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쓰고 버린 휴지 조각같이”

(200 자 x 29 매)

    그럴 리가 없어.  잘못 보았겠지.  김선희는 그렇게 입속으로 뇌까리면서도 고개를 길게 뽑아 앞을 주시하며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바쁘게 그의 뒤를 따랐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인파가 가득 찬 코리아 타운 쇼핑센터 안에서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없어졌다하며 걷고 있는 그 사람의 뒷모습은 김선희의 아스라이 멀어진 추억 속에서도 백시현이 아니라기에는 너무나도 그를 닮아 있었다.  김선희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걸음을 재촉해서 그 뒷모습의 남자 옆으로 닥아 섰다.  힐끗 눈치 채이지 않게 얼굴을 본다는 것이 그 남자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남자도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혹시 ..... 백시현 .....”
    그렇게 물어보던 김선희의 가슴이 더욱 두방망이질 쳤다.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너, 시현이구나!  맞지?  시현이야.”
    거의 십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백시현은 다소 멍청한 얼굴로 무작정 김선희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자신 없이 혼잣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선희야.”
    김선희의 얼굴에 환한 함박꽃 웃음이 피어오르고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마치 끌어안을 듯 두 팔을 벌렸다.
    “시현아, 어떻게 된 거니?  그렇게 소식이 없다가 이런데서 만나다니 이게 웬 일이니?  너는 언제 로스안젤스엘 왔니?  내가 여기 살고 있는 것 몰랐겠지?  지금 혼자니?”
    성격이 괄괄한 김선희는 백시현의 팔을 끌고 인파를 피해 가까운 벤치에 가서 앉았다.
    “너무 오래간만이다, 얘.  어떻게 지냈니?  거의 십년도 다 되어가지, 아마?  우리가 마지막 만났던 것 언제였는지 너 기억나니?”
    미친 것처럼 사랑했던 남자.  김선희의 아버지가 그렇게 노발대발하면서 반대를 안했더라면 이 남자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결혼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숫기가 없고 항상 너무 조용해서 김선희가 언제나 말했었다.  넌 내가 없으면 큰일 나.  알았어?  항상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란 말이야.  
    그래.  근데 그렇게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어.  남들이 들어.  백시현은 흘러내린 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리면서 말했었다.  
    김선희는 그런 백시현이 귀여워서 깔깔거리고 웃곤 했었지.  그러고도 또 거의 십년이 지났지만 지금 김선희의 앞에 서 있는 백시현은 그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얘, 가만, 우리 이러지 말고 저기 커피숍에 가서 뭐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둘은 사치스럽게 장식이 잘 되어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로스안젤스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딸아이 하나를 달랑 데리고 일 년째 살고 있던 김선희의 마음속에 모험적인 생각이 지나갔다.  그렇잖아도 백시현은 김선희에게 최초로 남자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김선희는 아직도 마치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현아, 기억나니?  그 때 ..... ”
    김선희는 말하다 말고 다소 멋쩍어져서 볼을 붉히고 킥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엔 사실 둘 다 바보였다.  아니, 뭐, 조금쯤 불빛을 남겨놓고 했어도 될 노릇이었을 텐데 그렇게 칠흑같이 깜깜 절벽으로 만들어 놓고 잘못하다가 둘이서 이마를 짓찧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깜깜하고 그렇게 무더운데도 꼭 뭘 덮어 가리고서라야만 하겠다고 김선희는 고집을 부렸었다.  몹시 어설프고 도무지 무드를 돋울 줄 모르는 백시현에게 김선희가 짜증을 부리자 그는 깜깜 칠흑 속에서 애원하듯이 말했었다.  좀 가만있을 수 없니?  지금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이게 첨이란 말이야.
    “근데, 선희야, 넌 어떻게 지냈어?  그 동안.”
    백시현이 오래 전 그 시절과 똑같이 손가락 끝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면서 물었다.
    “나?  로스안젤스에서 산지 지금 6 년 됐어.  국진 상사 주재원으로 나온 남편 따라 왔다가 그냥 주저앉게 되었어.  그 남편하고는 일 년 전에 이혼했지만 말이야.”
    이상한 노릇이었지만 김선희는 자기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
    “사실은 오늘 삼 년 동안이나 부어오던 계를 탔거든.  어쩐지 수다쟁이들하고 떠들고 있을 기분이 아니어서 저녁 값으로 오백 불을 떼어 주고 혼자 나왔다가 너를 만난거야.  이거 마치 너를 만나기 위한 운명이었던 것 같이 느껴지지 않니?”
    백시현이 피식 웃었다.
    “넌 여전 하구나.”
    재회의 흥분이 다소 가라앉으면서 김선희는 백시현의 모습을 유심히 볼 여유를 가졌다.  어쩐지 초라하고 쫓기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  하긴, 그건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그렇게 보였으니까.
    “너는 어떻게 지냈니?  네 얘기를 좀 해봐.”
    백시현은 멋쩍게 웃으며 다 마신 쥬스 잔에서 스트로로 꾸루룩 소리를 내며 얼음 녹은 물을 빨아들였다.
    “나두, 뭐, 그냥 그래.  별로 성공하지 못한 케이스가 되어 버렸어.”
    “결혼은?”
    “했지.  한국에 있어.”
    “누구하고?”
    “중매야.  너는 모르는 여자야.  너하고 달러.  살림하고 아이 키울 줄 밖에 모르는 그런 여자야.”
    김선희는 왠지 가느다란 질투심이 가슴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스스로도 흠칫 놀랐다.  그렇게도 먼 시절의 감정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얼마만큼을 살아야 그런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인가?
    “너 저녁 안 먹었지?  내가 한턱낼게.  우리 멋진 곳에 가서 저녁 먹자.  삼 년 동안 부어서 탄 거금의 곗돈이 고스란히 여기 들어 있거든.  오늘 저녁에는 내가 멋있게 한턱낼 수 있어.”
    김선희는 다소 들뜬 기분으로 핸드백을 톡톡 쳐 보이며 말했다.  왠지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을 동떨어져서 살았더란 말인가.  
    “오늘은 안돼.”
    백시현이 자신 없는 얼굴로 입속말하듯 말했다.
    “왜?”
    실망스런 목소리로 김선희가 물었다.
    “그냥.”
    “그냥이 뭐야?”
    “그럴 일이 있어.”
    “너, 오래간만에 만나서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나하고 저녁 먹을 시간이 없다면 말이 되느냐고.”
    김선희는 다소 화가 난 어조로 힐난했다.
    “넌 화가 나서 나한테 소리 지를 때가 제일 예뻐.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백시현을 보다가 김선희는 어처구니없어서 그냥 웃어버렸다.  그러면서 그 때 그 시절 팔짱을 끼고 정처 없이 쏘다니며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 때 백시현은 한국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도서관을 짓겠다고 꿈꾸고 있었는데.  항상 멍청한 것처럼 있다가도 그는 도서관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흥분하여 열변을 토해냈었다.  그 꿈은 어떻게 된 것일까?    
    “로스안젤스엔 왜 왔니?”
    “회사 일 때문에 왔어.”
    “어디에 묵지?”
    “민박하는 셈이야.  같이 온 사장님의 누님 되시는 분이 여기 사시는데 그 집에 묵고 있는 거야.  경비 절감의 차원이랄까, 그런 거야.”
    “눈치 보이겠구나?”
    “사실은 그래서 행동이 자유스럽지가 못해.”
    김선희는 단념하기로 했다.
    “내일은 어떠니?”
    “내일은 가능할 수 있을 거야.  오늘 들어가서 사장님의 허락을 미리 받아놓겠어.”
    김선희는 핸드백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서 자기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백시현에게 내밀었다.
    “내일 나한테 전화해.  그리고 너 묵고 있는 집 전화번호도 하나 적어줘.”
    김선희는 아쉬웠지만 단념하기로 하고 백시현이 적어주는 전화번호를 받아 들었다.
    “그럼 이 번호는 그 사장님의 누님 집이겠구나?”
    “응.  미안해.”
    백시현이 몹시 미안스런 얼굴로 김선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알았어.”
    커피숍에는 꽤 부산하게 손님이 들락거렸다.  둘 밖에 없는 웨이트레스들은 쉴 새 없이 바쁘게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김선희는 계산서를 기다리다말고 핸드백에서 이십 불짜리 지폐를 하나 뽑아들고 일어났다.
    “잠깐 앉아 있어.  계산 끝내고 올 테니까.”
    “그래.”
    대답하는 백시현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서 김선희는 그전에는 못 보던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카운터에 가서 찻값을 내고 온 김선희는 탁자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주차장까지 같이 걸어 나온 둘은 작별했다.
    “틀림없이 내일 오전 중에 전화해야 돼.  알았지?  만약 전화가 안 오면 내가 할 거야.”
    “알았어.  전화할게.”
    백시현은 뭔지 어색해하며 손을 들어 보이고 사라져 버렸다.
    김선희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실내 거울을 끌어내려 거기 비친 자기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시현의 눈에는 오래간만에 보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쇼핑센터 건물을 빠져나온 김선희는 옆 좌석에 던져 놓았던 핸드백을 무심히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핸드백이 홀쭉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운전을 계속하다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핸드백의 잠금 단추를 열고 손을 넣어 보았다.  계모임에서 나올 때 누런 종이에 싸서 넣어두었던 큰 뭉치의 현금은 거기 없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김선희는 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다시 한번 손을 핸드백 속으로 넣어 더듬어 보았다.  역시 없었다.  김선희는 뛰는 가슴을 누르고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차의 속력을 줄이고 마침 가까운 곳에 있던 텅 빈 은행 주차장에 들어가서 정차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아까 백시현이 적어준 전화번호를 돌렸다.  잠시 기다리자 전화 회사의 녹음해 놓은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THE NUMBER YOU HAVE DIALED IS NOT IN SERVICE.  PLEASE CHECK THE NUMBER AND DIAL AGAIN. (지금 돌리신 번호는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번호를 확인하시고 다시 돌리시기 바랍니다.)”

    김선희는 운전대에 두 손을 올려놓고 그 위에 턱을 고이고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 도시의 시커먼 밤하늘을 오랫동안 그저 멀거니 응시하고 있었다.



이 글은 “글마루” 2004 년 호 통권 12 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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