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다, 새벽이다" (200 자 X 90 매)

2005.05.23 05:15

김영문 조회 수:1140 추천:115

                        “새벽이다, 새벽이다!”

(200 자 X  90 매)

    나는 혹간 가다 하나씩 둘씩 들어오던 동네 사람들마저 모두 빠져나가고 쥐죽은 듯 조용해진 마켓의 진열대 사이를 태연을 가장하며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방탄유리로 무장되어있는 현금 카운터로 다가갔다.  
    이따금 밖에서 소름끼치도록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마다 닫아 잠가 놓은 문짝이 덜컹거렸다.  
    이 것 저 것 상품들을 정리하는 척 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눈 모퉁이로 저쪽 진열대 뒤로 숨어들어간 그림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방금 전 문을 잠그고 돌아서다가 불현듯 눈 안에 들어왔던 그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만약 사람이었다면 지금 표독스런 눈으로 진열대 틈바구니를 통해서 나를 쏘아보며 공격의 적기를 노리고 있으리라.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매장과 완전히 격리된 현금 카운터는 7 년 전 아내가 흑인 갱단의 습격으로 가게 안에서 두 발의 총을 맞고 쓰러져 죽은 후 큰 돈을 들여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삼 메타 앞의 지근거리에서 권총으로 사격을 해도 꿈쩍없다는 것을 시범장에서 확인하고 공사를 시작했었다.  출입구에 장착되어 있는 문도 겉에는 나무가 붙어 있어서 보통 문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철갑으로 무장된 특수 제품이었다.  이렇게 결사적으로 가게를 사수하고자 하는 나를 주위 사람들은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면서 말했다.  
    “그렇게 까지 할 필요 뭐 있습니까?  돈도 넉넉히 거두셨겠다, 아, 이제 그만 팔아버리고 좀 더 안전한 지역에 가서 편안하게 사시지요.”  
    지금이라도 녀석이 숨어있던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와 관자놀이에 총구멍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현금 카운터 앞에 당도하자 얼른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마치 뒤따라오던 놈을 따돌리려는 듯 서둘러서 문을 닫아걸었다.  문의 상단과 하단에 장치되어 있는 보조 잠금쇠도 모두 빗장 지르듯 잠가 버렸다.  그리고 금전 등록기 밑에 있는 카운터의 서랍을 소리 안 나게 열고 45 구경 리벌버 권총을 빼어 들었다.  
    돈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요.  내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말이요.  아시겠소?
    소리를 죽이며 나는 리벌버의 약실을 열고 그 속에 들어있는 실탄 여섯 발을 확인하고 다시 닫았다.  노리쇠를 가만히 뒤로 제꼈다.  
    딸깍!  금속성의 노리쇠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이 총은 총신이 오 인치 반이나 되므로 정확도가 뛰어나.  멀리 있는 목표물도 조준된 대로 어김없이 명중시키는 믿을 수 있는 놈이야.”
    배가 엄청나게 나오고 더러운 수염을 가진 다운타운의 중고 총포상 주인은 능숙한 솜씨로 리벌버를 다루며 설명했었다.  
    이게 얼마나 믿을 수 있는 무기인지 곧 확인이 될 테지.
    나는 여분의 총알이 24 개 들어있는 작은 상자도 하나 집어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크기에 비해서 뜻밖에 무거운 총알 상자는 손끝을 통해서 나에게 튕길 듯 팽팽한 긴장감을 전해 주었다.  나는 매장의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희끄무레하게 죽어있던 마켓 매장은 오래된 형광등 불빛이 껌뻑거리다가 뿌우옇게 살아나오자 다소 밝아졌다.  나는 현금 카운터 안쪽의 불을 꺼버려서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만든 후 내 눈 닿는 모든 곳을 이 잡듯 차곡차곡 훑어내기 시작했다.  리벌버를 든 오른쪽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만약 업소에 도둑이 들어서 총기를 쓰게 되면 도둑이 가게 안에 있을 때 쏴야해.”  
    큐바에서 이민 왔다는 그 배불뚝이 총포상 주인은 서부 영화의 총잡이처럼 권총을 손가락 끝에 걸고 두어 바퀴씩 돌리며 말했다.  
    “총을 맞고 기어나가면 끌어서라도 가게 안에 갖다 놓고 안에서 죽게 해.  절대 뒤통수에 총을 쏴서는 안 돼.  여기 돈 있다.  아이 해브 머니 훠 유.  크게 소리 질러서 도둑이 뒤를 돌아보게 되면 이 때 정면에서 이마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법정에 섰을 때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거든.”  
    나는 내 시선 끝으로 가게 안을 샅샅이 더듬어내며 기다렸다.
    삼십 초.
    일 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분.
    삼 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럴 때 아들 원영이가 옆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든든할까.
    더 기다려 보았다.  없다.  아까 본 그림자는 허깨비였던 모양인가?  
    웅웅거리는 히터의 기계음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나는 그 그림자를 마지막 본 장소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왼 손을 뻗어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었다.  아까 라디오를 끌 때처럼 아나운서는 아직도 사나운 날씨와 폭설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눈으로 ..... 이미 도시의 일부에는 교통이 마비되었고 ..... 예보에 의할 것 같으면 오늘 밤새도록 눈이 내려서 지역에 따라서는 약 3 피트 정도의 적설량이 ..... 경찰의 기동력이 마비되므로 이것을 이용한 도둑들이 약탈과 파괴를 일삼게 되고 ..... 응급차량 또한 기동이 불가능하고 ....”
    아무리해도 영어가 내 언어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귀에 아나운스먼트가 불완전하게 들어왔다.  이미 전에 한번 경험했듯이 폭설과 사나운 날씨가 오늘 밤 이 도시를 또 한 번 야만의 무정부 상태로 만들 모양이다.    
    오랫동안 노려보고 있었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매장으로 나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잠금쇠를 빼고 문을 열고 방탄유리 밖의 매장 불빛 속으로 나는 조용히 빨려 들어갔다.  묵직한 리벌버를 든 오른 팔을 반쯤 늘어뜨리고 천천히 주위를 경계하며 나는 아까 그림자가 숨어 들어간 진열대로 다가갔다.  숨죽이고 벽에 붙어 있던 녀석이 뒤에서 번개처럼 달려들어 내 뒤통수를 내려칠 거라는 환상에 나는 두어 걸음마다 한 번씩 튀어 나올 것 같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멀찌감치 원을 그리며 돌아들어가서 본 진열대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긴장했던 숨을 후욱 내쉬며 팔을 내리고 허리를 폈다.  아내가 죽은 후 혼자 사는 데에는 이력이 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역시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현금 카운터 방탄유리 위에 걸려있는 둥근 벽시계가 오후 4 시 5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에 뒤숭숭해하던 사람들은 일찌감치 서둘러서 귀가하고 이곳은 유령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지겠지.  폭설에 뒤덮인 도로에는 교통이 차단되고 경찰이 기동력을 상실하게 되면 인근의 범법자들은 마음 놓고 상점마다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시작할 것이다.
    “이미 많은 도로의 교통은 봉쇄되고 경찰서와 소방서는 비상근무에 ..... 눈은 오늘 밤새도록 내리다가 내일 새벽녘이 되어야 비로소 ..... ”
    원영이가 있었더라면.  나는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늙어가고 있는 모양이군.  그따위 생각이 다 들다니 말이야.  갑자기 아내가 죽을 때 그 처절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피투성이가 되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나는 찢어지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여보!  정신 차려!  아내의 가쁜 숨소리는 순식간에 쇠약해져갔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시뻘건 피 덩어리를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떨리는 손으로 눌러 막으려고 애썼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아내의 눈이 갑자기 초점을 잃고 고개가 마치 고무로 만든 물체인 것처럼 툭 떨어질 때 모든 것은 정지했다.  진공 속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난 후, 상당히 큰 매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아내가 쓰러져 죽은 그 자리에는 넉넉하게 여분을 남기고 화초와 싱싱한 꽃을 항상 만개시켰다.  지난 7 년 동안을.  문명과는 동떨어진 미국의 외지, 풍요 속의 빈곤 지역, 흑인 노예의 후예들이 사는 저주받은 땅이지만 여기에도 인정이 있다.  이따금 아무 말 없이 와서 꽃 한 송이 놓고 돌아서다가 문득 부딪치는 동네 흑인 노인들의 그 투박한 눈빛에 나는 이 가게를 떠날 수 없다고 다짐하곤 한다.  이것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노력하고는 다른 것이다.

    그렇게 아내가 죽고 미처 2 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밤새도록 지금처럼 폭설이 내리고 시가지의 교통과 함께 문명이 갑자기 정지되어 버린 때가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내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가게 걱정으로 한 시도 눈을 못 붙이고 지새다가 차량 통행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가게에 나왔었다.  모든 문들은 파괴되어 환하게 열려있었다.  그 꽤 큰 매장은 처참할 정도로 난도질되고 유린당하여 값 나갈만한 상품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새도록 여러 차례 오가며 털어간 모양이었다.  아무의 주의도 끌지 못하면서 비상벨은 그 때 까지도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불끈 쥔 주먹이 분노에 떨렸다.  
    “아버지, 이따위 가게 팔아치우고 딴 데 가서 좀 더 안전한 장사를 하세요.”
    출근길에 말쑥한 신사복 차림으로 들렸던 아들 원영이가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법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면허 시험에 합격한 후 주류 사회의 명성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뽐 낸지 일 년 정도 되어가는 때였다.
    나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이 녀석아, 이 가게에서 우리가 이렇게 일하면서 너를 대학에 보냈고 그 덕에 네가 변호사가 된 거야.  그리고 여기서 네 에미가 죽었다.  이 가게는 나의 분신이고 너의 오늘이 있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너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아는 거냐?
    “늦었는데 어서 출근해 보거라.  이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애써 감정을 감추고 침착하게 말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새로 산 반짝거리는 승용차로 걸어가는 그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동네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가게로 모여들었다.  오, 마이 갓!  후 디드 디스!  아이 엠 쏘리!  아이 엠 쏘리 투 씨 디스!  동네 사람들이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면서 위로했다.  항상 가게에 나와서 소일하던 쌘디 할머니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이런 신고가 이미 여러 건 들어와 있어서 경찰이 나와서 조서를 꾸미는 데에만 3 일이 걸렸다.  동네 거주자 중에는 갱단 멤버로 있는 십대가 몇 명 있었는데 그 후 이들이 두 달 남짓 내가 팔던 것과 같은 물건을 여러 곳에 헐값으로 암매했다는 사실을 흘려듣긴 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아무데에서도 찾아지지 않았고 그 일은 그래서 그냥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다음에 또 폭설이 내려서 교통이 차단된다면 나는 가게에서 밤샘을 하리라.  또 그런 녀석들이 문을 부수고 침입해 들어온다면 나는 숨죽이고 조용히 있다가 다가가서 말한다.  아이 해브 머니 훠 유.  놀라서 돌아볼 때 나는 이마에 총을 쏘아서 사살한다.  한 번은 당할 수 있지만 똑같은 일로 두 번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녀석이 죽기 전에 분명히 확인시킨다.  

    차를 가진 사람이 도무지 몇 되지 않는 오지의 흑인 동네.  불빛이 환한 도회지의 다운타운이 불과 5 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 있지만 이 곳이 미국의 한 부분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그런 곳 한 가운데에 유일하게 서 있는 이 마켓은 동네 생활의 중심점이었다.  마켓 밖 나무 그늘에 만들어 놓은 통나무 벤치와 테이블에는 항상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던가 아니면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 녀석을 취직시킬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유치원에 다닐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재잘거리며 어른들의 시름 아랑곳없이 한없이 즐거운 모습으로 깡총거리고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이 나의 마켓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정부에서 나오는 극빈자 보조금 후드 스탬프가 떨어지면 나에게 와서 빵을 외상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아기에게 먹일 우유나 이유식도 외상으로 조달해 가곤 했다.  교통편이 없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 마켓이 유일한 생필품 조달의 수단이었고 그들은 나를 필요로 했다.  젊었을 때 다른 여자와 쎄인트 루이스로 달아나버린 남편의 이야기를 하다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쌘디 할머니.  수도 없이 여러 번 들었지만 나는 이제 80 줄에 들어선 이 쌘디 할머니의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할 때마다 듣고 또 들어주었다.  15 년 전인가, 뚝딱거리며 서툴게 진열대를 만들고 떨어진 문짝을 고치고 가게를 열었을 때 마악 해산한 아들을 안고 들어와 자랑하던 엘리자베쓰.  그 갓난아기는 이제 키가 7 피트가 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도회지로 이사 가서 살면서 이따금 엘리자베쓰와 함께 가게로 놀러오곤 했다.  학교의 농구 팀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면서 이제 곧 유명해지면 돈을 벌어서 내 가게를 더 크고 멋지게 고쳐주겠다고 진지한 눈으로 약속했었다.
    아침에는 거의 언제나 나보다 먼저 출근해서 가게 앞의 마당을 청소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던 죠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지지 않던 그가 뜨문뜨문 늦게 나오기도 하더니 또 전연 나오지 않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이웃 사람이 가게에 와서 그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그 때 죠지와 함께 가게 앞의 벤치에 하루 종일 앉아서 잡담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소일하던 대부분의 할아버지들은 이제 모두 가고 없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관절염과 신경통으로 거동하기가 힘들어지고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지 오래 되었다.  
    “여보, 당신도 이제 나이 들어가는데 몸조심해야 해요.”  
    알뜰살뜰하게 먹을 것 챙겨주고 추운 겨울에는 잘 세탁하여 여름 내내 좀약을 넣고 보관해 두었다가 꺼낸 두툼한 코트를 내게 입혀주던 나의 아내도 또 가고 없다.  현금 카운터 뒷벽에 걸어놓은 화사하게 웃는 모습의 아내 사진도 흐르는 세월 따라 퇴색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 이 버림받은 동네에서 나는 내 인생의 작은 역사를 써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들 원영이나 내 주위의 누가 무어라고 생각을 하던, 무어라고 말하던, 나는 이곳을 그렇게 수월히 훌훌 털고 떠나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설혹 피부색은 달라도, 인종은 달라도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이제 그렇게 호락호락 잘라낼 수 없는 정이 싹터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두꺼운 반투명 유리로 씌우고 쇠창살로 보강되어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창문 밖의 빛이 사라지고 어두워진지 오래되었다.  단단히 잠그고 거듭 확인해 놓은 문들이 이따금 덜커덩거리며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나는 리벌버 권총을 손닿기 쉬운 곳에 놓고 간이침대에 누워서 팔베개를 했다.      전기로 작동되는 히터가 웅웅거리면서 훈훈한 공기를 쏟아내고 있어서 현금 카운터 안은 쾌적했다.  잠시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하의 혹한 속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아련히 들려왔다.
    벚꽃은 자유분방하게 커온 사춘기의 소녀처럼 아낄 줄 모르며 피었다가 눈이 어지럽도록 마지막 춤을 추며 허공 속으로 무수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마악 세 살을 넘어선 원영이는 팔을 벌리고 소리 지르며 떨어지는 꽃을 잡으려고 숨 가쁘게 뛰어 다녔다.  아내도 아끼다가 오랜 만에 꺼내 입은 하얀 원피스 자락을 날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가난했지만 우리는 젊었고 우리의 앞에는 무궁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미국으로의 이민을 며칠 앞두고 한 마지막 나들이였다.  
    “성경씨, 사랑해요.  나는 지금 너무 너무 행복해요.”  
    나를 보는 아내의 눈에 사랑이 가득한 것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선희.  나도 사랑해.  우리는 미국에 가서 잘 살 수 있어.  거기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의 문이 열린다지 않아?  우리는 열심히 일할 거야.”  
    나의 팔을 잡은 아내의 손에 힘이 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 어깨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뺨에 와 닿는 봄바람을 따라 또 한 무리의 벚꽃이 마치 환희의 갈채를 보내는 것처럼 춤추며 떨어져 내렸다.  
    꽝!  꽈광!
    고막을 찢어내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한 개 있는 창문으로 대낮보다도 더 환한 섬광이 밤의 어둠을 찢고 번쩍 사위를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주위는 갑자기 칠흑같이 캄캄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벌떡 뛰어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리벌버 권총을 집어 들었다.  잠시 서 있던 나는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고 느꼈다.  어쩔까 망설이다 나는 아까 권총이 들어있던 서랍을 더듬어 찾아서 열고 손전등을 꺼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는 손전등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불이 밝혀졌다.  혹시나 해서 벽의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올려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맞아.  라디오 소리가 없어진 것이야.   웅웅거리던 히터 소리도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카운터 위에 있는 전화기에 늘 들어와 있던 초록색의 작은 불도 꺼지고 없었다.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먹통이었다.  전기 스위치 박스와 그 옆의 전화 터미널을 확인했다.  그 쪽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다른 데서 전기가 합선된 모양이다.  화재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는 현금 카운터의 잠금 장치를 풀고 묵직한 문을 열어 매장으로 나갔다.  내 손에 들려있는 손전등 불 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떠서 내 손길 따라 춤추고 있는 불빛을 의지하고 나는 입구로 가서 숨죽이고 밖의 기척을 살폈다.  휘몰아치는 칼날 같은 바람 소리만 소름이 오싹 돋도록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잠금쇠를 풀고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조그만 틈이 생기자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바람과 눈보라가 쏟아져 들어왔다.  터지듯 폭풍 소리도 커졌다.  
    마켓 앞의 공터 건너 쪽에 있는 전봇대 위의 변압기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불길이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며 작아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거리의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서 깜빡거렸다.  거기까지 전기가 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문을 닫아걸었다.  손전등의 불빛에 의지하며 현금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또 문을 잠갔다.  변압기가 타버렸으니까 오늘 밤 안으로 전기가 다시 들어오기는 틀린 일이다.  
    나는 간이침대에 아까처럼 길게 누워 한 장 있는 얇은 담요를 덮었다.
    저쪽 카운터 끝에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탁상시계가 야광의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외로운 빛은 2 시 4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 시 40 분.  세 시간쯤 지나면 날이 밝을 것이다.
    나는 손전등의 스위치를 꺼서 카운터 위에 세워 놓았다.  칠흑같이 캄캄해졌다.  탁상시계가 만들어내고 있는 가냘픈 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나는 시간이 빨리 가주기를 바랐다.  
    원영이 녀석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몹시 기뻤다.  
    “그래, 언제쯤 내게 인사를 시킬 참이냐?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사귀고 있는 거냐?”  
    “글쎄요, 좀 기다려보세요, 아버지.  아직은 그렇게 심각한 사이가 아니에요.  아직 결혼을 얘기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성질의 일이니까요.”  
    나는 녀석의 그 마지막 말 한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 일이 자기가 결정할 성질의 일이라는 말이지?
    그 이후 나는 이 건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녀석도 언급이 없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있는 녀석에게 걸 맞는 그런 여자일 텐데 흑인 동네에서 마켓이나 하고 있는 나는 그런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따돌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괘씸한 녀석.  자식도 소용이 없는 것이라더니 맞는 말인 모양이다.  불쌍한 아내만 그렇게 몸이 부서져라 일하다가 총을 맞고 가버렸다.  그렇게 엄청나게 큰 희생 속에서 키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이제 다 컸다고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성질의 일이란 말이지?  온 몸에 한기가 느껴져 왔다.
    탁상시계의 야광 문자판에서 가물거리는 애처로운 초록색의 빛이 마치 허공에 두둥실 떠서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끓어올랐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다시 아까처럼 간이침대에 길게 누워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나는 또 잠을 청했다.  바깥의 사납던 바람소리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다소 가라앉은 것 같았다.  일기예보는 새벽녘에 태풍도 눈도 멎을 거라고 했다.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빨리 새벽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그렇게 죽은 후 장례 예배를 보는 날 그 흑인 빈민촌의 작은 교회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이 동네 사람들이 가득 참석해 주었다.  모두 진심으로 울며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표했다.  쌘디 할머니도 죠지 할아버지도 모두 깨끗한 옷을 단정하게 입고 나와서 흐느끼며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지켜보았다.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보, 잘 가오.  내가 못나서 그 동안 더 잘해주지 못한 것 미안하오.  고생만 시키다가 이렇게 보내게 되었소.  
보스턴 대학 기숙사에서 급히 돌아온 원영이가 옆자리에 담담히 앉아서 흑인 목사님의 영결사를 듣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씩은 꼭 가게에 들러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과 쾌활하게 잡담을 하기도 하던 목사님도 영결사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두말없이 빵을 주고 항상 환하게 웃으며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시던 써니를 우리는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 먼데 있는 나라 코리아에서 와서 저희의 친구가 된 써니를 우리는 오늘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써니가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어 이제 고통도 번민도 빈곤도 없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와 늘 함께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흑인 목사님의 떨리는 목소리를 회중은 이따금 숨죽인 흐느낌 소리를 내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아내는 마틴 루터 킹 메모리얼 파크의 조그마한 땅을 차지하고 묻혔다.  항상 헌신적이고 남편 걱정 아들 걱정만 해주면서 살던 아내는 남편의 그늘에서, 아들의 뒤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내세워보지 않고 살다가 그렇게 그 삶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나흘 동안을 닫아 두었던 가게에 장례식 이후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그 문 앞에 동네 사람들이 수북하게 갖다 쌓아 놓은 온갖 색깔의 꽃과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 십자가를 보고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몇 달 동안을 나는 내 아내가 내 곁을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고집스럽도록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내 곁에서 아내가 차지하고 있던 그 공간에는 아직도 아내의 체온이, 아내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내는 집에도 있었고 가게에도 있었고 운전할 때에는 내 옆에 같이 타고 있었다.  여보, 늦었는데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하고 돌아서다가 나는 문득 아내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아내를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아무리 안타깝게 노력을 해도 나의 가슴 속에서는 삶의 의지와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견디지 못해서 뒤척이다가 나는 얕은 잠에서 다시 깨어났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콧등이 시릴 정도의 냉기가 감돌았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를 내던 바깥의 태풍 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따고 멎어 있었다.
    4 시 10 분.
    나는 손전등을 켜서 탁자 위에 세워 놓았다.  천정으로 향한 빛의 기둥이 주위의 어둠과 대조되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나는 한기에 뻣뻣해진 몸을 간이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우두둑.  나이 따라 메마른 관절에서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통증이 전해져왔다.      히터가 작동을 멈춘 지 불과 한 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실내가 이렇게 추워지다니.  나는 추위에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일부러 크게 굽히고 펴며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온도가 내려간다면 앞으로 한 시간쯤 후에는 이 마켓 안이 냉장고처럼 차가워져서 사람 하나 얼어 죽는 것쯤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은근히 두려워졌다.  마켓 입구 쪽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바비큐용 챠코울을 생각했다.  저엉 못 견디게 추워지면 양철 쓰레기통 아래쪽 옆구리에다가 여러 개 구멍을 뚫고 챠코울을 넣고 불을 지핀다.  일산화탄소 가스의 독성만 조심한다면 일단 그것으로 새벽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뭐 더 덮거나 입을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지만 그럴만한 것이 없었다.  멍청한 짓.  이렇게 준비성이 없었다니.  이런 때 집에 얼마든지 뒹굴어 다니는 두툼한 담요 한 장이라도 여기에 있었다면 얼마나 요긴하게 쓸 수 있었을까.  나는 차갑게 얼어들어가는 손을 입김으로 후우 불고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던 장갑을 꺼내서 끼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멈칫 서며 튀길 듯 긴장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조용해진 바깥에서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으며 귀를 곤두세웠다.  천정으로 향한 손전등 불빛의 기둥 아래서 희끄무레 빛을 반사하고 있는 리벌버 권총을 나는 눈으로 확인했다.  
    삼십 초.  
    일 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뽀드득.
    아니!  잘못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건 분명히 인기척이다.  사람이 내는 소리다.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오른 손에서 장갑을 뽑아내고 리벌버 권총을 집어 들었다.  권총의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가운 금속성이 손바닥을 통해서 온몸으로 시리게 전해져왔다.  
    뽀드득.
    뽀드득.
    눈 위의 발소리는 아까 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이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소리 안 나게 현금 카운터의 문을 열고 나와 조심스럽게 매장 입구로 다가갔다.  불빛을 의지하며 앞에 놓여있는 통로를 확인한 후 손전등을 껐다.  다시 캄캄해진 속에서 나는 방금 확인한 통로를 기억에 따라 조심조심 발을 옮겨놓았다.  저쪽 끝에 있는 창문에 희미하게 새벽빛이 걸려있다고 느껴졌다.
    여기 돈 있다.  아이 해브 머니 훠 유.
    나는 입 속으로 도둑놈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듣게 될 대사를 연습했다.  
    아이 해브 머니 훠 유.
    뽀드득.
    도둑은 문 바로 바깥에 있었다.  나는 문 뒤에 도사리고 숨을 죽였다.  
    부셔라.  부시고 들어와라.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
    닫힌 문 저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우뚝 멈춰 서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
    “아버지.  저에요.  원영이에요.”
    원영이?  
    나는 추워서 와들거리던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원영이의 목소리였다.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의 노리쇠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나는 서둘러서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원영이냐?  원영이란 말이지?”
    “아버지.  네.  저에요.  괜찮으세요?”
    나는 황망히 손전등의 불을 켜고 거추장스럽게 세 개 씩이나 있는 문의 안전 잠금 장치를 모두 풀었다.  웬일인지 두 손이 몹시 떨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찌르는 듯 혹독한 추위와 함께 거기 서 있는 원영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는 눈이 무릎 정도 쌓여서 희끄무레 빛나고 있었다.  이제 곧 새벽이다.
    “아버지.”
    나는 녀석의 어깨를 싸잡고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 위험한 데를 어쩌려고 혼자서 온다는 말이냐?  더구나 이렇게 추운 밤에.”
    나는 성급히 문을 닫아걸고 녀석을 향해서 돌아섰다.
    원영이는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나를 보며 꽁꽁 얼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집에는 안 계시고 전화도 안 되고 뉴스에서는 이 일대에 전기가 나갔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걱정이 돼서 왔어요.”  
    원영이는 방금 내려놓은 짐을 눈으로 가리켰다.
    “등산용 슬리핑백이에요.”
    나는 갑자기 눈물이 돌아서 황망히 얼굴을 돌렸다.  
    “녀석, 그래도 그렇지.  강도라도 당하면 어쩌겠다는 게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녀석이 이렇게 까지 걱정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속에 훗훗하게 와 닿았다.  마음은 물론 내 꽁꽁 얼었던 몸까지 녹여 주고 있었다.  역시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 이렇게 말을 나눌 수 있으니까 좋다.  더구나 상대가 원영이라니.
    원영이는 손전등 불빛에 을씨년스럽게 드러난 가게를 휘익 둘러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춥네요, 아버지.  어떻게 이걸 견디고 있었어요?”
    “내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이렇게 사는 데에 습관이 되어 있다.  춥기는 네가 더 추워 보이는구나.”
    “네, 추워요.  차가 갈 수 있는데 까지 타고 오다가 주차해 놓고 걸어왔어요.  한 시간 정도 걸었어요.”
    “저런!  큰 일 날 뻔했다.  이렇게 추운 밤에는 잘못하면 길에서 동사할 수도 있는 게다.”
    “네.  사실은 바짝 긴장하고 조심하면서 왔어요.”
    나는 원영이와 합심하여 매장에 있던 챠코울을 꺼내고 쓰레기통을 비워서 공기구멍을 뚫은 후 불을 지폈다.  잘 정제해서 만든 바비큐용 챠코울은 생각보다 연기도 많이 내지 않으며 수월히 빨간 불꽃을 만들어 타올랐다.  냉방 속에 불꽃이 후끈거리며 열기를 뿜어냈다.  
    어디에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온기에 유혹되어 나타났다.  가게 근처를 맴돌며 나처럼 혼자 사는 낯익은 놈이었다.
    “아니, 저 녀석이 가게 안에 있었군, 그래.”
    고양이는 말간 눈으로 나를 보더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초저녁에 진열대 뒤로 숨어들어가서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이 그렇다면 이 고양이 녀석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원영이와 나는 의자를 갖다놓고 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슬리핑백을 뒤집어쓰고 얼었던 몸을 녹였다.  고양이도 태연스레 가까이 와서 당연하다는 듯 따뜻한 곳에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그 놈 까지 합쳐서 갑작스럽게 식구가 세 명이 되었다.  타오르는 챠코울에서 이따금 불길이 오를 때마다 그 빛이 원영이의 잘생긴 얼굴에 반사되어 너울거렸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내 젊었을 때 모습하고 놀랍도록 빼어 박은 데가 있다.  나도 젊었을 때는 꽤 괜찮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었는가.  
    “원영아.”
    나는 원영이를 보다가 조용히 불러 보았다.
    “네, 아버지.”
    “너, 이런 불빛에서 보니까 아주 잘 생겼구나.”
    원영이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은 아버지가 저보다는 훨씬 더 멋쟁이라고 그러던데요.”
    “응?  누가?”
    “혜린이가요.”
    “혜린이?”
    “아버지가 결혼할 거냐고 물어봤던 여자예요.”
    아, 하다말고 나는 잠시 굳어버렸다.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성질의 일이니까요, 했던 그 여자 말이지?
    “그런데 그 혜린인가 하는 여자는 나를 언제 봤지?”
    “먼발치에서 우연히 뵐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멋쟁이라고 그러던?”
    “네.  아버지가 인상이 아주 강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분이래요.”
    굳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있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모양이구나.”
    원영이가 눈모서리로 나를 보더니 싱글거리며 웃었다.
    “얼마간 지나봤는데 진지하고 성실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언제 기회를 만들어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려고 해요.”
    “결혼을 생각하는 사이라는 말이냐?”
    “아버지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럴 생각이 있어요.”
    “이 일은 네가 결정할 성질의 일이라고 그러지 않았니?”
    나는 다소 볼멘 어조를 감출 수 없었다.
    원영이가 잠시 나를 보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두, 참.  아무나 끌고 와서 아버지에게 소개해 드릴 수야 있어요?  결혼을 해도 괜찮은 여자라고 판단하는 데 까지는 내 결정이고 그 이후에 아버지의 재가를 받는 것이 원칙 아니에요?”    이 녀석이 변호사를 한다더니 말을 할 줄은 아는 모양이다.  나는 갑자기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 조금도 춥지가 않았다.
    “녀석, 원칙 좋아한다.”    언뜻 눈이 간 창문에 뿌우옇게 여명이 뿌려져 오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뒤집어쓰고 있던 슬리핑백을 벗어 던졌다.  
    “새벽이 오고 있어.  자, 일어나서 몸을 좀 움직이자.  무척 긴 밤인데 무사히 넘겼다.”
    원영이도 벌떡 일어나서 슬리핑백을 치웠다.  
    “아버지, 내가 하는 대로 해보세요.  운동 전에 하는 준비 체조예요.”
    원영이는 하낫, 둘, 구령까지 붙여가면서 허리 운동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골고루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도 열심히 따라했다.  그러는 사이에 날은 서서히 밝아왔다.
    운동을 끝내고 헐떡거리며 우리는 잠금쇠를 풀고 마켓 입구의 문을 활짝 열었다.  온 천지를 뒤덮으며 새하얗게 쌓인 눈의 바다 위로 지금 마악 터져 나오기 시작한 동녘의 새벽빛이 너무나도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   영   문 / YOUNG MOON KIM   (1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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