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200 자 X 11 매)

2005.05.23 05:13

김영문 조회 수:775 추천:120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200 자 X 11 매)

    녀석의 더럽고 비좁은 하숙방 안에서 녀석과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끙끙거리며 머리를 짜내어 호소문을 쓰고 있었다.
    “화끈하게 써내서 반응이 괜찮고 희사금이 좀 예정한대로 들어와만 준다면 너한테도 후한 선심을 베풀 테니까 심금이 울리게 잘 써보란 말이야.  알았지?”
    녀석은 그러더니 벌거벗은 남녀 둘이 붙어서 헐떡거리며 돌아가는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꽂고 감상하며 길게 누워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백지 위에 펜을 굴렸다.

    “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이 편지를 받아보실 때쯤에는 제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살아온 지난 28 년간의 길지도 않았던 인생을 되돌아보며 비장한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유학 비자로 미국에 들어왔지만 여러 가지 여의치 못한 사정 때문에 학교 등록은 못하고 나름대로 시급한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비자 유효 기간도 지나고 지금은 전혀 제 개인의 의사와는 상반되게 불법 체류자가 되었습니다.  요새 테러 사건 이후 경찰, 이민국 등의 검색이 심해지면서 이제는 밖에 나가 다니기도 불안한 실정입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다는 말대로 제 운전 면허증도 두 달 전에 유효 기간이 지나서 지금은 무면허에 보험마저 없이 운전을 하고 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제가 지금 배달부로 일하고 있는 중국집 주인이 알게 된다면 저는 그 알량한 직업마저도 당장 쫓겨나게 될 것이 뻔한 노릇입니다.  약 6 개월 전에 어느 백화점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교제를 시작했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주 잘 나가면서 관계가 무르익어가던 중 이 여자가 어느 날 저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해서 신세한탄을 들었습니다.  유학 비자로 미국에 와서 학교는 구경도 못해보고 온갖 잡일을 하면서 살다가 비자 만료 기간이 지나서 불체자가 되었다는 등 기막히게도 내 신세와 너무나도 똑같았습니다.  나는 동병상련하는 마음으로 사실은 내가 시민권자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고 나도 마찬가지로 불체자라고 토로해버리고 이제 진심으로 고통을 같이 나누면서 또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이후에는 이 여자를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잘 받던 이동 전화 번호도 바뀌고 마치 땅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종적을 감춰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나는 유일하게 마음과 몸의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상대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빈 털털이가 되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필시 기다리는 것은 여기서보다도 더 격심한 생존경쟁의 전투장일 것입니다.  이제 옴치고 뛰지도 못할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 저는 더럽고 비겁하게 연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존심을 지키면서 장렬하게 자결하여 이 세상을 하직하고자 결심하게 됐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제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한심한 노릇입니다.  혹시 이 젊은이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셔서 자살을 미연에 방지하고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독지가는 안 계신지요?  온정을 베푸신 분에게는 제가 오래 오래 살면서 그 은혜를 수십 배, 수백 배로 갚겠습니다.”

    여기 까지 써놓고 나는 숨을 들이쉬고 허리를 편 후 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런데 녀석은 떫은 얼굴이다.
    “야, 너 글 써봤다는 놈이 그렇게 밖에 쓸 수 없냐?  소주까지 두 병이나 사다 바치면서 초빙을 해왔는데 그거 영 감동적이지가 않단 말이야, 빌어먹을.  뭔가 가슴에 와 닿게 써야 결과가 나올 꺼 아니냐, 결과가!”
    녀석은 여엉 맘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에게 바치겠다던 소주를 나꿔채 듯 들어서 병째 입으로 가져갔다.

김   영   문 / YOUNG MOON KIM (0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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