 점쳐보는 재미도 솔찮았다. 빨간 색을 발견하면 장신구를 쳐다보며 명품일거라 추측했고, 다르면 돈이 없을지도 몰라 하는 식의 가벼움으로.
  며칠동안 빨간 색에 그렇게 취해 살았다.
  그런데 경제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가 색깔이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글을 읽고 내 구매의 실없음을 알게됐다. 어이없게도 내가 알고 있었던 걸, 아니 딴 사람도 알고 있었을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장사꾼들의 마케팅 전략에 넘어가 버린 어리석음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구매욕을 자극하는 색채의 위력, 그것도 가장 감성적이고 예민하게 만든다는 빨간 색에 넘어간 호기. 하긴 그 색에 넘어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1931년도에 코카콜라를 마신 사람들도 은연중에 넘어간거라 하지 않는가.
  당시 경기 침체로 고전하던 코카콜라는 판매가 뜸한 겨울철에도 공격적인 경영전략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사그라들지 않는 강렬함을 상징하는 빨간 색이었다. 홍보를 담당했던 화가 헤든 선드블론(Jhadden Sendblon)는 코카콜라의 로고인 빨간 색을 산타클로스에게 입히기로 작정했다. 신선한 거품을 상징하는 흰 수염을 날리며 눈길을 헤치고 각 가정에 나누어주는 선물, 코카콜라.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광고는 전 세계로 퍼졌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오늘날의 부가 그때의 기반 때문이었다고 하니 색채심리를 이용한 상술과 전파력에 감탄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덤으로 그 광고 때문에 19세기 초에는 초록 색, 말에는 파란 색 등으로 다양했던 산타의복장이 빨간 색으로 표준화 되었다니 그 또한 놀라울 뿐이다.  
  횡재를 원했던 나는 상인들이 퍼트린 말에 넘어가 지갑을 산 꼴이 됐지만 코카콜라가 빨간 색으로 성공한 것에 미련이 남아 질녀에게 전화했다.
  “내가 산 지갑, 그거 부자가 되는 거 확실하지?”
  “응, 근데 한가지 잘못 안게 있더라. 어제들은 말인데 빨간 색 지갑 그거 반지갑은 아니래. 장지갑을 가지고 있어야 한데.”
  에구 어쩌나.
  정말로, 부자는 물을 건너 가버렸다. 묘하고 나른했던 날의 허황된 꿈이 여지없이 깨지는 대답이었다.
  
                                                    
수필가. 정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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