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수리 중 (3)

2007.11.25 13:03

김영문 조회 수:1092 추천:136

                            내부 수리 중(3)

    11시에 오겠다던 부엌 수리 전문가라는 사람이 오후 2시가 되었는데도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 사람에게는 선수금을 주지 않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합의를 얻어내어 공사가 끝나는 대로 전액을 현찰 지불해주기로 했으므로 금전적인 손실은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손해는 딴 데서 나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황량하게 텅 비어 있는 가게에 앉아 오지도 않는 놈을 기다리고 있자니 쓸쓸해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내부 수리가 끝나고 신장개업할 때 팔려고 24병들이 두 상자 합계 48병을 사다 놓았었는데 지난번에 두 병 마시고 오늘도 벌써 두 병을 비워 버렸으므로 이게 말하자면 장사 밑천 원금 까먹는 셈 아닙니까.
    아까부터 녀석의 휴대 전화를 계속 돌리고 있는데 신호는 가도 전화를 안 받습니다. 홧김에 또 전화를 돌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번에는 전화벨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술기운이 뻗치고 화가 나는 것만 생각하면 욕지거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꾸욱 참고 살살 달래기로 했습니다.
    “하이고, 사장님, 바쁘신 모양이지요?”
    “뉘시오?”
    “뉘라니? 아, 11시에 공사하러 오기로 되어 있어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김영문 카페 말입니다.”
   “김영문 카페? 아, 그 공사 대금 선수금 안 주겠다고 버티던데 말이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빌어먹을 자식, 이제 생각하니 이 자식이 선수금 안 줘서 엿먹어라하고 안 오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합니까? 누가 선수금 안 받고 일을 시작합니까, 요새 세상에. 달라던 선수금 삼백 불에 백 불 더 얹어서 사백 불 현찰 들고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오시기가 무섭게 돈부터 드리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이게 뭡니까? 지금 두 시가 넘어가고 있잖아요.”
    “앗따, 그런 줄도 모리고 사람 너무 깐깐하다 싶어서 일 안 할라꼬 했는디 인간성 좋은 사람이구먼요.”
    갑자기 녀석 목소리가 참기름 친 것처럼 매끌매끌 듣기 좋게 변했습니다.  나는 이 새끼를 신나게 조지려면 감언이설을 해서라도 일단 내 카페까지 오게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내 목소리에도 참기름을 쳤습니다.
    “말 몇 마디 해보고 사람을 어떻게 압니까? 알고 보면 저, 괜찮은 사람입니다. 오십시오. 오늘은 늦었으니까 오셔서 선수금만 사백 불 받아 가시고 공사는 내일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참말입니까?”
    “나, 이 양반, 내가 할 일 없어서 말장난하고 있는 줄 압니까? 빨리 오세요, 돈 썩기 전에.”
    의심이 되게 많은 놈인지 녀석이 주저하는 것 같아서 나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한 마디 더 붙였습니다.
    “사백 불 받았다는 영수증도 필요하니까 적당히 하나 써가지고 오십시오. 믿고 하는 거래지만 그래도 영수증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았시오. 다섯 시쯤 들리면 될끼요?”
    시계를 보니 세 시였습니다.
    “기다리지요. 빨리 올수록 좋습니다.”
    “예, 앗따, 진작에 전화 주시지예.”
    나는 전화를 끊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백 불 좋아한다. 오기만 해봐라. 나는 녀석을 문전에서 욕지거리를 해서 쫓아버릴 참이었습니다.복수를 하는 겁니다. 사백 불? 무슨 사백 불? 이 사람 돌았나? 공사 시작도 하기 전에 무슨 돈이야? 번지수 잘못 찾은 모양인데 딴 데 가서 알아봐.
    흐, 흐, 흐. 나는 웃으며 소주병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어, 벌써 두 병째가 동이 나고 없습니다. 원금 까먹는 것이 아까웠지만 눈 질끈 감고 한 병 더 땄습니다. 병째 들고 마시는 소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약아져서 미국식 나쁜 것 반, 한국식 나쁜 것 반을 섞은 다음에 그것이 미국식이라고 떠들면서 살고 있는 놈들이 좀 많습니까? 게다가 미국 법을 들이대면 한국 사람들끼리 왜 그러냐고 하고 한국 법을 들이대면 여긴 미국인데 미국식으로 합시다, 라는 겁니다. 이 새끼들하고 뭐 하려고 하면 미칠 노릇입니다. 거짓말은 또 얼마나 잘 합니까. 들어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처럼 들리게 잘도 지어내서 둘러대는 것이 가히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지면서 기회주의적 처세술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그 못된 사고방식과 못된 버릇을 어디 가던 버리지 못하는 놈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못된 놈들일수록 잘 살고 있으니 이게 진짜 분통 터지는 일 아니고 뭡니까? 이 세상 되어가는 꼴이 뭔지 모를 노릇입니다. 꾸준히 열심히 일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회의 생산적 일원으로써 기여보비하는 건실한 사람들이 설 땅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말하자면 저같이 이렇게 천사처럼 사는 사람이 소주 한 병을 가지고 달달 떨어야한다는 것은 현 시대의 비극을 대변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남의 곗돈 떼어먹고 벤츠 타고 다니는 사람 뒈질 줄 알았는데 아주 잘 살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사람 세탁소 사준다고 십여만 불의 돈을 송두리째 가로챈 사람도 한 반 년쯤 안 보이더니 다시 나타나서 의젓하게 어깨 펴고 잘 돌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고향에 가서 어떻게 감언이설을 했는지 단체 관광단을 모아서 경비조로 일인당 1200불씩 이십여 명에게서 걷어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방문하고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주야로 극진한 칙사 대접을 받았구요. 차암 재주도 좋은 노릇입니다. 드디어 이 단체 관광단이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원래의 계획은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한인 타운을 비롯한 로스앤젤레스의 명소를 한 바퀴 돌고 숙소로 모시기로 되어 있었답니다. 공항에서 우왕좌왕하면서 네 시간을 기다렸는데 관광버스는커녕 이 사람 핸드폰 연락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큰 출세를 했다고 떠벌린 이 동향인을 철석같이 믿고 어렵게 벌은 돈 다 맡기고 로스앤젤레스까지 왔던 이 순진한 사람들의 관광은 이렇게 더러운 기분을 남기고 끝나버린 겁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이 사람은 관광단이 풀죽어서 돌아간 후 슬슬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도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한인촌의 다방 같은 데서 이따금 보면 콧구멍 후비면서 앉아서 태연한 얼굴입니다. 이 시대의 이 사나운 세파를 헤쳐 나가려면 이 정도는 낯이 두꺼워야한다고 시범을 보이면서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놈들은 애교스럽고 귀여운 아마추어 사기꾼일 뿐이고 그와 규모 및 기교가 전혀 다른 진짜 세련된 프로 사기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잔돈푼에는 관심 없고 굵은 돈만 챙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나는 옛날 뉴욕에서 살 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필요할 때마다 전화 연락하면 즉시 모여드는 고정 사기꾼 멤버가 있습니다. 사업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한 마디에 열 마디를 척 알아듣고 순식간에 손발을 맞추는 특수 작전 전문 요원들입니다. 이 요원들 중에는 보기만 해도 감전사할 것처럼 예쁜 백인 여자도 하나 있었습니다. 몸의 절반 정도가 다리로 보이는 도발적인 모습을 가진 이 여자의 역할은 비서였습니다. 이 여자 역시 이미 여러 번 팀웍에 가담했었던지 손발을 척척 잘 맞춥니다. 웬만한 한국말도 곧잘 해서 ‘회장님’, ‘감사 합니다’등의 간단한 한국말쯤은 문제도 없고 그 큰 눈을 깜빡거려 애교를 부리면서 ‘저는 잘 몰라요’, ‘조금만 기다리셔요.’, ‘커피 드릴까요?’등의 꽤 복잡한 말도 능숙하게 뽑아냅니다. 백인이라면 설설 기는 한국 사람의 약점을 기술적으로 아주 잘 이용한 인적 자원의 탁월한 배치라고 나는 감탄했었습니다.
    이 사람을 나는 뉴욕에서 제가 다니던 미국계 유태인 회사가 주최한 파티에 갔다가 만났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에게서 어떤 이용가치를 발견했는지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엄청나게 많은 연봉을 제시하며 같이 일하자고 유혹했습니다. 마력과 같은 돈의 힘 때문에 어떤 회사인지 감을 잡기 위해서 몇 차례 이 사람이 주관하는 사업 기획 모임에 참석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나는 그러다가 손을 떼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저 같은 천사가 그런 사기성 농후한 회사의 행동 요원이 될 것 같습니까?
    아, 밖에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이 부엌 수리 전문가라는 쌔끼가 온 것 같습니다. 푸로 사기꾼 회장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일 착수하지도 않고 400불 선수금부터 받으러 온 부엌 수리 쌔끼를 골탕 먹여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리가 휘청하고 꼬이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히 취한 모양입니다. 안에서는 어두워진 유리문 밖이 보이지 않아 이 부엌 수리 쌔끼가 어떻게 생긴 놈인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고리를 따고 문을 열자, 빌어먹을, 밖에는 얼굴이 새까만 노인네 거지 하나가 서있지 않습니까.
    “홧 두 유 원트?”
    나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습니다.
    “김미 어 달러. 아이 엠 헝그리. 플리스.”
    이 노인 거지는 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한국식으로 굽실하고 애원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손이 크다는 것을 알고 거지들도 한국 사람에게는 몇 푼 동전이 아니고 달러를 달라고 합니다.
    화가 나서 소리 지르려다 보니 술김에 어른거리는 내 눈에 이 거지가 어쩐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것 같이 보였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 불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습니다.
    “땡큐, 땡큐. 갓 블레스 유.”
    거지는 지폐를 받아들자 한국식으로 굽실하고 사라졌습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식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한인 타운에서는 저렇게 한국식으로 굽실거리는 거지가 구걸의 확률이 확실히 좋을 겁니다.

    복수하기 위해서 씩씩거리면서 밤 아홉 시까지 기다렸지만 부엌 수리 쌔끼는 결국 나타나지 않고 말았습니다.

김영문 / Youngmoon Kim (1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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