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폐허

2007.09.27 09:43

김영문 조회 수:734 추천:109

                           장미와 폐허

        금을 찾아 몰려왔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토박이만 남아 쓸쓸해진 어느 마을의 한 가운데 이제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 오래되어 폐허가 되어버린 공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해지고 버려진 땅이지만 그 한 복판에는 예전 번성하던 시절의 영화를 알려주듯 화려하게 장식된 화단이 있었는데 그 화단 안에는 철이 되면 퇴락한 주변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눈부신 장미들이 분에 넘칠 만큼 만발하곤 했습니다.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서 이 마을로 찾아온 남녀들이 주말이면 일주일의 고단했던 금광 일을 모두 씻어버리고 화려하게 성장하고 나와 거닐면서 무성하게 넘칠 듯 피어오른 장미들을 찬탄하며 사랑을 나누던 모습이 아직도 그 사치스럽게 장식된 화단에 남아 있는 듯합니다.  장미 화단 앞에서 거리의 악사들이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면 딸그랑거리며 빈 양철통 안으로 떨어지는 동전 소리마저도 마치 음악의 한 부분인 것처럼 즐겁게 들리곤 했습니다.  

        올해에는 그 많은 장미 속에서도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두드러지도록 찬란한 자태로 피어나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폐허의 한 복판에서 서럽도록 아름답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햇빛 째앵한 대낮, 어디선가 와서 그 폐허를 지나가던 꼬부랑 할머니가 붉은 장미를 보고 걸음을 멈춘 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드려다 보다가 탄식했습니다.
        서럽고녀.  서럽고녀.  이 아름다움을 보아주는 이 없어 서럽고녀.
        이것을 들은 붉은 장미는 그날 밤을 지새우며 울다가 새벽이 되자 마침내 결심을 하고 흙에 박힌 두 발을 고통을 참으며 뽑아내어 폐허를 가로질러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버려진 폐허에서 그냥 이렇게 시들어져 버릴 수는 없어.  나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은 도회지로 가겠어.  나는 그 화려한 곳에서 내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며 살 거야.
        장미는 미지에의 두려움과 희망이 뒤범벅되어 팔딱거리고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며 폐허를 등지고 힘껏 뛰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폐허가 뒤에서 다급히 소리쳐 부르며 막으려했지만 붉은 장미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뛰기만 했습니다.  피를 토하듯 울부짖던 폐허의 목소리가 저주로 바뀌어 붉은 장미의 귓속을 파고 들어왔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벽이슬이 걷히고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새 세상을 찾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여 긴장한 붉은 장미의 얼굴에 태양은 눈부신 빛을 뿌리고 야망에 불타는 그 두 눈은 섬뜩하도록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서두르며 얼마인가를 걸어오는 사이에 대낮이 되었습니다.  박혀있던 흙에서 뽑아낼 때 찢어진 발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렇게 맨발로 반나절을 걸어온 붉은 장미의 발은 이제 처참할 정도로 상처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새벽에는 상쾌하게 느껴지던 태양이 하늘 중천에 오르자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하고 붉은 장미는 질식할 것 같은 열기 속에서 갑자기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 닿는 곳 어디에도 잡초 무성한 돌짝밭만 있었고 그 어느 곳에도 물이 있을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도회지와 붉은 장미의 아름다움을 찬미해줄 사람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잔인하게 내려 퍼붓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 아름답던 꽃잎들은 시들고 말라서 비틀어져 떨어져나가기 시작하고, 이제 비로소 붉은 장미는 집을 떠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것이 고통스러워졌습니다.  드디어 붉은 장미는 이글거리며 타는 태양 아래 몸 가릴 곳 없는 돌짝밭 위에 몸을 던지고 누워 버렸습니다.  그 돌짝밭은 살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지만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장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폐허야.  나, 물을 줘.  물을 한 모금만 줘.
        마침내 붉은 장미는 죄책감 때문에 자꾸 잊으려고 애를 쓰던 폐허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청했지만 그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말았습니다.

        또 밤이 오고 새벽이 되었습니다.  밤새 식었던 대지 위에 다시 찬란한 해가 떠오르고 자연은 무심하게 또 하나의 다른 날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알 길 없이 그 꼬부랑 할머니가 다시 지나가다가 돌짝밭에 처참하게 죽어 버려진 붉은 장미를 발견하고 발을 멈추었습니다.
        무심하고녀.  무심하고녀.  그 아름답던 네가 어찌 이렇게 초라하고 추하게 죽어 있느냐.  무심하고녀.  무심하고녀.
        꼬부랑 할머니는 힘겹게 허리를 굽혀 붉은 장미의 시체를 집어들고 양지바른 곳에 야트막하게 땅을 파고 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장미가 있던 폐허를 향하여 허우적거리며 걸었습니다.
        장미가 살던 화단에는 장미가 발을 빼면서 파헤쳐진 흙더미가 아직도 생생하게 습기를 머금고 남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손으로 마치 몹쓸 상처를 쓰다듬듯 그 흙더미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습니다.
        허무하고녀.  허무하고녀.  너는 어찌 폐허를 버리고 네 영화만 찾다가 이렇게 가고 말았느냐.
        이 때, 이것을 보고 있던 폐허의 눈에 핏발이 서고 소름끼치는 잔인한 광채가 돌았습니다.  포효하며 일어난 폐허는 미친 듯이 달려와 붉은 장미가 살던 땅의 흙더미를 사납게 송두리째 파헤쳐버리고 거기 남아 있던 붉은 장미의 뿌리를 미친 것처럼 뽑아내어 발기발기 찢어 사방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고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폐허의 눈이 번쩍 빛나고 붉은 장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여 허영심을 불어넣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던 꼬부랑 할머니를 두말없이 단칼에 베어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김   영   문 / Youngmoon Kim (022303/092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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