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장" (200 자 X 90 매)

2005.05.23 04:48

김영문 조회 수:1276 추천:100

                                “폐차장”

(200 자 X 90 매)

    나를 벌판에 팽개치듯 내려놓은 버스는 우웅 힘겨운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폐차장은 텍사스의 허허벌판에 얼기설기 가시철망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서 있었다.  그 정문에는 콴스 오토 우레킹 (QUAN'S AUTO WRECKING) 이라고 씌어 있는 간판이 쇠줄로 울타리에 걸려 있었는데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것이 몹시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포장되지 않은 맨 땅 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철화된 차량들이 널려져서 황량한 분위기를 만들며 녹슬고 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둔 환자의 내장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는 그 고철 더미 위로 숨쉬기도 힘들만큼 뜨거운 태양이 모질게 내려 퍼붓고 있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오후 시각이건만 괴로울 정도의 더위는 식을 줄을 몰랐다.
    군데군데 시꺼멓게 기름얼룩이 스며든 맨 흙 밭 길을 따라 나는 사무실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허름한 건물로 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기름때 묻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모두 퇴근했는지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바깥 공기 속에 두껍게 젖어들어 있는 기름 냄새가 여기서도 나고 있었다.  저 안쪽에서 책상에 앉아 일하던 남자가 나를 보았다.  그는 동양인이었는데 몸이 무척 크고 눈매가 무섭도록 날카로운 사나이였다.  그가 손짓하는 대로 나는 그의 책상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저는 석훈입니다.  전화로 인터뷰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준비해온 이력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근육질의 사나이에게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이력서를 받아드는 손의 주먹 관절에 두툼한 굳은살이 붙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술 운동을 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긴장하여 맞은 편 의자에 몸을 곧추 세우고 앉아서 그 사나이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겁먹을 것 없다.  이유모를 적대감에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
    “당신, 한국에서 왔다고 그랬지요?”
    그 사나이는 악센트가 심한 영어로 물었다.
    “네.  한국에서 왔습니다.  이민으로 미국에 입국한지 30 일정도 됐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군요.  30 일정도 밖에 안됐다면서.”
    사나이의 목소리에는 좀 빈정거리는 투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안했다.  일곱 번째 인터뷰.  럭키 쎄븐이라고 기대했는데 허접 쓰레기 직장이나마 얻기는 오늘도 틀린 모양이다.  잠시 이것저것 더 물어보던 그는 드디어 말했다.
    “시간당 8 불.  오버 타임 근무도 모두 타임카드에 의해서 지불 됩니다.  내일 아침 7 시부터 출근하십시오.”
    “네?”
    나는 뜻밖의 말에 사나이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내 이름은 스티브 콴입니다.  철저히 내 말을 잘 들으면서 일해야 합니다.”
    스티브 콴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 보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나면서 얼결에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스티브 콴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돌아서서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춤거리다가 그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해 보이는 등에 대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내일 7 시에 나오겠습니다.”
    나는 스티브 콴의 사무실에서 나와서 땡볕 아래 눈 닿는 곳 까지 찌그러지고 녹슨 차가 수없이 쌓여있는 폐차장을 둘러보며 게이트를 나왔다.  한 때는 반짝거리는 최신형이었을 차들이 이제는 공동묘지로 향하여 종말을 기다리듯 쌓여 있는 곳에서 미국 생활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스티브 콴의 이상하게 적대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러저런 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주머니 속에는 단 돈 오십 불 정도가 남아 있었던 판이므로 나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셈이었다.  시간당 8 불이라면 기대치를 훨씬 웃도는 임금이었다.  스티브 콴이 이유 없이 미워하던 예뻐하던 상관없이 일단 근무를 시작하고 볼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버스를 타고 집에서 6 시에 출발하여 회사의 정문 앞에 있는 정거장에서 내렸다.  여섯 시 사십 분이었다.  점심 도시락 보따리를 든 십여 명의 작업복 차림들이 함께 내렸는데 보니 모두 같은 게이트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그중 내 옆에서 가던 흑인 하나가 돌아보며 물었다.
    “못 보던 친구인데 당신도 여기 일하러 오는 사람이요?”
    “그렇습니다.”
    “어디서 일하지요?”
    “아직 모르겠는데요.  오늘이 첫 날입니다.  아마 사무실 근무인 것 같습니다.”
    “여기 텍사스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코리아에서 온지 30 일 됐습니다.”
    “코리아?  그럼 보스 콴씨 일가족하고 같은 나라에서 왔구먼요?”
    나는 뜻밖의 말에 놀랐다.
    “콴씨도 코리아에서 왔다는 말입니까?  나는 챠이니스인줄 알았는데요.”
    그 흑인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코리안인지 챠이니스인지 나는 분간을 못 하겠어요.  당신들은 다 똑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참, 나는 제임스요.  현장주임입니다.  스티브 콴에게서 직접 작업 명령을 받고 있지요.”
    사람 좋아 보이는 제임스는 자기가 현장주임이라는 사실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석훈입니다.  자리 잡을 때 까지 잘 좀 도와주십시오.”
    나는 제임스와 악수를 하고 헤어져 사무실로 들어갔다.  일곱 시 십오 분 전이었는데 스티브 콴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 한쪽의 책상에는 어제는 없었던 동양 여자가 하나 타자기 앞에 앉아서 일하는 것이 보였다.  얼굴 모습이 스티브 콴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 누이동생인 모양이다.  
    “굿모닝, 스티브.  나 여기 출근했습니다.”    스티브는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자기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약간 반항적은 기분으로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스티브 앞에 서있기로 작정했다.  일단은 참고 일하자.  배아지 꼬이는 일이 있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  
언뜻 눈이 간 사무실 창문 밖에는 텍사스의 평원이 아침의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마침내 스티브 콴이 하던 일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굿모닝.  석훈이라고 했지요?  이 책상을 정리하고 여기서 일하십시오.”
    스티브 콴은 자기 바로 옆의 책상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주로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겠지만 현장에 나가는 일도 많습니다.  일의 성질상 현장의 일을 모르면 사무실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스티브의 날카로운 눈이 나를 꿰뚫을 듯 보고 있었다.
    “네.”
    나는 주어진 자리에 앉아서 먼지 앉은 책상을 청소하고 전에 이 책상을 쓰던 누군가가 남겨놓은 각종 잡동사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여덟시가 되면서 사무실에는 백인 여자 하나와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더 출근했다.  그 스티브 콴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동양 여자와 나까지 합쳐서 사무실 근무자가 모두 네 명인 모양이다.  스티브 콴의 누이동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눈을 내리 깔고 무언가를 계속 타자하고 있었는데 가꾸면 몹시 아름다울 것 같은 얼굴에 가냘픈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는 화장기가 없었고 미소는커녕 전연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밖에 나갔던 스티브 콴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석훈씨.  나를 따라 오십시오.  현장을 보여드리고 현장주임들을 소개해 주겠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서 사무실을 나가는 스티브 콴을 나는 서둘러 뒤따랐다.  뒤에서 보는 스티브의 몸은 운동으로 잘 단련된 균형 잡힌 것이었고 걸음걸이도 큰 몸집과는 다르게 사뿐 사뿐 경쾌했다.
    냉방 장치가 웅웅 돌아가고 있는 사무실을 벗어나서 밖으로 나오니까 아직 아침 아홉시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온몸을 휘감는 열기가 쪄낼 듯 더운 한나절을 예고하고 있었다.  포장 안 된 맨 흙바닥의 현장에는 온갖 자동차의 부속품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압축기로 납작하게 찌그러트린 폐차들이 겹겹으로 쌓여서 마치 장례식을 기다리는 관처럼 다음 공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폐차들 속에 처박혀서 일하고 있던 현장 직원들이 스티브 콴을 볼 때 마다 굿 모닝 써, 하며 깍듯이 인사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스티브는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권위를 가지고 군주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넓은 현장을 다 돌며 일하고 있는 현장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에 거의 두 시간 넘게 소모했다.  땀투성이가 되어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콴씨 일가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스티브 콴은 곁눈으로 흘낏 나를 보고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 안에는 언제 왔는지 골격이 크고 풍채가 좋은 노신사가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스티브 콴이 얼른 정중한 자세로 목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님, 이 사람이 어제 제가 고용한 석훈입니다.  사무실에서 제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일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씨니어 콴은 나를 꼭 스티브 콴이 했듯이 차가운 눈으로 쏘아 보았다.
    “한국에서 왔다지?”
    “네.”
    씨니어 콴은 지팡이에 의지하며 일어나 나를 등지고 서서 창문 밖의 광활한 텍사스 대지를 내다보았다.  한여름의 태양은 이미 그 대지 위에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 한국 사람들도 이제는 좀 철이 들어서 공평성이라든가 정당성 또는 타당성이라는 단어의 뜻을 배우기 시작했는가?”
    악센트가 몹시 심한 영어였지만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므로 언어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뜻을 알 수 없어서 잠시 멍청히 서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아는 데에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신사가 결코 우호적이지 아니하다는 것만큼은 실수 없이 알아낼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처음 보는 나에게 무엇 때문에 적대감을 품고 있는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하루에도 수십 대의 폐차가 들어왔다.  폐차가 들어오면 사무실에서 서류 절차를 마친 후 작업 조를 선정하여 해체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연료 탱크가 완전히 비어있는지 확인한 후 재활용이 가능한 부품을 모두 뜯어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타이어를 떼어내고 골조만 남게 되면 지게차로 들어서 헤비 프레스 안에 넣고 원래 크기의 약 사분의 일 정도의 크기로 네모반듯하게 압축시켜 버린 후 고철 업자에게 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떼어낸 부품들은 부품대로 따로 사가는 도매업자가 있었다.  이것이 모두 선금 거래이므로 더 할 수 없이 기막히고 안전한 사업이었다.  나는 미친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정직한 최선의 노력은 어떠한 웅변보다도 더 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차가운 적대감을 가지고 나를 대하던 스티브 콴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든 것 같이 느껴졌다.  두 주일째의 금요일이 되어 나는 첫 번째 주의 급료를 받게 되었다.  스티브 콴의 여동생이 아닐까 생각했던 사무실의 동양 여자는 역시 내 추측대로였고 이름은 애란 콴이었다.  애란은 경리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직원 봉급 수표도 애란의 소관이었다.  내 책상으로 와서 내 몫의 수표를 놓고 가는 애란의 등에 대고 나는 땡큐하고 인사를 했지만 애란의 뒷모습은 마치 못들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두 주일째 한 사무실에서 일했지만 나는 애란과 단 한마디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보지 못했다.  애란은 항상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상대방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한번 우연히 사무실에 들어오고 나가면서 시선이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애란은 황급히 나의 눈을 피해서 자기 책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 때 처음으로 가깝게 본 그 얼굴에는 어쩐지 괴로움과 고독이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서 나의 마음을 파고드는 애잔함을 느꼈다.  다행히도 애란에게서는 오빠나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적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방금 받은 첫 번째 봉급 수표를 나는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열었다.  정규 근무 40 시간과 초과 근무 8 시간에 세금 등을 공제하고 수표에 적혀 있는 금액은 362 불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금액을 손에 들고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렇게 몇 주만 더 일한다면 우선 급한 기본 생활 문제는 해결이 될 것 같았다.
    “봉급 액수에 틀린 것은 없습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스티브 콴의 목소리에 나는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봉급 수표를 치우며 눈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 잘되어 있습니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고용했는데 뜻밖에도 성실하게 일해 주셔서 아버님도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하고 달라서 공정하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노력하는 대로 정당한 대가를 틀림없이 드리겠습니다.”
    나는 스티브 콴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한국 사람하고 달라서, 라고 토를 달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스티브 콴의 미동도 없는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읽어지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묻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스티브 콴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나는 내 몫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돈 한 푼 없이 이 미지의 땅에 버려진 나에게 일자리를 주신 점 절대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버님이신 씨니어 콴에게도 제가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스티브 콴은 이미 뚜벅뚜벅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동양인이 사장인데다가 그 아들 스티브 콴이 강해서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복종하고 있던 판이었는데 거기 새로 온 나는 다만 그들과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덩달아서 꽤 괜찮은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나를 대하는 스티브 콴의 태도를 보면서 그들은 내가 별 볼 일 없고 스티브 콴의 수호를 받지 못하는 보통의 동양인 이민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별대우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리고 이제 나는 인종차별과 텃세의 와중에서 하루하루를 생존의 전투장에서 백병전하듯 살아나가야만 했다.  천만다행으로 주 근무지가 사무실이었기에 망정이지 폐차장의 현장 직이었다면 엄청나게 괴로운 나날을 보낼 뻔 했던 것이다.  현장 인부 중에 필리핀에서 이민 온 노인네가 하나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백인과 흑인 인부들 사이에서 온갖 멸시와 모욕을 몸으로 받으며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필리핀 노인의 두 팔뚝과 손에는 악어가죽처럼 징그럽게 울퉁불퉁한 화상 흉터가 있었다.  거구의 백인 인부 테드와 그 패거리 몇 명이 폐차의 연료 탱크에 일부러 휘발유를 더 부어넣고 이 노인이 작업할 때 불을 질러 터뜨려서 생긴 화상이라고 현장주임 제임스는 주위의 눈치를 보고 쉬쉬하며 설명했다.  그러나 서류상으로는 그저 안전사고로 처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폐차장 안에서는 테드만이 헤비 프레스를 작동할줄 아는 유일한 기술자인데 필리핀 노인네가 똑같은 기술을 가지고 취업했기 때문에 당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쟁의 싹이 트기 전에 제거해버린 셈이었다.  하느님은 결코 기분이 좋을 때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부품 개수 확인 또는 폐차의 차량 고유 번호 확인 등의 이유로 현장에 나갈 때 마다 현장 인부들은 몹쓸 욕설을 해대기도하고 각종 트집을 잡기도하며 나를 괴롭게 만들어서 즐기고 싶어 했다.  그중에 완력으로 대장 격 되는 체격이 우람한 백인 테드가 역시 이야기 들은 대로 가장 못되게 구는 놈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던 상대하지 않고 내 볼일만 보고 사무실로 들어오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 떼어낸 무거운 라디에이터를 품에 안 듯이 들고 나오는 나의 앞에 테드가 그 큰 몸으로 버티고 막아섰다.  나는 그를 비켜서 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 때마다 한 발 먼저 움직여서 내 앞을 계속 가로 막았다.  녀석은 문제를 일으켜서 나를 골탕 먹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잠시 나의 곤경을 즐기던 테드는 마침내 그 큰 몸으로 나에게 툭 부딪쳐 왔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워서 절절매던 나는 안고 있던 라디에이터를 땅에 떨어트리며 보기 좋게 벌렁 나가자빠지고 말았다.  주위에서 일하던 테드 패거리들이 와그르르 웃으며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몰려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테드에게 말했다.  
    “테드, 좀 조심할 수 없겠어?  난 무거운 걸 들고 있었단 말이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테드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고 나에게 바싹 다가붙었다.  산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며 테드는 위협적인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뭐라구?  원숭이 같이 생긴 새끼가 무슨 소리를 씨부렁거리고 있어?”
    테드의 손이 장난하듯 내 얼굴을 훑어 내린 후 멱살을 거머쥐었다.  나는 대꾸없이 테드의 불알을 바지 위로 움켜쥐고 어금니를 악물며 혼신의 힘을 다해서 으깨어 버렸다.
    “악!”
    소리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는 테드의 다리를 걸고 그의 상반신을 두 손으로 힘껏 밀어내자 그는 쿵하고 소리를 내며 흙밭에 쓰러졌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피어오르고 웃음소리가 뚝 멎으며 구경하던 패거리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둘러선 녀석들은 얼어붙은 듯 조용해져서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흙밭에서 사타구니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던 테드가 드디어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거리를 좁혀서 힘을 주어 허리를 비틀며 팔꿈치로 그의 명치에 모진 공격을 가했다.  욱!  숨구멍이 막힌 테드의 눈이 하얗게 돌아가면서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되돌아 온 눈에 비로소 공포가 서리고 두 손을 들어 그만두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파랗게 인광이 이는 눈으로 경계태세를 풀지 않으며 태권도의 후굴 자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번 떠보기 위하여 공격 세를 풀지 않고 몇 족장 거리를 좁혀보았더니 테드는 비틀거리며 황급히 공격 거리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표독스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눈을 피하며 더 이상 전의가 없다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제서야 나는 자세를 풀고 두 팔을 벌려 나 역시 전의가 없다는 제스처를 보이며 테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작업장에서는 항상 안전사고를 조심해야 돼.  알았어?”
    나는 그의 뺨을 툭툭 쳐주고 나의 승전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에게 등을 보이며 유유하게 걸어서 내가 아까 땅에 떨어트렸던 라디에이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물론 테드가 쥐새끼로 돌변해서 뒤에서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서 유유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초긴장하고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속에서 나는 라디에이터를 다시 집어 들고 돌아서서 사무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언뜻 보이는 저쪽에 스티브 콴이 서 있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못 본척하고 돌아섰다.  나는 스티브 콴이 잠깐 마주쳤던 시선을 거두고 얼굴을 돌릴 때 거기에 희미하게 미소가 띄워져 있음을 놓치지 않고 감지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회사 안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모두들 수군거리고 있었다.  현장주임 제임스가 다가와서 말했다.
    “잘했어요.  테드 그 놈은 못된 놈입니다.  무서우니까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 어제 일을 시원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테드의 와이푸가 복수하러 오면 큰일인데요.  불알을 으깨어 버렸으니까.”
    나는 승자의 여유를 가지고 좀 느물거렸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놈의 와이푸는 석 달 전에 도망갔어요.  불알이 깨지기 전에도 기능이 별로 신통치가 않았던 모양이에요.”
    제임스도 히죽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동양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무술을 잘합니까?  스티브 콴도 블랙 벨트라고 하던데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스티브의 동생 애란 콴도 쿵푸의 블랙 벨트라더군요.  여자라고 함부로 보고 까불다가는 뼈도 못 추린대요.”
    그건 흥미 있는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애잔해 보이기만 하는 애란이 쿵푸를 했단 말이지?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왜 애란의 얼굴에는 그렇게 항상 그늘이 서려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 까지 아무 말이 없던 스티브 콴이 점심 종이 울리기 바로 직전에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석훈씨.  당분간 밖에 나갈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 그 일로 테드가 보복할지도 모르니까 상황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으면 큰 착각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태권도를 하신 모양이군요?”
    “네.”
    나는 대답하면서 스티브 콴을 유심히 다시 보았다.  그가 태권도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정확한 한국말 발음의 태권도였지 발음만 따온 영어식 발음의 태권도가 아니었다.
    “대단하십니다.  어젯밤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흥미로워 하시더군요.”
    “감사합니다.”
    뭔가 더 말을 할 것 같다가 스티브 콴은 입을 다물고 사무실을 나갔다.      저쪽에서 외면한 채 듣고 있다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보는 애란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잠시 애란을 보고 있다가 그 책상으로 걸어갔다.
    “소동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뜻밖의 행동에 애란은 당황하여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애란이 대답했다.  이만한 대화도 없었던 참이었으므로 나는 애란이 대답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흥분하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애란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조만간 깨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항상 말없고 그늘진 모습을 하고 있는 애란에 대해서 내가 점점 더 관심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른 오후 사무실에 나온 씨니어 콴은 자기 일을 하던 끝에 나를 불렀다.
    “어제 테드하고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다.  다친 데는 없는가?”
    “괜찮습니다.  소동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나는 항상 조용하고 침착해 보이는 이 노신사에게 조심스런 호감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씨니어 콴은 어쩐지 쓸쓸한 얼굴이 되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부당하거나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야.”
    씨니어 콴의 표정에서는 첫 대면 때 느꼈던 적대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테드는 질이 나쁜 놈이야.  그 정도로 끝낼 놈이 아니니까 조심하도록 해.  스티브를 통해서 말썽부리지 말라고 경고는 하겠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경계를 늦추지 않겠습니다.”
    “헤비 프레스 기술자를 두 번씩이나 못쓰게 만들었어.  혼자 군림해서 왕이 되겠다는 생각인 게야.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셈이지.  그렇게 말썽을 부려도 해고해 버릴 수 없게 만들고 있으니까 말이야.”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기술을 제가 배우겠습니다.  테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제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녀석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씨니어 콴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에는 지금 까지 보지 못했던 신뢰가 들어 있다고 나는 느꼈다.  
    “그래.  나가봐.”
    나는 일어나서 스티브 콴이 하듯이 동양식으로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씨니어 콴이 내 동양식 예절에 몹시 흡족해하며 나의 뒤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방을 나왔다.

    스티브 콴은 더 이상의 사고를 우려했던지 현장으로 나가야하는 일은 자기가 하고 나를 가급적이면 사무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안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애란과 비록 업무에 관한 것이긴 했지만 그전보다는 훨씬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애란은 대화에서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내 멋대로의 상상인지는 모르지만 애란도 어쩌면 나와의 더 깊은 대화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애란은 무엇인가 더 말이 있을 듯하다가 아쉽게도 언제나처럼 눈을 내리 깔고 차에 올라 포르르 먼지를 뿌리며 퇴근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떠나 텅 빈 사무실 창문 밖에서는 진한 빨간색을 뿌리며 텍사스의 태양이 마악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허전한 기분으로 화장실로 들어가 흙먼지로 더러워진 얼굴과 손을 씻었다.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난 지 오래 되었을 것이고 차가 없는 나는 이제 늦게 까지 근무하다가 퇴근하는 누구든 붙잡고 가솔린 값을 줄 테니까 아파트 까지 태워다 달라고 통사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석훈.  오늘도 열심히 일했구먼.”
    젖은 손과 얼굴을 타월로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나는 놀라서 씨니어 콴을 보았다.  그가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사무실에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사무실 건물 앞으로 나가서 지는 해가 뿌리는 마지막 핏빛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온통 불타오르는 듯한 광활한 대지를 보며 나는 그 장관에 압도되어 숨을 죽였다.  이윽고 침묵을 깬 씨니어 콴이 또렷한 한국말로 나에게 말했다.
    “이 나라는 정직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는 데에 인색하지 않아.”
    나는 놀랍고도 또 반가운 눈으로 씨니어 콴을 보았다.
    “한국말을 잘 하시는군요.”
    “나는 한국에서 삼십년 이상을 산 사람이야.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한국이 내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마침내 저녁 해는 지평선을 넘어서 사라지고 불처럼 타오르던 빛도 없어지면서 사위는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씨니어 콴의 얼굴에 소리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화교에 대한 온갖 제재와 편견과 법적 불평등을 모두 감수하면서 그래도 한국이 내 나라라고 생각하고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다 틀려버렸지.”
나는 넘어가 버리고만 태양 대신에 씨니어 콴의 얼굴에 피어나는 분노를 읽으며 마치 내 개인이 잘못한 일인 것처럼 송구스러워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씨니어 콴의 얼굴이 붉어지며 노염이 타올랐다.
    “달라진 것 하나도 없어!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어.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무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이따금 나오는 신문 기사를 읽어보란 말이야.  한국 사람들은 마치 여기 노무자 백인 테드 같이 행동하고 있어.”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무슨 말이건 하면 씨니어 콴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은 맞는 말이었고 나는 반박할 길이 없었다.  
    “깊고 너그러운 이해와 인간 형제로써의 동료 의식이 부족해.  세계는 변하고 있는데도 한국 사회와 사람은 폐쇄되어 있어.  정체되어 있어.”
    주위는 이제 깜깜해지고 건물 지붕에 달려있는 희미한 외등만이 빛을 주고 있었다.  웅웅거리며 날파리들이 후덥지근한 공기 속으로 날아다니다가 얼굴에 와서 툭툭 부딪치곤 했다.  씨니어 콴은 어둠 속에 장승처럼 서서 분노를 삭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를 신음하듯 뱉아냈다.
    “애란이 열아홉 살 때 행방불명이 됐었어.  안타깝게 찾아다니다가 경찰에 신고했는데 담당 경찰관은 히죽 히죽 웃으면서 중국 아이를 누가 훔쳐가요 하는 거야.  이틀 후에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온 애란을 병원에 입원시켰어.  의식이 들고도 또 한나절을 계속 울기만 했지.”  
    멀리서 누군가가 금속 갈리는 소리를 내며 헌털뱅이 차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장대하게만 보이던 씨니어 콴의 얼굴이 땅으로 떨어졌다.
    “불량배들 다섯 명에게 납치되어, ..... 몹쓸 일을 당했던 게야.”
나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힘들이며 밤공기를 폐 속으로 빨아들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눈 모서리로 쳐다본 씨니어 콴의 두 볼에는 희미한 외등 불빛을 받으며 눈물이 번져 흘렀다.
    “그러고도 또 병실에서 며칠이 지난 후 애란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없이 울었어.  울면서 말했어.  짱꼴라 년이니까 괜찮다고 그러더라고 말이야.”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 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 나가면서 어디에건 주저앉고 싶었다.
    “그런 일이 있고 일년도 되지 않아서 내 아내가 홧병으로 죽고 말았어.  나는 그 때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지.  짱꼴라 아내가 누울 자리가 없는 나라였기에 우리는 시신을 화장해서 공중에 뿌려 버렸지.  그리고 나는 내 나라라고 생각하고 30 년을 살았던 한국을 떠났어.  구년 전이야.”
    의지가 강철처럼 강해 보이는 씨니어 콴도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운 듯 목이 메어 있었다.
    영겁인 것처럼 느껴지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웅웅거리며 날파리들은 끊임없이 내 온몸에 부딪치며 주위를 맴돌았다.  이따금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리는 바람이 휘익 몸을 감고 지나가곤했다.
    잠시 더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제 목소리를 되찾고 침착하게 말했다.
    “석훈.  오늘 밤에는 내가 아파트 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교통편은 염려 안 해도 돼.”

    며칠 사이에 현장 직원 여섯 명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현장일이 바빠져서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애란 까지 현장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야했다.  청바지에 큰 작업용 장갑을 끼고 땡볕 아래서 마치 천형을 받은 사람인 듯 자학적인 모습으로 폐차를 해체하고 있는 애란을 나는 애처러워서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주위의 눈만 없다면 가서 끌어안고 위로하고 속죄하고 같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씨니어 콴과의 그 대화가 있었던 밤 이후 스티브 콴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져서 그는 이제 나에게 조심스럽게 동료로써의 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물고서야 작업을 중단했는데 폐차가 쌓여있는 저쪽에서 계속 망치 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애란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망치 소리가 나는 곳으로 폐차들 틈을 비집고 걸어갔다.  마침 작업을 끝내고 나오던 거한 테드와 마주쳤는데 내가 폐차들 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자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망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역시 애란이 어둠 속에서 녹슬어서 안 떨어지는 부품을 떼어내기 위하여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손에 낀 터무니없이 큰 장갑 때문에 애란의 팔은 애처로울 정도로 가늘어 보였다.  나는 급히 다가가 다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할 말을 찾으려고 애썼다.  애란은 내가 다가와 서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못 본 척 계속 망치질을 했다.  어둠에 묻힌 자동차의 시체들 속에서 망치 소리가 기묘하게 외로운 느낌을 주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다가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와 같은 비장한 마음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말했다.
    “애란씨.  아버님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망치 소리가 힘을 잃고 작아지다가 멈췄다.  갑자기 드리운 적막 속에서 애란의 참을 수 없는 흐느낌이 간간히 새어 나왔다.  나는 와락 달려들어서 애란을 끌어안고 같이 울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을 저주하며 애란의 앞에 바보처럼 서 있었다.  
    갑자기 부릉부릉하며 대형 지게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안전사고의 가능성 때문에 일몰 후에는 장비를 가동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누굴까 하고 생각하다가 나는 아까 나하고 눈이 부딪쳤던 테드 생각을 하고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애란씨.  들어갑시다.  스티브도 걱정하고 있을 텐데.”
    와르릉하며 지게차의 엔진 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애란도 눈물 젖은 눈을 들어서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집채만큼 큰 지게차가 압축된 폐차 서너 대를 한꺼번에 들고 이쪽으로 맹렬히 질주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나가야할 통로에다가 쿵하고 압축된 폐차를 던지듯 떨구어서 차단해 놓고 우르릉하며 안으로 밀어 붙였다.  맨 꼭대기의 폐차 두 대가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무너져 내려 내가 선 바로 옆으로 쾅하고 떨어졌다.
    “아!”
    애란이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나는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서서 얼어붙었다.  메케하게 흙먼지가 코와 입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테드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우릉우릉하며 지게차가 멀어져 갔다.  
    테드 이 개자식!  나는 어둠 속에서 이를 갈았다.  이상한 노릇이지만 그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갑자기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내팽개쳐졌다는 사실이 내 마음 속에 애란과의 더 가깝고 진한 밀착감을 심어 주었다.
    “애란씨.  거기서 내려오십시오.  테드 녀석이 더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나는 폐차 더미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애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란은 순순히 내 손을 잡고 의지하며 땅위로 내려왔다.  잠시 중심을 잃으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애란을 내 가슴 속에 끌어안게 되었는데 애란의 몸에서 오는 감촉은 안타깝도록 보드라웠다.  나는 십년의 긴 세월을 그렇게 연옥에 갇힌 사람처럼 혼자서 괴로워하며 살아왔을 애란을 생각하고 여기 같이 주저앉아서 손을 붙잡고 통곡해 주고 싶었다.  구름 속에 들어있던 달이 밖으로 나오면서 희끄무레하게 사위가 밝아졌다.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에 더 이상 울지 않으려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애란의 얼굴이 달빛을 하얗게 받으며 나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지금 까지 그렇게 순결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팔을 벌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번민에서 애란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듯 부둥켜안았다.  애란은 데려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처럼 매달리며 나의 품으로 들어왔다.  땀투성이가 된 내 가슴에 애란의 작은 숨결이 열병 환자의 것처럼 뜨겁게 느껴져 왔다.
    갑자기 밖에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스티브 콴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애란!  석훈!  거기 안에 있나?”
    “네, 여기 있습니다.  통로가 폐차 더미로 막혔습니다.  아마 테드 자식이 장난을 한 것 같습니다.”
    “잠깐 기다리시오.”
    잠시 후 지게차의 엔진 소리가 밤공기를 깨며 다가오더니 통로를 막고 있던 폐차 더미를 훌쩍 들어서 치워 놓았다.
    “괜찮습니까?”
    부릉거리는 엔진 소리 너머로 스티브 콴이 소리치듯 물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티브 콴은 중국말로 애란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했다.  애란이 힘없이 대답했다.  스티브 콴은 나에게 어떻게 해서 둘이서 그 속에 들어가 있게 된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애란이 몹시 피곤하다고 합니다.  사무실로 들어가 계십시오.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나는 애란의 어깨를 보호하듯 감싸고 사무실로 걷기 시작했다.  스티브 콴은 지게차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내 몸에 부딪쳐오는 애란의 몸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애란의 어깨를 더욱 힘주어 안고 걸으며 사무실까지의 길이 영원히 가는 먼 길이기를 바랐다.


이 글은 “크리스찬 문학” 제 17 집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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