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2007.09.27 05:03

김영문 조회 수:894 추천:109

                                 음모


    차에 오를 때 까지는 몰랐는데 문제는 운전대를 잡고 110번 후리웨이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이후에 발생했다. 파티장에서 부하 직원들의 극진한 대우를 즐기며 인생 최고의 정점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거기까지는 좋았다 치자. 그 아첨 끼 있는 부하 직원들이 저마다 지사장님, 제 잔도 한 잔 받아 주십시오, 어쩌고 하는 바람에 이 잔 저 잔 들다 보니까 술이 과했다. 파티가 끝나고 커피 한 잔씩 마시며 술이 깨기를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차에 올랐는데도 운전대를 잡고 보니까 다르다. 눈앞의 시야가 작은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지사장님, 운전대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등등 예쁘게 보이고자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못 이기는척하고 들을 걸 그랬나보다. 뒤늦은 후회를 하며 그는 운전대를 힘주어 붙잡고 온정신을 집중하여 앞에서 계속 달려 들어오는 고속도로를 뚫어질 것처럼 응시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극동 해운에 스카웃되어 입사한지 불과 6년 만에 이사로 승진하여 로스앤젤레스의 최고 책임자로 부임해 온 최인길 지사장은 인생의 정점에 서있었다. 방년 44세.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출세의 가도를 달려온 그는 그러나 항상 사람은 겸손해야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따금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동창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면 거기서도 역시 이 겸손지덕에 대한 말 한 마디는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거, 뭐야, 너 고생 많지? 쪼끄만 리커 스토아 한다구? 거 위험하지 않니? 조심해야지, 조심. 아, 부끄러울 것 없어. 뭐든지 최선을 다하면서 산다는 것이 중요한 거니까. 항상 겸손하게 말이야.”
    거기다 덩달아서 꼭 ‘미세스 초이’라고 불리어지기를 원하는 그 부인도 비슷하게 겸손한 여자였다.
    “네에, 아주 고생이 많지요? 저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힘들게들 산다고 말씀 들었어요. 용기들 내세요,”
    그러고는 눈을 차악 내리깔고 마치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살레 살레 흔들었다. 확실히 성공은 하고 볼 일인 모양이다.
    잠깐 깜빡했나보다. 빠앙하는 경적 소리에 화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걸, 일차 선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차는 언제 삼차 선으로 들어와 있었다.  최인길은 놀라서 운전대를 바로 잡고 머리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옆 차선의 운전수가 차창 안에서 뭔가 고함을 지르고 지나갔다. 얼굴 표정으로 봐서 분명 좋은 소리가 아니었을 테지. 아내 미세스 초이께서 대학 동창회 모임이 겹쳐서 거기를 꼭 가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운전 문제는 해결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최인길 지사장은 술기운과 졸음에 가물가물 자꾸 멀어져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차의 속도를 줄이려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속도는 줄지 않고 차는 계속 무섭게 밤길을 질주해 나갔다.
    이거, 이러다 안 되겠는 걸. 어디 적당한 데서 내려서 부하 직원을 누구건 불러서 대신 운전을 시켜야 되지 않을까. 최인길 지사장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차는 이미 105번 프리웨이와의 교차점을 눈앞에 두고 남쪽으로 씽씽 달리고 있었다. 이제 불과 십여 분만 지나면 집에 도착할 텐데.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고 운전하면 될 일인데 뭘 번거롭게 전화를 해.
    사람 사는 일에는 아주 조그마한 차이로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 때 최인길 지사장의 판단이 그런 경우에 속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내친김에 그냥 운전해서 곧 집에 도착하겠다고 생각한지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기어코 일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최인길 지사장은 아내 미세스 초이에게 전화를 해보기 위해서 윗도리 주머니에 있던 휴대 전화를 꺼냈다. 번호판을 덮고 있던 커버를 제치는 순간, 앗차, 전화는 최인길의 손을 빠져나와 그의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그는 떨어지는 전화를 잡기 위해서 황급히 윗몸을 구부렸다.

    
    목격자들의 진술은 본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대개 아래와 같았다.
    검정색의 신형 렉서스 430은 110번 후리웨이에서 남향하고 있었다. 속도는 대략 시속 70 - 80 마일. 과속이지만 별일 없을 것 같더니 차는 갑자기 기우뚱하고 왼쪽으로 튀어나가 방향을 못 잡다가 머리 위를 지나는 105번 후리웨이의 교각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무서운 굉음과 함께 차는 사방으로 파편을 날리며 고철 더미처럼 파괴되고 말았다. 목격자중의 한 명은 두 번째 차선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충돌이 일어난 후 반쪽으로 잘라진 렉서스의 범퍼 조각이 자기 차 앞으로 날아 들어와 그 것을 피하느라고 자기도 사고가 날 뻔 했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모든 안전장치가 아주 잘 고안되어 만들어진 고급차 렉서스는 다행히도 연료 탱크의 안전장치 때문에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
    11시 42분. 911 센터에 기록된 사고 보고의 첫 번째 전화가 걸려온 시각이다. 그러고 나서 똑같은 사고에 대해서 이십여 건의 전화 신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로부터 3 분 후, 11시 45 분, 두 대의 경찰차가 찢어지는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거의 동시에 현장에 도착했다. 순식간에 도로가 차단되고 뒤이어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도착하여 현장을 수습했다. 번쩍이는 여러 개의 경광등이 현장의 상황을 더욱 긴박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사고 현장은 참혹했다. 콘크리트 교각에 정면으로 뛰어들어 충돌한 렉서스 승용차의 앞부분은 승용차의 뒤쪽 트렁크 부분까지 찌그러져 들어가 그 가운데에 있어야할 운전석과 그 뒤의 승객석은 아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최인길 지사장의 시체는 팔 따로, 다리 따로, 또 몸통 따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그의 머리도 산산조각이 나서 단단한 머리뼈로 쌓여 있던 부분만이 그래도 형체가 좀 남아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하얀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번쩍거리고 있는 경광등 빛이 지나갈 때마다 나타나는 그 머리의 일부분은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하얀 액체를 흘리는 것이 마치 외계에서 온 기묘한 생물인 것처럼 보였다.
    경찰은 후리웨이의 오른쪽에서 사고 차의 파편을 급히 치우고 차선 한 개를 열어서 사고 후 잠깐 사이에 장사진을 치며 정체되어 가는 차량들을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엔가 잽싼 신문사의 사건 취재 기자들이 나타나더니 대낮처럼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쏘아대며 비디오를 찍고 현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대형 사고는 피에 굶주린 늑대와 같은 사건기자들에게는 특종 감이었다.
    그렇게 해서 최인길 지사장의 화려한 성공 신화는 그만 도중에 어이없이 쫑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빌어먹을, 이 새벽에 누가 저렇게 야단스럽게 전화벨을 울려댄대. 잘못 걸려온 전화라면 몇 번 울리다가 제 풀에 멎어버리겠지 했는데 그 망할 놈의 전화는 계속 울리는 꼴이 도무지 저 혼자 멎을 것 같지가 않았다.
    토요일 새벽 5시 10분.  
    김진영은 옆에서 전화벨 소리 정도에는 꿈쩍도 안하고 코까지 골면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마누라를 불만스럽게 보다가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할로. 할로. 여보세요.”
    김진영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다그치듯 급한 목소리가 쳐들어왔다.
    “지사장님, 접니다. 송민석 부장입니다.”
    김진영이 극동 해운의 로스앤젤레스 지사장을 하던 시절 그를 가장 잘 떠받들며 충복으로 일해 왔던 송부장이었다.
    “아니, 송부장, 이 새벽에 웬 일이야?”
    “지사장님, 최인길 지사장님이 어젯밤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뭐야?”
    김진영은 반짝거리는 대머리에 몇 올 남지 않은 머리터럭이 모두 일어나는 것처럼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제 회사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는데 좀 과음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고집스럽게 혼자서 차를 몰고 가겠다고 하더니 110번 후리웨이에서 기어코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사고가 난 거야? 다른 차하고 충돌했나?”
    “아닙니다. 과속으로 달리다가 커브에서 105번 후이웨이의 교각을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한 모양입니다.”
    “저런,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저도 지금 방금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토랜스 메모리얼 병원에 시체가 안치되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송부장. 어서 나가봐. 나중에 또 전화해 줘. 집으로 하지 말고 내 휴대 전화로 하라구. 나도 나갈 준비하고 대기할 테니까.”
    “네, 알았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지는 대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송부장의 다급했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송부장은 전화를 끊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지사장님, 다시 회사로 복귀하셔야 안 되겠습니까.”
    “아니, 뭐라고? 회사로 복귀하다니?”
    김진영이 놀라서 되물었을 때에는 이미 송부장의 전화는 끊어진 후였다. 김진영의 머리로 찡하고 전기가 지나갔다. 회사로 복귀를 한다는 말이지? 그 동안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극동해운의 로스앤젤레스 지사장 자리를 5년이나 무사히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엉뚱한 놈이 나타나서 본의 아닌 퇴진을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김진영의 아랫배에서부터 사실은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분노가 새삼스럽게 치밀고 올라왔다.
    “지사장님, 그 동안 불철주야 회사를 위해서 헌신하셨는데 이제 좀 쉬시면서 여가를 즐기실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최인길이 부임해 와서 김진영에게 번죽거리며 인사하던 때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 때 최인길의 얼굴에 감돌던 그 승리의 미소를 김진영은 쓰라린 마음으로 알알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먼저 일하신 대선배님의 공적에 누가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짜식,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건방지게 선배를 밀어내고 지사장 자리를 차지하더니 결국 그 꼴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얌전하게 근무하고 있었으면 좀 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회사를 그만 둔 후 일 년 동안을 얼마나 괴롭게 살았나. 삼백 명이 넘는 부하 직원들과 함께 권력의 아성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다가 갑자기 퇴직 당하니까 하루하루가 정말 무섭도록 지겨웠다. 더구나 저축했던 돈을 까먹으면서 아내에게 용돈까지 타가는 신세로 전락하자 전에는 남편을 하늘처럼 알던 아내가 구박마저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뭐 자영업을 해보자니 전연 경험 없는 일이고 그러다 몇 푼 받은 퇴직금까지 홀딱 까먹을까 두려워 엄두도 내지 못할 노릇이었다. 이게 모두 그 모진 놈 최인길이 시작한 문제인데 이제 그 원흉은 영원히 없어지고 회사로 복귀한다는 말이지? 이건 김진영이 듣기에는 꿈속처럼 달콤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월요일이 되어 출근한 직원들은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는 듯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술렁거렸다. 회사의 규정에 의해서 지휘권을 자동 승계 받은 백규남 부지사장은 각 부서의 책임자를 모아놓은 회의에서 모든 직원과 함께 동요 없이 평소와 같은 자세로 업무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회의가 끝나고 부서장들이 모두 회의실을 나가자 머무적거리며 뒤에 처져있던 권소백 부장이 백규남의 곁으로 닥아 왔다.
    “끔찍한 일입니다. 지사장님이 그렇게 돌아가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글쎄 말이야. 사람 사는 일을 누가 예측하겠는가마는 그렇게 참혹하게 죽을 줄은 정말 몰랐지.”
    “그러나 죽은 지사장님만을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사세 확장에도 한계가 있고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자꾸 줄어드는데 부 지사장님께서 이번 기회에 그 ‘부’자를 떼어버리고 지사장으로 승진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백 부지사장의 눈치를 보며 권부장이 교활한 눈꼬리를 치뜨고 말했다.
    놀란 백규남이 주위를 잽싸게 훑고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
    “권부장, 무슨 소리야? 남이 들으면 어쩌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
    사실은 백규남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마치 속을 들여다보인 것처럼 느껴져서 그는 필요 이상으로 당황했다.
    “시침 떼실 필요 없습니다. 빨리 행동 하지 않으면 지사장 차례가 딴 사람에게 갈 수도 있습니다. 이미 다른 쪽에서는 본사의 회장실에 전화를 넣고 작전을 시작한 모양이던데요.”
    평소에도 교활하고 엉뚱한 뱃장이 있기로 소문나 있는 권소백 부장이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누가?” 백규남이 놀라서 물었다.
    “김진영 전 지사장님이 회장실로 전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진영 이사님이? 백규남은 옆구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이 느꼈다.
    “권부장은 그런 소리를 누구한테서 들었어?”
    권소백이 빙그레 웃었다.
    “그 정도도 끄나풀을 안 가지고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합니까? 다 아는 길이 있지요.”
    그는 백규남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지사장으로 승진하시는 데에 제가 힘을 쓰겠습니다. 그 대신 저도 승진할 수 있도록 품신을 내주십시오.”
    백규남은 권소백의 스피드감 있는 생각에 아연했다.
    “품신? 권부장은 부장으로 승진한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더구나 또 승진한다면 이번에는 이사가 된다는 얘기인데 그건 쉽지 않아.”
    “지사장 승진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지사장 하고 싶지 않습니까?”
    백규남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답을 안 했지만 그 욕심이 이미 얼굴에 크게 씌어 있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이미 작전을 시작한 김진영인데 본사에서도 호의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규남은 김진영 이사가 복귀를 꿈꾸고 있을 줄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부지사장님이나 나나 다른 직원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기회라도 타지 않으면 승진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김진영씨는 내가 제거해 놓겠습니다. 제 승진 품신만 내주시면 됩니다. 서로 돕자는 것이지요.”
    “승진 품신이 들어갔다고 자동적으로 승진시켜주는 것은 아니야.”
    백규남의 말에 권소백 부장이 싱긋 웃었다.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권소백은 자신만만한 자세로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듯 백규남의 어깨를 툭 쳐주고 밖으로 나갔다.


    최인길 지사장의 시체는 너무 끔찍스럽게 절단되고 훼손되어서 유족들과 상의한 후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유골 단지를 만들어 장례 예배를 치룬 후 한국으로 운구하여 고향의 선친이 묻힌 묘지 옆에 매장될 예정이었다.
    미세스 초이는 장의사에서 영결예배를 보는 동안 한없이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잘 나가던 그 보물 같던 남편이 갑자기 없어져 버렸으니 울만도 했겠지만 이건 너무 펑펑 울어대서 다소 민망할 지경이었다.
    “서구인들이 그렇게 소리 내서 우는 것 보셨어요? 영화 같은 데서도 보면 백인들은 아무리 슬픈 일이 닥쳐도 눈물이 살짝 비칠 정도로만 울지요.  우리 동양인들처럼 소리 내서 난장판 치면서 울지 않지 않아요. 슬퍼하는 것도 얼마나 낭만적이고 멋있게 하는지 몰라요. 우리가 그런 것들을 배워야 해요.”
    평소에 말하던 것하고는 사뭇 다르게 미세스 초이는 장내가 떠나가게 대성통곡을 해댔다.
    아-멘. 장례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자 김진영 이사는 입속으로 우물거렸다. 회사로 복귀할 수 있다는 송부장의 말은 얼마나 가능성이 있을까? 본사 회장실 비서에게 전화해서 이 비통한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가자고 말한 것은 의도한대로 회장님 귀에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초조하고 궁금했다. 괜히 나서서 설치다가 남의 비극을 틈타서 득을 보려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면 어떻게 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이런 일은 옆에서 눈치 있게 다른 사람이 나서서 주선을 해주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식으로 처리되면 좋을 텐데. 송부장이 충성스럽고 믿을 만은 하지만 너무 직선적이고 우직하다. 눈치 있게 헤엄 질을 잘 치면서 여기저기 연락해서 아군도 만들고 입심 있게 설득도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에는 서툴겠다는 걱정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내 일생에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터이다. 마음은 조급한데 딱히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행동지침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송민석 부장쪽으로 눈을 주자 이심전심인지 송부장이 고개를 돌려 김진영을 보았다. 그리고 눈으로 신호를 보내며 고개를 끄떡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그 눈에는 자신이 가득 들어 있어 보인다고 김진영은 생각했다. 김진영도 고개를 끄떡해서 답을 보내고 시선을 돌렸다.
    둘이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그 보다 서너 줄 뒤에 앉아 있는 권소백 부장이 놓치지 않고 훔쳐보고 있었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이 되어 조소를 띄웠다. 아무리 애써 봐도 안 될걸, 그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울다 지친 미세스 초이는 이제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고 목소리도 쉬어서 이따금 꺼이, 꺼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일 년 전에 생명보험을 들 때 고집부리지 말고 세일즈맨이 권하는 대로 백만 불짜리를 들걸, 왜 그렇게 고집을 해서 고작 삼십만 불짜리로 들었는지 후회가 막급했다. 프레미엄 낼 돈이 그렇게 궁색한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백만 불짜리로 하면 큰 손해나 보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지금 바꿔달라고 하면 미쳤다고 그러겠지?


    권소백 부장은 김진영이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때에 사용하던 핸드폰을 지금은 수입과의 수퍼바이저인 미세스 제니퍼 윤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기막히게 잘 된 노릇이다. 회사 전체의 말발로 통하는 수다쟁이 제니퍼의 귀에 무슨 소문이 한 마디만 들어가면 다음 날에는 열 마디로 불어나서 회사 전체가 알게 되니 더 좋은 방송국이 따로 어디에 있겠는가?
    오후 4시 반이 약간 지나자 예정했던 대로 제니퍼의 핸드폰이 울린 모양이다. 서둘러서 전화를 꺼낸 제니퍼가 한참 동안을 전화에 매달려 있는 것이 멀찌감치 앉은 권소백의 책상에서도 보였다. 그는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제니퍼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드디어 전화를 끊은 제니퍼의 얼굴이 흥분되어 있었다. 이야기할 상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잡담하면서 퇴근 시각을 기다리기에 딱 알맞은 오후 4시 45분 아닌가.
    이제 시간만 조금 흘러가면 된다. 권소백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쉬쉬하면서도 모두 쑬렁거리는 분위기가 역력히 느껴졌다.
    “뭔가 이상한데, 무슨 일이야?”
    권소백이 같은 과에 일하는 직원에게 물었다.
    “저, 글쎄요, 소문이 들리는데, .....”
    “무슨 소문?”
    “저, 김진영 전 지사장님께서, 그, .... 제니퍼에게 물어보시죠. 제니퍼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니까.”
    “무슨 전화?” 권소백이 다그쳤다.
    “제가 가서 제니퍼씨를 불러오겠습니다. 직접 듣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으니까요.”
    그 직원은 위기를 모면하려는 듯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니퍼에게 가서 팔을 끌다시피 권소백의 책상으로 데리고 왔다.
    “저, 어제 퇴근할 때쯤 전화를 받았는데요, 김진영 전 지사장님에게 돈을 꿔준 여자인 모양이에요. 전화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도 화가 나서 소리를 막 지르면서 사기꾼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 지사장님이 다시 복직한다고 그랬다면서 언제 복직하느냐고 물었어요. 복직하면 회사에 쳐들어와서 꿔준 돈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받아가겠다고 전하래요.”
    권소백의 놀란 얼굴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진품 명품이었다.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절대 퍼뜨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서 제니퍼를 돌려보낸 권소백은 속으로 다시 한 번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됐어. 말을 퍼뜨리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으니까 아마 그만큼 빨리 퍼지겠지.


    급한 일이라면서 전화가 온지 미처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김진영의 집에 도착한 송민석 부장은 아주 난감한 얼굴로 김진영의 눈치를 살피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한테 못할 말이 뭐가 있는가?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
    “실은, 지사장님, 저, 어디서 돈 꿔 쓴 사실이 있으십니까?”
    “돈을 꿔 써? 누구한테서? 무엇 때문에?”
    “누구한테서 건 돈을 꾸고 안 갚은 사실이 있으신가 하구요.”
    “이 사람아, 내가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돈을 꿔서 어디다 쓰겠나?”
    “없다는 말씀이시죠?”
    “없어. 없다니까. 그런데 왜 그런 건 묻나?”
    송민석은 회사에서 돌아가는 소문을 다 털어놓았다. 듣고 나자 김진영은 흥분하여 얼굴을 붉히며 소리 질렀다.
    “아니, 누가 그따위 소문을 퍼뜨려? 난 아무에게서도 돈을 꿔본 사실이 없어. 더구나 지사장으로 복직하면 갚겠다구? 사람이 죽어 넘어간 이 때 내가 철딱서니 없이 그런 말을 할 것 같은가?”
    송민석 부장은 그제야 비로소 누가 모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큰일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거 문제가 큽니다. 회사 내에 소문이 전부 퍼져 있습니다. 뉴욕 총본부와 한국 본사로 소문이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건 분명 어느 녀석이 더러운 장난을 치고 있는 거야. 내가 복직하게 되면 손해 보는 놈이 누구일지 생각해봐.”
    “글쎄요, 부지사장님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그 분도 지사장 승진을 바라보고 있을 텐데.”
    “부지사장? 백규남이? 그 친구는 내가 데리고 일해 봐서 알지만, 아니야. 진급 욕심이야 있겠지만 그런 루머를 퍼뜨릴 뱃장은 없는 친구야.”
    김진영은 활랑거리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곰곰 생각했다. 사기성 있기로는 권소백 부장이라는 작자가 있기는 한데 이 친구는 김진영을 죽여 보았자 득이 없는 친구다. 그 약삭빠른 놈이 자기에게 아무 이득이 없는 판에 끼어들어 말을 낼 턱이 없다. 그럼 누가?


    괴롭고 괴로우니 한없이 괴로울 것이다. 권소백 부장은 속으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바보 같은 보통 사람들 가지고 놀기가 얼마나 쉬운 노릇인가. 무슨 소문이 들리면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에 비난해도 늦지 않을 텐데 한 번도 그런 정당한 확인 절차를 거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모두 쉬쉬 뒤에서만 수군대면서 아무도 이성적인 검증을 하지 않는다. 감성적 민족성이라더니 참으로 가지고 놀기 좋은 것이 한국 사람인가 보다.
    권소백 부장은 속으로 생각하며 김진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이제 제풀에 떨어져 나가는 것이 확실시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에 대해서 사무실 안에서 돌아가는 여론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점잖은 사람인줄 알았던데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다니, 더구나 지사장님이 그렇게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그 틈새를 끼고 벌써 복직할 생각부터 하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사람이라니, 등등. 말에는 꼬리가 생기고 또 그 꼬리를 물고 다른 말이 생기고, 참,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권소백 부장은 마치 전연 관계없는 사람처럼 뒷전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가관이다. 정말 참 잘도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날 오후 서울 본사의 인사과 전무에게서 백규남에게 전화가 걸려 와서 김진영에 대한 소문을 확인했다. 백규남은 가급적 중립자세에서 예의를 잘 차린 대답만 골라서 했다. 그러나 손해 볼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서는 공격적인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네, 전무님, ...... 아,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 분은 제가 모시고 있던 상사님이신데 ...... 그래도, ...... 네, 그런 이야기가 사무실 안에서 돌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네, 글쎄요, 거의 전부가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네?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턱이 없지 않겠습니까. 네? 아, 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턱이 없다는 거지요. 뭔가 어떤 근거가 있으니까, ..... 그러나 제가 모시고 있던 상사님이셨는데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 네, 알겠습니다. 네, 저는 그저 열심히 직원들을 독려해서 업무 수행에만 힘쓰겠습니다. 네, 네, 그럼.....”
    전화에서 들은 전무의 목소리에는 김진영에 대한 불만을 넘어선 분노감 까지 서려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백규남은 지사장으로의 꿈이 손 안에 더 가까워진 것을 느끼고 뛸 듯이 기뻐했다. 별 것도 아닌 아이디어를 내서 강적을 이렇게 손쉽게 꺾어버린 권소백 부장이 천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일단 지사장 발령이 나면 권소백 같은 녀석하고는 가급적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한다. 평판 나쁜 녀석과 너무 자주 가까이 하다가는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 부딪친 권소백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백규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무, 무슨 소리야?”
    “지사장 내정을 받으셨습니다. 김진영 이사님은 제가 계획한 대로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어제 본사 인사과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사장님 결재만 나면 끝입니다. 아시다시피 인사과에서 전무님 결재가 있었던 사항에 사장님이 결재하지 않은 건이 아직 까지 한 건도 없지 않습니까.”
    꿈같은 소리였다. 내가 지사장이 되다니. 백규남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권부장 수고했어. 권부장이 이렇게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고마워, 권부장.”
    “제 승진 품신만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약속대로 상관으로써 이사 승진 품신만 해주시면 결재가 나게 하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백규남은 깜빡 잊고 있던 품신 약속이 되살아나자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일단 지사장 발령을 받은 후 그 때 가서 어떻게 비벼보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극동 해운 주식회사의 미주 총본부는 뉴욕에 있었다. 거기에서 미주 전역 18곳에 있는 지사를 총괄 관장하고 지휘했다. 총본부장의 직급은 상무였지만 그는 그룹 총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막내아들이었기에 미주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그의 말 한마디는 미주 18곳의 지사에서는 신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거룩한 총본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백규남은 허겁지겁 자기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백규남입니다.”
    “항상 수고가 많습니다. 이번에 더구나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시고 얼마나 놀랐습니까?”
    “감사합니다. 일단은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수습을 하고 있습니다. 본부장님께서도 몹시 놀라셨을 줄 압니다.”
    “물론 놀랐습니다.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 여하튼 백지사장님 축하합니다.”
    “네? 축하요?” 백규남은 총본부장이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을 잡고 하늘로 뛰어오르고 싶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했다. 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려고 전화한 상사에게 아, 그거 이미 알고 있는데요, 할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직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로스앤젤레스 지사의 지사장으로 승진 발령이 났던데요.”
    “네? 총본부장님, 그게 사실입니까?”
    “어젯밤에 제게 전화가 와서 의견을 묻기에 적임자라고 추천했습니다. 아마 곧 정식 발령장을 받게 될 겁니다.”
    “이 부족한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쩌고 하면서 백규남은 가슴이 쩌릿쩌릿하고 목이 메는 소리로 최고의 감동을 담아내려 애쓰며 말했다. 총본부장은 고 최인길 지사장이 화장되어 유골 상자가 한국으로 떠나는 날에 맞추어서 로스앤젤레스 사무실을 방문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백규남은 혼자만 있는 사무실인데도 남이 볼까봐 들을까봐 조심하면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흐흐거리며 웃고 또 웃었다.
    지사장.  흐흐, 내가 지사장이라는 말이다. 알것냐? 내가 지사장이다. 흐흐. 알것냐? 흐흐.


    이 사람은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일신의 영달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앞에 놓고 열심히 일을 해오고 있으며 ..... 등등, ..... 등등. 권소백 부장이 저 나름대로 초안해온 품신서에는 참, 기막히게 좋은 이야기만 모두 들어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충 훑어보고 품신서의 초안을 탁자에 내려놓는 백규남을 권소백이 지켜보았다.
    “그냥 회사 편지지에 전사해서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뒤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권부장, 무슨 근거로 내가 이런 걸 회사 편지지에 써서 내 이름으로 서명하고 본사에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나?”
    “네? 약속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잠깐 사이에 벌써 잊었습니까?”  
    “안 잊었어. 그러나 이런 장광설을 쓰겠다는 약속을 한 기억은 없어. 이건 읽는 사람이 웃게 생겼어.”
    “장광설이요? 사람들이 웃는 다구요?”
    “화내지 말고 들으라구. 모든 일에는 적당한 시기와 방법이 있는 것이야. 부장으로 진급한지 미처 2년이 되지 않아서 이사를 시켜달라고 품신이
들어가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 더구나 이렇게 미사여구를 잔뜩 나열해 가지고는 웃음거리밖에 안 돼.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조금 참고 기다리라구.”
    “훈계하시는 겁니까?” 권소백 부장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백규남은 속으로 주춤했지만 겉으로는 상사로써의 체통을 지켜야 했다.
    “거, 무슨 말솜씨가 그래? 훈계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야?”
    “지사장 진급하시더니 태도가 달라지는군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을 텐데. 금방 후회할 일을 왜 하지요?”
    “뭐야? 권부장, 지금 나한테 공갈치는 거야?” 백규남이 버럭 화를 냈다. 총본부장의 확인 전화도 있었고 지사장 진급이 확정된 지금 부장 나부랭이가 까불어봤자 얼마나 까불겠는가? 본사에 무슨 끄나풀이 있긴 있는 모양이지만 끗발이 회장의 막내아들인 총본부장의 위에 있을 수야 있겠는가?
    권소백이 묘하게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모두 백지화하지요. 제가 이사 진급하는 것은 백지화하고 다음 기회를 보겠습니다. 따라서 부지사장님의 지사장 진급도 백지가 되겠습니다.”
    “뭐라구? 권부장, 말을 좀 삼가서 해. 내 진급은 본사와 뉴욕 총본부에서 이미 확인이 되어 있어. 부장 따위가 떠들 일이 아니란 말이야.”
    권소백의 얼굴이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글쎄요, 한 번 기다려 보시지요. 직장 상사가 그렇게 매일 죽어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일생에 한 번 올동말동한 기회인데 그걸 잡지 못하는군요.” 권소백은 말을 마치자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총본부장은 뉴욕에서 다섯 명의 수행원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막 바로 고 최인길 지사장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장의사부터 먼저 방문했다. 그들은 한국식 예법에 의해서 돗자리가 깔린 위에 구두를 벗고 올라서서 큰 절을 세 번하고 향을 피웠다. 불의에 사망한 부하 직원에 대한 예의와 깊은 배려는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다른 직원의 사기에 영향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 졸지에 당한 일에 고생이 많지요? 이렇게 모두 같이 협조해서 어려운 일을 이겨나가는 것을 보니 든든합니다.”
    총본부장은 로스앤젤레스 지점에서 마중 나온 백규남과 그 일행에게 윗사람의 우월감이 뒤에 스며들어 있는 겸손한 자세로 일일이 모두와 악수했다. 분향이 끝나고 사무실로 가기 위해서 차에 오를 때에는 백규남에게 자기 옆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수행원이 벤츠 차의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백규남은 황망히 허리를 굽혀 보이고 차에 올랐다.
    “이런 일이 있기 전부터 저는 백 지점장님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능력도 있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남에 뒤지지 않습니다.”
    아직 삼십대 후반인 총본부장은 대화에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새겨서 듣고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백규남은 진심으로 이 총본부장을 위해서라면 온몸이 가루가 되도록 충성을 다해 헌신할 것이라고 감격스럽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눈물이라도 흘리라면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라도 흘리라면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지사장이 되었는데 무엇인들 못하랴.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니까 무엇인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무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한데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다. 모든 직원이 입을 다물고 지금 마악 도착하고 있는 총본부장 일행과 백규남의 눈치를 살폈다.
    백규남은 급히 회의실로 모두를 안내해서 들어가게 하고 가까이에 있는 직원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직원은 아무 말 없이 우물쭈물하다가 도망치 듯 자리를 피했다. 불길한 예감에 백규남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커피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급히 회의실로 향하던 백규남은 멈칫 섰다. 저쪽 책상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 권소백 부장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백규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놈은 예의 그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백규남과 부딪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백규남은 그를 쏘아보다가 서둘러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로 들어서자 거기도 바깥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부드럽게 미소 짓던 총본부장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서 백규남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된 불안정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던 백규남은 총본부장의 바로 등뒤에 삼각대로 버티고 선 큼직한 화환을 보고 아연해서 서버리고 말았다.
    ‘백규남 지사장님. 축 진급. 아방궁 룸싸롱 권마담.’ 화환을 둘러싸고 있는 띠에는 큼직한 글씨로 그렇게 씌어 있었다.
    “아니, 이건. 이건 누가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백규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권소백이 흘리던 기분나쁜 미소가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 자식! 권마담이라구?
    총본부장이 지금까지의 우호적인 태도와는 전연 다르게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진급을 시기하는 사람의 장난일 수 있습니다. 아방궁이라는 룸싸롱에는 자주 가시는 모양이지요?”
    “소, 손님이 있을 때 한 두 번 간 적이 있습니다.” 백규남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 나왔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턱이 없다고 말씀했다면서요?”
    “아니, 그건.....”
    백규남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총본부장은 수행원 한 명에게 지시했다.
    “이 지점의 접대비 지출 내역을 알고 싶습니다. 아방궁 룸싸롱에 지불이 나간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서 보고하십시오. 언제 누가 어떤 손님하고 갔었는지를 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본사 인사과 전무님에게 전화해서 백규남씨 지사장 발령은 잠시 보류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설명은 제가 별도로 하겠습니다.”
    백규남의 이마에 번들거리며 배어나온 진땀이 뺨을 타고 근질거리며 흘러서 턱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건, 누군가의 모함입니다. 누가 음모를 꾸민 겁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 회사를 끌고 갈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해를 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통솔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더구나 저희가 방문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큰 화환이 이런 곳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백규남씨가 직원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걱정입니다. 이것이 시기심에서 나온 일개인의 장난이라면 다른 직원들이 일단 치워줘야 마땅한 일 아닐까요?”
    총본부장은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호텔로 갑시다. 피곤해서 좀 쉬고 싶습니다.”
    수행원 모두가 총본부장을 따라서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적의를 담은 눈들이 모두 백규남을 쏘아 보았다.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총본부장이 회의실을 나서자 수행원 모두가 침묵 속에서 똑같이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백규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따라서 나갔다. 백규남은 앞이 캄캄해서 어쩔 줄 몰라 서 있다가 덩달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해서 주머니를 뒤졌지만 매일 넣고 다니던 손수건이 그날따라 없었다. 손가락으로 땀방울을 훑어 내리며 허겁지겁 총본부장과 그 수행원을 따라 나가다가 그런 광경을 빈정거리며 보고 있던 권소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누구인가하고 전화를 하다가 백규남을 보자 슬그머니 눈을 피하고 돌아앉았다.
    이 자식이! 백규남은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권소백의 책상으로 뛰다시피 쳐들어가서 덜미를 낚아채려다가 멈칫 섰다. 많은 직원의 눈총이 집중되어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백규남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땀을 쏟으며 분통을 참고 있는 백규남 따위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권소백이 전화통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 놀랐습니다. 이사님께서도 몹시 놀라셨지요? 그나저나 회사의 업무가 차질 없이 잘 진행되어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이사님께서 망설이지 말고 빨리 결단을 내리셔서 회사로 복귀해 주시기를 우리 모든 직원들이 앙망하고 있습니다. 이미 전에 지사장님을 오랫동안 하셨으니까 저희 지사 실정에도 소상하게 밝으시고 ......”


김영문 / Youngmoon Kim (082507) (200 x 99매)
Email : young@esilax.com  Mobile Ph. 310-466-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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