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고통의 예술적 승화  

    이 글은 황숙진씨가 2007년 10월 29일 문화 센터에서 있었던 소설 토방에서 발표하신 글의 전문입니다.

    미주문학 가을호 통권 40호에 게재된 두 편의 단편 소설을 읽고
    김영강 “젊은 어머니”
    김영문 “타인의 축제”
        
    아도르노는 예술을 고통의 언어로 정의한다.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상상의 세계이자 허구의 세계인데 이러한 상상력을 야기시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고통이다. 프로이드 주의자 또한 예술은 콤플렉스의 승화로 본다. 개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강인된 상처가 예술 창작의 동인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고통이건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집단과 사회의 고통이건 위대한 예술은 이러한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꽃과 같다. 최근 한국 시인 협회에 의해 한국의 10대 시로 선정된 정지용의 “유리창”은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씌어졌고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실명의 고통 속에서 작곡되었고 스페인 내란에 휩싸인 고국이 처한 고통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낳게 했다.

    2007년 미주 문학 가을 호에 실린 김영강의 “젊은 시어머니”와 김영문의 “타인의 축제” 또한 한 개인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선 김영강의 “젊은 시어머니”는 소설가를 꿈꾸는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와 결혼한 화자인 나의 고통스런 시집살이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흔히 신혼의 여자들이 겪는 평범한 시집살이 스토리가 아니고 남편과 불과 나이가 9살 차이밖에 안 나는 계모와 살면서 느끼는 이상한 시집살이 이야기이다. 화자인 나는 남편의 계모인 시어머니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이러한 고통은 모르고 온종일 서재에 들어박혀 소설 쓰기만 매달린다. 임신하여 공부를 포기한 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남편의 관심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나 아기가 태어나도 집안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밤마다 계속되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근친상간의 상상에 고통을 받는 나는 한국서 어머니가 오자 어머니를 따라 한국으로 잠시 귀국한다. 한국에서의 생활 속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중 남편에게서 소설을 탈고했다는 소식과 함Cp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나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며 빨리 엘에이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 전화를 받고 10시간 후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는 다. 남편이 죽자 나의 고뇌도 함께 끝나고 오직 남편이 남긴 소설만이 신문에 대서특빌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상의 줄거리를 가진 김영강의 이 소설은 소재의 특이성과 남편의 장례식 모습에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 비교적 잘 짜인 구성에도 불구 소설을 읽고 왠지 혼란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술이란 고통의 언어라근 아도르노의 말이나 예술을 숨겨진 욕망을 상상력을 통한 변형으로 보는 프로이드 학파의 이론을 빌어 내 나름대로 소설을 정의하면 소설이란 삶의 고통을 미메시스(mimesis:모의, 모방, 모사)하되 상상력(imagination)이란 효소를 넣어 발효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삶의 고통이 개인적일 경우 그 소설은 내재적인 고통의 승화로 나타나고 삶의 고통이 개인을 떠나 집단이나 사회로 향할 경우 소설은 계몽적이 되거나 (이광수나 톨스토이의 경우) 사회 고발, 참여적인 것 (황석영이나 고리키의 경우)이 된다.
    또한 삶의 고통을 상상력이란 효소를 덜 넣고 있는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드러내려고 할 때 (미메시스:mimesis) 그 소설은 리얼리즘 경향을 띠고 상상력이란 효소를 많이 넣으면 그 소설은 초현실적이거나 환타지(fantasy) 경향으로 나타난다.

    김영강의 “젊은 시어머니”에서 고통은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모호하다. 그것이 실제의 남편과 시어머니의 불륜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화자인 나의 불안한 상상에서 오는 것인지 소설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호성이 소설 속에 나타난 화자의 고통을 독자에게 잘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성은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작가는 젊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화자인 내가 갖는 불안이 어떤 구체적적인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갖는 막연한 불안을 상징하였다고 한다면 그 소재는 너무 구체적이다. 화자인 나는 늘 스스로가 소외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남편의 서재의 문이 잠긴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 것인지 소설 속에서 알 수 없듯이 그런 소외감이 화자 스스로가 만든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이처럼 화자가 사건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점이 작품 전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작품 속에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님을 암시하지만 알 수 없다. 결혼 전 남편과 같은 직장에 다니는 유부녀인 유 선생에게 남편을 빼앗길까 걱정한다.)

    인물의 구성으로 볼 때 화자인 나, 남편 그리고 젊은 시어머니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남편을 가운데 놓고 화자인 나와 젊은 시어머니가 벌이는 삼각관계의 전통적인 연애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다.

    화자인 나 : 주인공이 열 살 때 엄마가 자식이 다섯이나 되는 부잣집으로 재혼하여 눈칫밥을 먹으며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주장함.

    남편 : 미국에서 태어난 2세로서 변호사가 되었으나 포기하고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며 매일 서재에 틀어박혀 글만 씀.

    젊은 시어머니 :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20년이나 나이가 많은 시아버지와 결혼함.

    일반적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경우 착한 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소설의 경우 대부분은 반대로 사랑을 잃거나 “젊은 시어머니”의 경우처럼 사랑하는 자가 죽는 비극으로 끝난다. 놀라운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화자의 계부 등은 모두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남성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남편조차도 시어머니를 하인처럼 대하고 서재에 앉아서 글만 쓰는 모습은 마치 수백 년 전의 조선의 양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로지 남편의 사람을 놓고 시어머니와 경쟁하는 모습은 여성이 스스로의 주체성을 자각하는 현대 페미니즘 계열의 소설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결국 이러한 멜로 소설에서 주인공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대상이 죽는 설정으로 밖에 나타난 수 없는 것이다.

    비극의 심미적 효용은 카타르시스(catharsis)이다. 우리는 비극을 보며 남의 슬픈 이야기를 자신의 것인양 느끼며 동병상린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주인공의 고통이 작품을 통해서 내 모세혈관 깊숙이 파고들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며 찡한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카프카 이후 현대의 마카미 하루키까지 현대소설은 이러한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주려는 감동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오히려 불안을 선택하였다. 후기 산업 사회에서 예술 작품이 독자에게 주려는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더 이상 개인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김영강의 “젊은 시어머니” 또한 독자에게 개인의 고통을 전달하여 공감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혼란과 불안을 준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소설은 현재적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소설에서 나타난 불안과 소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실존적 모습이라면 “젊은 시어머니”에서 화자인 내가 겪는 불안과 소외가 미국에 사는 남편을 따라와 사는 많은 한국 여인들이 겪는 불안과 소외의 한 단면인지 나는 잘 모른다.

    김영문의 “타인의 축제” 또한 한 개인의 ‘사랑과 배신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망한 암 전문 의사인 준영은 어느 날 15년 만에 친구인 철훈으로 부터 준영이 사는 휴스턴으로 온다는 전화를 받는다. 철훈은 준영이 미국으로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귀었던 동창생으로 준영에게는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준 친구이다. 철훈은 그토록 사랑하였던 수연을 빼앗아 가버린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철훈이 어느 날 재산을 다 날리고 폐암 말기 환자가 되어 준영의 도움을 받으러 나타난 것이다. 준영은 그런 철훈을 극진히 보살핀다. 준영과 검도 도장을 같이 다니는 동료 의사인 재크린은 그런 준영을 보며 이것이 동양적인 ‘사랑과 용서’인가? 라고 생각하며 감동받는다. 그런 그녀에게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전남편이 친구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목격한 아픈 상처가 있다. 철훈의 상태가 심각하여 준영은 수연에게 알린다. 어느 날 준영의 집에서 철훈과 수연은 준영에게 과거의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준영은 수연이 결혼 후 자신을 잊지 못했으며 철훈 또한 고통의 세월을 보낸 것을 안다. 그리고 죽어가는 철훈을 보며 모든 것이 과거로 흘러갔고 자신이 이미 그것을 용서했다고 느낀다. 재크린도 준영의 이러한 용서를 보고 자신의 아픈 과거 또한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갖는다.

    이상의 줄거리를 갖는 이 소설은 하나의 장면이 다른 장면과 오버랩되어 넘어가는 회상과 현재가 중첩되며 사건의 진행을 대사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등 소설의 서술 방식에 있어서 영화적 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러한 점이 사랑과 배신과 용서라는 평범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만드는 요인임에 틀림없다. 또한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사랑과 용서’라는 드러난 주제 외에 어떤 삶에 대한 허무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사랑과 배신이라는 모든 인간적인 행위는 너무도 많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아온 암 수술 전문의사인 준영에게 있어서 죽음 앞에 있어 ‘타인의 축제’일 뿐이다. 즉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죽음 앞에서 사랑하고 배신하고 살아가는 인간적인 모습들이 모두 연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준영은 눈짓으로 레지던트 의사 둘 중의 한 명에게 절개 부분을 다시 닫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봉합 과정을 지켜보다가 준영은 수술 장갑을 벗어서 휴지통에 던져 넣고 수술실을 나왔다. 잘 버티면 4 개월. 이제 이 환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넉넉한 분량의 진통제를 계속 몸속으로 흘려 넣어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 뿐이다.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아들, 누군가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 꿈과 이상이 힘차게 날갯짓하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도전하는 인간. 그러나 이제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이 온당한 일인가? 이렇게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어져 버려도 되는가?

    죽음 앞에서 삶이란 지난 일은 훌훌 털고 저마다 자기 몫을 지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이며 말라가는 화초에 물을 주어 새로운 생명과 꽃을 보게 되듯이 결국 누구나 죽는 인간 또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밖에 없고 묵묵히 앞을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앞의 김영강의 “젊은 시어머니”가 개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에 비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고통의 치유와 향유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뚜렷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처럼 작가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의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수법은 계몽주의 소설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에서 많이 사용된 방식이다. 이러한 소설의 장점은 주제를 비교적 선명하게 전달하는 장점이 있으나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독자가 주체적으로 작품을 해석할 권한을 박탈하는 위험이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단편으로서는 너무도 많은 극적인  스토리들을 담고 있어 단편이 갖는 압축과 절제의 미학이 다소 떨어지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사건을 설명하는 장황한 대사들을 차라리 간략한 몇 줄의 개인의 회고 정도로 처리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고통스런 기억의 떨쳐내기이다. 최근 엘에이를 방문한 한국의 인기 작가인 김훈 씨는 강연에서 그가 젊은 날 고민했던 시절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고 받은 충격을 “칼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훗날 직접 작품화할 때 이빨이 8개나 빠지는 고통 속에서 글을 썼다고 고백했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품을 철저히 외면하는 나는 이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소설이 히트한 것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몰린 조국의 현실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IMF 이후 위기감에 휩싸인 우리 국민에게 공감을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좋은 소설이란 그것이 개인의 고통이건 사회와 집단의 고통이건 소설을 통해서 그 고통이 나의 가슴 깊숙이 전달되고 그러한 고통의 간접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가 정화되는 그러한 영혼의 고백이 담긴 소설이다. 이러한 점에서 훌륭한 작가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을 말하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탁월하게 읽어내는 자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고통의 언어라는 아도르노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한 개인의 고통의 기록을 읽음으로써 그 아픔이 나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자칫 일상에 함몰되기 쉬운 나의 나태한 감각을 다시금 예민하게 일깨우는 그러한 고통스런 글들이 몹시 그리워지는 올 가을이다.

황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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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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