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2012.06.09 10:00

김영문 조회 수:165 추천:29



                               라파엘


  이번 한 번만 더하고 나면 놓아주겠어. 더 시키지 않을 테니까 잘 해. 유 아 더 맨, 오케이? 이번 상대는 갱 단원이 아니라고? 마찬가지야. 갱 단원이 아닌 놈도 찌르면 가게 돼 있어. 다를 것 아무 것도 없어.
  갱 보스 미겔 산체스는 길게 칼자국 흉터가 있는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었다. 꼭 이번 한 번만 더 하면 끝이라면서 주머니에 찔러 넣어준 두툼한 현금은 나중에 세어보니 이십 불짜리로 천 불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그만큼을 더 준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지난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더니 더러운 일만 골라서 시키고 있어.
  라파엘 킴은 뚱뚱하게 보이기 위해 배에 베개를 동여매고 그 위에 덮쳐 입은 큰 누비 오버 코트가 거추장스러워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나중에 혹시 목격자가 있어서 인상착의를 증언할 때 혼란시키기 위한 위장이었다.
  겉으로는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두 눈은 번쩍거리며 날카롭게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찬바람이 털모자 밑으로 노출된 라파엘의 두 볼을 아프게 치고 지나갔다.
  갓댐 잇. 로스앤젤레스에서 얼어 죽었다면 모두 웃겠지?    
  누렇게 퇴색한 가로등이 움직임 없는 주택가의 보도를 무심히 비추고 있었다. 라파엘이 발을 옮겨 놓을 때마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깔린 바싹 마른 낙엽들이 버석 버석 소리 내며 부서졌다.  
  오스카 애비뉴에서 마침내 밀러 코트에 당도하자 낮에 미리 보아두었던 대로 라파엘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 코너에서 왼쪽으로 여덟 번 째 집이 오늘 밤의 목표였다. 로스앤젤레스 크로니클 신문사 원로 기자 리차드 말덴의 집. 보스의 지시를 받고 처음 이 집을 답사했을 때 라파엘은 그 신문 기자의 명성에 비해서 초라한 집에 놀랐었다. 다른 어떠한 것에도 관심두지 않고 오로지 신문 기자로써의 사명에만 헌신하며 산다는 사람의 겸허한 생활이 짐작되는 집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손을 댄다는 것이 께름칙해서 주저했지만 미겔 산체스는 힛맨에게 동정은 금물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집안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오십이 넘어서도 독신으로 살고 있는 리차드 말덴 기자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특종을 터뜨린 신문 기자에게 주는 영예의 상 베스트 리포터 어워드 시상식이 끝나는 시각이 밤 9시 정도. 인터뷰 어쩌고 하면서 보낼 시간이 약 한 시간. 행사장에서 집까지의 교통에 20분쯤. 대충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집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비추며 라파엘 킴은 두텁게 팔목을 덮고 있는 코트 소매를 헤치고 시계를 보았다.
  8시 27분.
  지금쯤 행사가 한창이겠지.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라파엘은 그 집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버스 정거장의 벤치에 엉덩이만 대고 앉았다. 얼굴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 눈동자를 굴려 눈모서리로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금요일 밤을 즐기기 위해서 가족 모두가 외출했는지 주위의 여러 집이 불이 꺼져 캄캄했다. 불이 켜져 있는 집도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어 보였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됐어. 이제 들어가 보자.
  차갑게 볼을 때리는 바람에 코트 깃을 추스르며 일어나다가 라파엘 킴은 문득 행동을 멈추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며 라파엘 쪽으로 오고 있었다.
  라파엘이 보고 있는 사이에 불빛으로 나온 그 것은 아주 작은 강아지였다. 맑은 눈이 추위에 떨며 라파엘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때 강아지가.
  강아지는 눈치를 보며 멈칫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안 돼. 겟어웨이. 오지 마.”
  라파엘이 짧고 단호하게 말하자 강아지는 그 자리에 멎어서 어쩔 줄 모르며 애원하듯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이 추운데 어떤 멍텅구리가 강아지를 길거리에 내어 놓았다는 말인가.
  라파엘은 아련한 기억 속에서 어머니가 기르던 강아지를 생각했다. 라파엘과 같이 놀고 같이 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술 취해서 들어온 아버지라는 사람이 울며 버티는 어머니를 때리고 빼앗아 들고 나가버렸었다. 그 강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파엘은 벤치에서 일어나서 강아지를 등지고 그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으며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보스 미겔이 준 집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간단해. 잠금 장치는 하나야. 이 열쇠로 열면 돼. 경보 장치 따위는 되어 있지 않아. 들어가자마자 우선 전화 코드를 빼놓고 부엌을 통해서 뒷문으로 나가. 집 바깥 오른쪽 벽에 전기미터와 패널이 있어. 패널 뚜껑을 열고 메인 스위치를 내려서 전기를 차단하고 다시 들어와 현관 안에 앉아서 기다리면 돼. 녀석은 친구가 없고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한 놈이니까 시상식인지 뭔지가 끝난 후에 기자들과 인터뷰가 끝나면 혼자서 곧장 집으로 올 거야. 지난번에도 몇 번 그렇게 했거든. 차고 문을 열려고 차 안에서 오프너 스위치를 누르겠지. 전기가 없으니까 문이 열릴 턱이 없어. 드라이브 웨이에 차를 세우고 집 앞 문으로 걸어와서 열쇠로 문을 열거야. 집에 들어와서 불을 켜려고 더듬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한 번 찔러 넣으면 끝나는 거야.  
  쌔끼. 쉽게 말하는군.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직접 해치우지 왜 나를 시키는 거야.
  라파엘 킴은 중얼거리며 왼쪽 주머니 속에 든 칼을 쥐어 보았다. 굵고 듬직한 느낌이 드는 손잡이에는 피가 묻어도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특수 코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잡이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면도날처럼 예리한 5 인치의 날. 왼손잡이인 라파엘은 언제나 무기를 왼쪽 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다.
  익숙한 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라파엘은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 집이 있는 쪽으로 길을 건넜다. 집에 가까워지면서 라파엘의 심장이 다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 침착하려 애쓰며 천천히 그 집으로 접근했다.
  지금 까지 세 번. 이것이 네 번째다. 첫 번째가 끔찍스러웠지만 반복할수록 쉬워졌다. 그러나 갱 단원이 아닌 놈에게 손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깔끔하게 끝낼 수 있어야 할 텐데. 그 집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목격자가 없어야 한다.
  갑자기 등 뒤에 기척을 느끼고 라파엘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강아지. 아까 그 강아지가 거리를 두고 졸랑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라파엘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한 후 강아지를 몸짓하여 쫓으려했다. 강아지는 애처롭게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에 털이 날리고 그 작은 몸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저리 가. 따라오지 마.”
  잠시 더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니 강아지는 그 때 까지도 라파엘을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추워요. 도움이 필요해요. 강아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짖지 않으니 다행한 노릇이군.
  라파엘은 생각하며 그 집에 당도하자 가죽 장갑을 꺼내서 끼고 마치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현관으로 올라서서 주머니의 열쇠를 꺼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술집에는 반쯤 벗은 웨이트레스들이 술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알코올에 젖은 한 패거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무엇인가를 축하하고 있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술을 나르던 웨이트레스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녀석이 뺨을 얻어맞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을 익숙한 눈으로 둘러보며 거구의 술집 경비원 둘이 입구에 서서 보안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안쪽 특별 칸막이한 부스에 자리 잡은 갱 보스 미겔 산체스와 그의 심복 여섯 명은 테킬라를 맹물처럼 들이키면서 벽에 붙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리차드 말덴.
  보스 미겔은 어른거리는 취기 속에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심층 취재인지 뭔지를 해서 조직을 파헤치고 잘 나가던 마약 거래를 풍지박산 내고 나를 도망자로 만든 새끼.
  미겔은 탁자의 테킬라 잔을 들어서 독한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끝장이다. 오늘 밤이면 너의 그 영광스럽고 영웅적인 경력도 마감되고 말 것이다.
  부하들이 보스 미겔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리차드 말덴에게 퍼붓는 욕지거리와 저주가 미겔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간교한 미겔은 오늘 밤 벌어질 일을 자기의 가장 측근 부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행사가 끝난 후 리차드 말덴이 집에 도착했을 때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미겔 자신과 실지로 행동하는 라파엘 킴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순서는 올 해 최우수 보도 상을 받으실 리차드 말덴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드디어 오십이 넘은 나이이면서도 뱃살이 없고 건장한 몸매에 턱시도를 입은 리차드 말덴이 단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사회자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한 후 마이크로폰에 대고 말했다.
  “작년에는 스키드 로우에 사는 집 없는 사람들의 취재로 우리의 마음을 울려주더니 올해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마약 밀매와 살인을 일삼는 갱의 세계를 추적하여 폭로 기사를 썼습니다. 이 기사가 발단이 되어 여러 명의 지역 갱 멤버들이 체포되어 추방되거나 감옥소에서 형을 살고 있습니다.”
  청중 속에서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잠잠해지자 사회자가 물었다.
  “일하느라고 바빠서 그런 줄은 알고 있지만 언제쯤 결혼하실 것인지요?”
  청중 속에서 왁자지껄 폭소가 터져 나왔다.
  개새끼.
  스크린을 응시하던 미겔 산체스가 응얼거리듯 씹어냈다. 탄탄하게 잘 되어 있던 조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려버린 새끼. 더구나 멕시코의 총 보스가 이제 미겔 산체스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 폭로 기사 때문에 너무 알려져서 밖으로 나타나면 안 돼. 내가 부를 때 까지 숨어 있어. 멕시코에서 걸려온 전화 속에서 총 보스는 언제나처럼 감정이 안 담긴 쉰 목소리로 내뱉었었다. 그렇게 해서 도태된 갱 단원 중에서 총 보스가 다시 불러들인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미겔 산체스는 알고 있었다. 기사가 터져 나오자 총 보스는 경찰이 손을 쓰기 전에 가짜 여권을 가지고 제 삼의 인물을 써서 미겔 산체스가 멕시코로 출국한 것처럼 만들어주는데 까지만 협조했다.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미겔 혼자서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불만이어서 반란을 시도했다가는 총 보스에 의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는 것을 미겔은 잘 알고 있었다.
  “미겔, 저 새끼를 내가 죽여 버리겠어.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만나서 한 방이면......”
  부하 하나가 미겔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씩씩거리며 말하자 미겔이 손에 들고 있던 테킬라 잔을 그 면상에 던졌다.
  “쌔끼, 미겔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게 그렇게 힘들어?”
  술잔을 얼결에 피한 부하가 두려움에 질려서 더듬거렸다.
  “미, 미안해, 호세.”
  이 부하들은 미겔이 조직에서 제거 당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총 보스의 조직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미겔의 위세가 추락하게 된다. 지금 심하게 다루면 그 때 보복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미겔은 그 부하의 어깨를 툭 쳐주고 말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내 이름이 호세라는 것을 잘 기억해 둬.”
  부하는 뜻밖의 따뜻한 말에 비굴한 태도로 빌붙으며 말했다.
  “알았어. 잘 할게. 잘 기억해 둘게.”
  미겔 산체스의 눈은 이미 텔레비전에 가 있었다.
  용의주도한 미겔이 오늘 밤을 이 술집에서 지내기로 한 데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혹시라도 멕시코로 출국하지 않았다고 확인되고 리차드 말덴 살해의 용의자가 되었을 경우에 대비해서 알리바이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살인 사건? 난 몰라. 그 시각에 나는 친구들과 바에 있었어. 조사해보면 알게 돼. 원한? 물론 있지. 죽은 리차드 말덴에 대해서 원한이 있는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나는 죽이지 않았어.
  히스패닉이 아닌 한국계 라파엘 킴이 미겔에게 있었다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말이 없고 침착해서 일을 해치우는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에서 갱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자라서 그 생태에 익숙하고 기막히게 솜씨 있는 칼잡이였다. 성이 킴이기 때문에 경찰 컴퓨터에서 무작위로 히스패닉 갱들의 라스트 네임 써치를 해도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끼는 한국계 외톨이니까 실컷 부려먹다 버려도 집단 보복을 당할 염려가 없었다. 더구나 벙어리처럼 도무지 말이 없어서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도 없었다.
  언젠가 라파엘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미겔에게 울면서 애원한 적이 있었다. 내 아이를 놓아주세요. 내 아이는 학교를 다녀야 해요. 아이가 갱단에서 빠져나오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멕시코에서 살지 못하고 미국으로 도망쳐 왔어요.
  빌어먹을. 미겔은 술기운에 흐릿해진 머릿속으로 자기 어머니를 생각했다. 빌어먹을. 낮이나 밤이나 언제 보아도 항상 술 취해 있던 주정뱅이. 아들이 보고 있는 데서도 손님을 불러들여 버젓이 아랫도리를 내놓고 성행위를 하던 여자.
  “갱단의 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두려운 사람이라면 신문기자 보다는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 하겠지요.”
  텔레비전에서 리차드 말덴이 말하고 있었다.  
  “그 폭로 기사 이후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조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쓴 폭로 기사에 대한 보복이 들어온다면 그 것은 또 하나의 기사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년의 시상식 때에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와그르르 폭소와 함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술기운에 어른거리는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미겔의 눈이 피 묻은 고기를 본 독수리처럼 번쩍 빛났다. 쌔끼, 잘 떠드는군. 곧 고기 덩어리가 되어 썩어갈 놈이.

  라파엘 킴은 집안으로 들어가자 소리 안 나게 문을 닫고 등 뒤로 잠금쇠를 잠갔다. 잠시 가만히 서서 집안의 기척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이럴 때에는 눈보다 피부에 와 닿는 감촉으로 직감하게 되는데 라파엘에게는 이 기능이 동물 이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밖에서 반투명의 커튼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뿌우연 빛이 집안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을 의지하며 라파엘은 집안의 구조를 눈 안에 익혔다.
  문 왼쪽으로 텔레비전. 그 앞에 긴 소파와 암 췌어. 탁자. 입구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으로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통로. 문 안 바로 오른 쪽에는 간이 서재. 책장과 책상. 넘쳐날 듯 많은 책들. 전화.
  전화.
  라파엘은 소리 없이 움직여 가죽 장갑 낀 손으로 우선 전화 코드부터 뽑아냈다. 전화기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을 먼저 힘주어 뽑아내고 벽에 연결된 부분에서도 뽑아내어 선을 둘둘 뭉쳐서 책 더미 위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거쳐 뒷마당으로 통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오른 쪽을 보니 미겔 산체스가 설명했던 대로 전기미터와 패널이 보였다.
  짜식. 빈틈없이 잘도 조사해 놓았군.
  라파엘은 전기 패널의 뚜껑을 열고 메인 스위치를 내렸다.
  앗차!
  미처 생각 못했던 노릇인데 메인 스위치를 내리자 집의 옥외등이 모두 꺼지며 칠흑같이 캄캄해졌다.
  잠시 꼼짝 안 하고 서서 어둠에 눈을 익힌 후 라파엘은 손으로 더듬으며 부엌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도 아까보다 다르게 먹칠한 듯 캄캄해져 있었다. 눈여겨보지 못했지만 집 입구에도 야외 등이 있어서 그 빛이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심조심 발끝으로 확인하여 한 발씩 옮겨 놓으며 라파엘은 현관의 왼쪽으로 가서 바닥에 널려 있는 책들을 대충 밀어내고 자리를 만들었다.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칼을 꺼내 어둠을 더듬으며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거추장스럽게 입고 있던 두터운 누비 오버코트를 벗어서 옆에 놓았다. 뚱뚱하게 보이기 위해서 배에 동여매고 있던 긴 베개도 풀어서 오버코트 위에 놓았다. 한결 홀가분해진 몸을 움직이며 근육을 풀어보다가 벽을 의지하고 앉았다. 꺼내놓은 칼을 다시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현관문은 오른쪽에 경첩이 있고 왼쪽에 손잡이가 있어서 바깥에서 들어올 때 밀어 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열리게 되어 있었다. 입구의 오른쪽 벽을 의지하고 앉아 있으면 문이 열리면서 방패가 되어 안전하게 숨겨지게 된다.
리차드 말덴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문 왼쪽 벽에 있는 전기 스위치를 올릴 테지. 불이 들어오지 않자 웬 일이야, 하며 스위치를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해 보겠지. 문을 닫고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손전등을 찾기 위해서 더듬거릴 것이다. 이 친구가 담배를 피우던가? 그렇다면 라이터를 가지고 다닐지도 모른다.
  어둠에 미처 익숙해지지 못한 눈으로 더듬거리고 있을 때 무방비 상태의 그의 뒤로 다가가서 오른 손으로 뒷덜미를 잡아 고정시킨 후 턱 밑의 목을 찌른다. 이렇게 뾰족하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칼을 쓸 때는 힘주어서 휘두를 필요가 없다. 그저 연한 살덩어리에 갖다 대고 꾸욱 눌러주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실로 간단하게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파엘은 벽에 기대어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칼을 손에 들고 스위치를 눌렀다. 찰칵. 스프링 장치에 의해 칼날이 튕겨져 나왔다. 칼날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인 것처럼 어둠 속에서 차갑게 번들거렸다. 손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보다가 다시 칼날을 접어 손잡이 안으로 넣었다.
  “아부지, 나 여기 있는 거 싫어. 데리구 가. 나 아부지하고 같이 살 거야.”
  울며 매달리는 라파엘에게 손사래를 치며 아버지는 헐레벌레 멀어져 갔다. 시름시름 앓다 어머니가 죽어버리자 아버지는 라파엘을 고아원에 맡겨 버린 것이다.
  “곧 데리러 올구마. 잘 있그라이.”
  도망치듯 멀어지는 아버지를 쫓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라파엘의 뒷덜미를 억센 손이 붙잡아 꼼짝 못하게 누르고 있었다. 악을 쓰며 울다 지쳐서 라파엘은 힘없이 허덕이며 그 억센 손에 매달려 고아원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두 달.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또 한 달. 또 두 달. 그래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라파엘은 점점 말이 없는 외톨이 아이가 되어갔다.
  찰칵.
  엄지손가락으로 튕기자 칼날이 또 튕겨져 나왔다. 파란 섬광이 어둠 속에서 살육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어머니의 친구라면서 고아원으로 찾아온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라파엘의 손을 잡고 한없이 울면서 말했다. 그렇게 모두 말렸는데도 그 남자와 결혼하더니 결국 그렇게 죽고 불쌍한 너까지 고아원에 오게 만들었구나. 죽은 네 엄마가 이걸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프게 울겠니.
  그렇게 해서 양자가 되어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멕시코로 따라 들어온 라파엘은 잠시 보통 가정에서 사는 보통 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울어도 울어도 오지 않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라파엘의 가슴 속에 불로 지져서 인각한 것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소리 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양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도 배신감으로 얼어붙은 라파엘의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차갑게 얼어붙어 말없는 청년으로 커가는 라파엘을 어머니는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첫 번째 살인을 경험했다. 며칠을 밖에서 지내다가 집에 왔을 때 창백한 얼굴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라파엘을 보며 어머니는 직감으로 라파엘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너 무슨 짓을 했니?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부터 고였다. 그 시선을 외면하고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지만 라파엘의 눈에서 그 어머니의 모습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질려 파들거리며 자기를 지켜보던 어머니의 얼굴은 눈앞에 오늘도 그냥 남아서 라파엘을 괴롭게 만들었다.
  9시 40분.
  이제 서서히 때가 오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시간은 항상 초조하고 힘들다. 리차드 말덴. 빨리 와라. 빨리 끝내자. 어차피 너는 오늘 밤 죽게 되어 있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찰칵.
  초조감을 떨쳐 버리려고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또 칼날을 뽑아 세웠다.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의 시각이 가까워지면서 라파엘은 마치 이것이 첫 번째 경험인 것처럼 가슴이 뛰고 두려움이 온 몸으로 스며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숨이 가빠졌다. 지금까지 죽였던 것은 모두 갱단의 배신자이거나 반대파 갱 단원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리차드 말덴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나쁜 감정이 없다.  
  바스락. 사각, 사각.
  갑자기 현관문 바로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라파엘은 초긴장하며 얼어붙어서 숨을 죽이고 귀를 곤두 세웠다. 심장이 맹렬하게 뛰고 있었다.
  또, 바스락. 사각. 사각.
  그리고는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튀길 것처럼 긴장했던 라파엘의 눈이 풀어졌다. “망할 자식.”
  그의 눈에서 살기가 없어지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감정이 실낱같이 스며들어왔다.
  라파엘은 어둠 속에서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일어나 현관문을 조금 열었다. 아까의 그 강아지가 밖에 까지 따라와서 오돌거리고 떨며 서 있었다. 라파엘을 올려다보는 그 눈이 매달려서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와. 빨리 들어와.”
  라파엘은 머뭇거리는 강아지의 목덜미를 잡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다. 강아지는 백짓장처럼 가벼웠고 털에서 애처롭도록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강아지는 두려움과 애원이 섞인 눈으로 라파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보다가 라파엘은 셔츠 단추를 풀고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가슴 속에 넣었다. 꼼지락거리는 네 다리의 작은 움직임이 놀랍게도 라파엘의 얼어붙어 있던 가슴을 녹이고 있었다. 파들거리고 떠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라파엘은 한 손으로 더듬어 바닥에 놓여있던 칼을 집어 날을 칼집으로 다시 접어 넣었다. 어쩐지 이 강아지와 섬광이 번쩍거리는 칼날이 한 방에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9시 55분.
  벌써? 리챠드 말덴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차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살인을 계획했던 라파엘의 마음은 이제 혼란에 떨고 있었다. 손끝도
떨렸다. 불현듯 오늘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강아지는 라파엘의 가슴 속에 묻혀서 코끝으로 이따금 따뜻한 숨결을 내보냈다. 가슴 위에 느껴지는 그 작은 숨결이 라파엘을 더 떨리고 두렵게 만들었다.  
  안 되겠다. 오늘은 안 되겠다.
  라파엘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치 무엇인가 무서운 힘이 라파엘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 뜨자. 리차드 말덴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를 떠나자. 나는 오늘 이 일을 할 수 없다. 이상한 노릇이다. 이렇게 떨려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안 되겠다.
  강아지를 셔츠 안에 품은 채 라파엘은 주섬거리며 베개를 집어서 배에 다시 동여매고 두터운 오버코트도 들쳐 입었다.
  내다보니 다행히도 밖의 어두운 길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계단을 딛고 보도로 내려섰다. 그리고 밀러 코트를 아까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걸어갔다. 로스앤젤레스답지 않게 밤바람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이에 강아지는 라파엘의 체온을 받아 따뜻해 졌는지 더 이상 파들거리며 떨지 않았다.
  그는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강아지의 얼굴을 셔츠 밖으로 끄집어내서 숨쉬기 편하게 해 주었다. 얼굴만 내민 강아지의 맑은 눈이 라파엘을 올려다  보았다. 그 강아지의 작은 몸을 셔츠 밖에서 쓰다듬으며 라파엘은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정겨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친구가 있다. 너는 이름이 뭐지? 이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알았어. 그럼 지금 부터 나는 너를 라파엘이라고 불러준다. 나하고 똑같은 이름이야, 알았지? 내가 너를 사랑해주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해줘야 해. 알았지? 알았지?
  라파엘의 깊은 속에 숨어서 마치 없는 것처럼 차가워져 있던 체온이 온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볼을 때리던 차가운 바람이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라파엘, 네가 나와 같이 있기를 원한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겠다. 알았지? 우리는 지금부터 사랑하면서 같이 사는 거야.    
  아무런 정도 남기지 않고 헐레벌떡 멀어져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느꼈던 절망감으로 닫혀서 거의 이십 년을 잠가져 있던 가슴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셔츠 속에 들어서 꼼지락거리는 강아지를 마치 보물처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발에 차이는 두터운 코트 자락에 뒤뚱거리며 라파엘은 리챠드 말덴의 집을 뒤로하고 뛰듯이 걸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슴을 누르던 무거운 바위 덩어리를 내려놓은 것처럼 느끼며 라파엘은 중얼거렸다. 리챠드 말덴을 죽이지 않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나는 그 사람을 죽일 수 없다. 그 사람은 갱의 세계에서 동물처럼 사는 사람이 아니다.
  정신병자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보며 라파엘은 중얼거렸다.
  셔츠 속에서 라파엘의 가슴에 볼을 댄 또 하나의 라파엘이 어렵게 얻은 안도감 속에서 쌔액 쌔액 뜨거운 숨결을 내뿜고 있었다.

  이 새끼가 내 명령을 어겼다는 말이지?
  어젯밤의 과음으로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일어나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미겔 산체스가 이를 갈며 입속으로 신음했다.
  경찰의 저지선 바깥에서 찍은 비데오 화면 속에서는 아직도 살아있는 리챠드 말덴이 수사 나온 경찰관들에게 집안을 보여주며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뉴스 캐스터의 목소리가 화면에 나온 장면을 설명했다.
  “집안의 전화선이 끊어져 있었고 집 뒤쪽 벽에 있는 전기 터미널이 차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리챠드 말덴이 최우수 보도상을 받는 날 이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이것이 혹시 마약과 살인으로 점철된 갱의 세계를 추적한 리챠드 말덴의 폭로 기사에 대한 보복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죽인다. 내 명령을 어긴 놈은 어떤 놈이건 죽여 버린다.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거칠게 끄고 미겔 산체스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열고 권총을 꺼내어 탄창을 점검하고 약실에 든 실탄을 확인했다.
  모든 것은 끝장이다. 멕시코의 총 보스에게서 도태 당했고 이제는 그렇게 말 잘 듣던 부하 새끼마저 명령을 거역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새끼를 찾아서 죽여 버리고 멕시코로 튀는 거다. 그 다음의 일은 그 때 가서 걱정하기로 한다. 한 방에 쉽게 죽게 하면 안 된다. 총으로 위협하고 칼로 온몸을 조금씩 도려내서 공포에 떨며 죽게 만든다. 손가락부터 하나씩 잘라내 버린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겠지.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 나올 때 까지 고통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죽게 만든다.
  상상하는 미겔 산체스의 눈이 동물처럼 핏줄을 세우며 번득였다.
  갑자기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피범벅의 상상을 하던 미겔은 제 풀에 흠칠 놀랐다가 권총을 놓고 침대 위에 내동댕이 쳐놓았던 전화를 집어 들었다.
  “끼엔 에스? 누구야?”
  잠시 조용하던 전화기 저쪽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쏘이 요. 나다. 멕시코다.”
  미겔 산체스는 긴장하며 저도 모르게 휴대 전화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귀에 더 가깝게 밀착시켰다.
  “보스. 께 빠소? 무슨 일입니까?”
  “야, 이거 네가 한 짓이냐?”
  “뭐 말입니까?”
  “이 새끼. 몰라서 묻나? 리챠드 말덴을 죽이려고 했던 것 말이야.”
  “그, 그건.......”
  “그렇잖아도 그 놈의 기사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어서 조직의 행동이 불편한데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조용히 죽어지내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 새끼야! 벤데호! 바보 같은 새끼!“
  총 보스의 목소리가 분노에 차서 쇳소리로 변했다.
  서 있던 다리가 떨리며 힘을 잃고 미겔 산체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은 살인에 성공하면 총 보스가 미겔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시 제 자리로 복귀시켜줄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총 보스의 목소리는 증오에 차 있었다. 쇳소리로 변한 총 보스의 목소리에서 미겔은 이제 다가올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 끝났다. 잘못 짚었다. 총 보스가 이렇게 화를 낸다면 이 정도에서 그만둘 놈이 아니다. 이미 여러 놈이 당했듯이 나도 어떤 놈인가 총 보스의 명령을 받은 녀석의 손에 없어져 버리겠지. 이 새끼들!
  “더 나타나지 말고 내 명령이 갈 때 까지 대기해. 지금 사는 집에서 한 발도 나가서는 안 돼. 알았나?”
  미겔 산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 미겔, 리스폰데 아 미. 대답해.”
  끝장이다. 총 보스가 손을 쓰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총 보스가 대수냐. 살인 명령을 받은 새끼가 오기 전에 여기를 떠난다. 그렇잖아도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몇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내 조직을 만든다. 내가 강해지면 총 보스가 되레 내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야, 이새끼. 대답해!”
  쇳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미겔 산체스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미겔은 잘 알고 있었다. 수중에 있는 현금을 모두 챙겨서 즉시 이 집을 떠나야 한다. 미겔은 다시 권총을 집어 들고 일어서다가 흠칫 멎었다. 목덜미에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와 닿았다.
  “누, 누구야?”
  “권총을 내려놔.”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미겔 산체스의 등 뒤에서 명령했다.
  “라파엘!”
  목덜미에서 어느새 턱밑으로 들어온 면도날처럼 예리한 라파엘의 나이프가 차갑게 미겔을 위협했다. 라파엘의 잔인성을 알고 있는 미겔은 몸서리쳤다.
  “권총을 내려놔.” 라파엘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미겔은 주저했다. 라파엘의 나이프가 조용히 미겔의 턱밑을 그어 내렸다. 순식간에 터진 상처에서 진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악! 알았어. 알았어.”
  미겔은 황급히 탁자 위에 권총을 던졌다. 단단한 권총이 역시 단단한 나무 탁자 위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총 보스에게서 전화가 왔어. 너를 제거하라는 명령이야.”
  미겔 산체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하얗게 변했다.
  “벌써? 네가? 나를?” 미겔이 턱 밑 상처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피를 막으려 애쓰며 물었다.
  “네가 그랬지? 어느 놈이건 찌르면 들어가게 돼 있다구.”
  라파엘의 면도날 같은 나이프가 미겔의 터진 상처를 더 찢어놓았다. 미겔은 고통에 소리 지르며 라파엘의 나이프 든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라파엘, 아미고, 노소트로스 쏜 아미고스. 우리는 친구야.”
  라파엘은 탁자의 권총을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친구? 친구는 없어. 나는 명령을 따를 뿐이야. 총 보스는 네가 내 손에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삼 천 불을 주기로 되어 있어. 나는 돈이 필요해.”
  미겔 산체스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삼 천 불? 라파엘, 칼을 치워. 그 돈은 내가 주겠어. 지금 당장. 총 보스 따위는 잊어버려. 그 새끼를 버리고 나하고 일하면 내가 더 잘 해 주겠어. 나는 총 보스하고 손을 끊기로 했어.”
  라파엘의 칼을 조심하며 마주볼 수 있도록 돌아선 미겔 산체스는 라파엘의 가슴에 볼록하게 자리 잡고 얼굴만 내밀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했다.
  미겔의 시선을 느낀 라파엘이 셔츠 위로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제 이 친구를 위해서 여기를 떠나. 나는 너희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될 거야.”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라파엘. 돈을 주겠어. 나도 총 보스 새끼하고 끝장을 냈어. 같이 여기를 떠나자.”
  칼을 조심하며 미겔 산체스는 허리를 굽혀 침대 밑에서 배낭을 끄집어냈다.
  “돈이야.” 지퍼를 열고 미겔은 뭉치 돈의 귀퉁이를 삐죽 나오게 만들어 라파엘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당장 삼 천 불을 세어서 주겠어.”
  라파엘의 면도날 같은 칼이 당장이라도 찌를 듯 미겔의 눈을 위협했다.
  “셀 필요 없어. 그냥 주면 돼.” 라파엘의 칼이 눈에 위태롭게 가까워지자   미겔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제쳤다. 그 사이에 라파엘의 한 손이 불룩한 배낭을 나꿔챘다.
  “안돼. 야, 라파엘. 이 새끼.” 미겔의 피 묻은 손이 빼앗긴 배낭을 잡으려고 뻗어왔다. 그런 미겔의 얼굴을 라파엘이 서둘지도 않으며 이마로 받아서 부숴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 쓰러진 미겔은 얼굴을 감싸고 꼼짝도 못했다.
  “잘 있어. 이제 다시는 서로 보는 일이 없을 거야. 돈은 잘 쓰겠어. 그 대신 널 죽이지 않겠어. 고마워. 그라시아스.”
  라파엘은 칼날을 침대 시트에 씻어서 접어 넣고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쳤다.
  밖으로 나오자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태양이 눈을 때리며 쏟아져 내렸다. 라파엘은 찡그려 실눈을 하고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아침 공기가 아직은 차가웠지만 이제 곧 따뜻해질 것이다.
  저쪽 모퉁이를 돌아 나온 낡은 차 한 대가 털털 소리 내며 굴러 와서 미겔 산체스의 집 앞에 멎었다. 강파르게 생긴 사내 하나가 내리더니 보고 있는 라파엘에게 날카로운 눈을 주고는 미겔의 집 계단을 두 단씩 뛰어 올라갔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라파엘은 긴장하며 미겔의 집을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놈이다! 언젠가 본 기억이 라파엘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멕시코의 총 보스는 라파엘을 믿을 수 없어서 제 2의 힛맨을 보낸 것이다.  

  셔츠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라파엘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쌔액 쌔액 평화로운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외진 공원 벤치에 앉아서 작은 라파엘을 쓰다듬고 있는 사이에 해는 더 떠올라 따뜻한 빛을 온 누리에 뿌렸다.
  라파엘아, 우리 같이 어디에든 가자. 우리가 살 곳이 어딘가에는 있을 거다. 나는 너를 절대 버리지 않을 테니까 너도 항상 나하고 같이 있어야 한다. 자리가 잡히면 전화를 한다. 어머니에게. 어머니도 너를 반가워하고 사랑해 줄 거야.
  앉아 있는 라파엘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아지 라파엘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라파엘이 올려다보았다. 아까 그 강파르게 생긴 사내가 권총을 들고 서 있었다.
  “여기 있었군. 한참 찾아 다녔다. 차가 없으니까 멀리 가지 못했을 줄 알았지.”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보스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더군. 미겔은 대신 내가 죽였어.”  
  사내는 목격자가 없는지 주위를 살핀 후 라파엘의 이마에 권총을 갖다 댔다.
  “이건 명령을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해서 조직이 시키는 일이야. 잘 가.”
  강아지 라파엘이 얼굴을 내밀고 맑은 눈으로 그 강파른 사내를 보고 있었다.

  여러 대의 경찰차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도착했을 때 강아지는 체온을 잃어가고 있는 라파엘의 피투성이 얼굴을 필사적으로 핥으며 어쩔 줄 모르고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김영문 (020211)  200자 X 9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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