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흐르는 섬 '천섬'

2007.01.31 14:56

박봉진 조회 수:634 추천: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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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강물처럼 깊이대로 흐르고 강물은 호수처럼 수면에 숨소리를 깔며 흐른다. 마구 쏟아 부은 홍수가 도시를 잠그는 물난리 때도, 초목의 뿌리까지 말라 비트는 오랜 가뭄 때도 수위가 꼭 같다는 호안. 흐르고 흘러야만 생명의 박동이 되사는 이치를 알고 있어서 그럴까. 천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들이 비누방울인 듯, 물거품인 듯, 둥둥 떠서 흐르고 또 맞물고 흘러간다. 어떤 것은 조개껍질 안의 영롱한 자개로, 어떤 것은 반짝이는 사금파리로.

미국과 캐나다 간의 국경을 이룬 오대호, 그 바다 같은 온타리오호수와 세인트로랜스강 어귀에 점점이 떠서 흐르는 천섬(Thousand Islands)은 그런 인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를 뿐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고 했지만, 세월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해돋이 날의 삽화와 물 이내 푸르스름할 저물녘도 저렇게 수미(首尾)를 잇대며 흐르고 있지 않는가.

어느 해 초가을 무렵, 이웃 세 집이 모여 미국 동부 여행길에 올랐다. 천섬투어 예약은 나이아가라폭포 관광이 끝나는 날에 맞춰 출발 한 주 전에 해두었던 터였다. 그래 대륙이동은 비행기로, 자동차는 현지에서 렌트하기로 했다. 그날은 이른 아침부터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리긴 했지만 생기를 되살린 나뭇잎들은 더 진한 원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이아가라폭포가 있는 버팔로에서 미국의 호변도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지도상으로 익힌 이정표보다는 훨씬 먼 거리였다. 호수와 강이 만나는 거기는 나이아가라폭포에서처럼 캐나다의 옛 수도 ‘킹스턴’과 미국 쪽 수역이 맞닿아있어 두 나라에서 나온 투어 배끼리는 서로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운하가 패인 덕에 그 강 하류는 몬트리올을 거쳐 대서양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비 갠 날의 풍경화는 화가가 아닌 사람도 그려보고 싶은 그림이 아니던가. 그런데 투어 배는 선착장에 묶여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왔기 때문에 그날 출항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물러설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비는 그쳤을 뿐더러, 한 주 전의 예약이 받아졌기에 캘리포니아에서 예까지 온 것 아니냐고 말했다. 드디어 묶인 배의 밧줄이 풀렸다. 다른 승객들이 없었으니 우리 일행 여섯 명보다 승무원 수가 더 많은 보기 드문 일이 연출되었다.

그 투어 배는 족히 팔구십 명쯤은 탈 수 있을 작지 않은 배였다. 그런데도 베니치아의 골목 수로를 누비는 곤도라처럼 섬과 섬 사이의 물살을 날렵하게 가르면서 녹음된 테이프처럼 안내 말을 내보내고 있었다. 천섬지역은 섬뿐만 아니라 물가에 즐비해있는 수많은 별장들과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구도를 채웠다. 그림에서나 보았음직한 짙은 색깔의 단풍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호수인지 강인지가 분간되지 않았다. 어떤 섬은 고색창연한 고성을 들어앉힌 위용에다 주변경관을 최대한으로 돋보이게 해놓았는지 규모가 만만찮았다. 어떤 섬은 겨우 오두막 한 채와 나무 두 그루 그리고 부교 선착장이 전부인 작은 섬이었다. 무인도도 있었다. 그러나 주인 없는 섬은 없다고 했다.

대 빙하기(The Great Ice Age) 때 쏟아내어진 보석 같은 천섬이지만, 거의 대부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개인소유라고 했다. 전기와 전화와 수도는 물밑바닥으로 끌어 들였고 오물은 매주 수거배가 섬을 돌며 거둬간다고 했다. 물이 너무 맑아 어떤 곳에서는 꽤 깊은 물 바닥에 그어놓은 국경선이 보였다. 거기는 운하 수로를 통해 대서양을 드나드는 배에 붙어와 서식하고 있는 줄무늬 조개 이야기가 이채로웠다. 조개 하나가 물 1리터를 정화해내며 제 몫을 담당하고 있다니 더 놀라웠다. 이곳 이상으로 자연 친화적인 삶이 영위되고 있는 곳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천섬투어에서는 특별히 두 군데의 섬이 무적(霧笛)의 여음처럼 관심을 끌었다. 작은 섬이라도 나무 두 그루 이상이면 별장이 들어설 수 있는 조건이라니-. 그 같은 작은 섬 2개를 함께 소유한 한 섬주는 양쪽 섬에 미국국기와 캐나다국기를 꽂아놓고 채 십 미터도 안 되는 구름다리로 이어놓고 있었다. 말인즉 세계에서 가장 짧은 국경다리라나. 대단한 자존심일까. 아니면 풍자일까. 어쩜 생떽쥐벨리 작품속의 어린 왕자가 보았던 자기별 한 개씩을 차지하고 있은 별의 성주처럼, 그 사람의 소유개념과 의도가 은연중에 나타나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하나는 심장모양으로 생긴 하트섬(Heart Island)이 천섬투어에서는 백미(白眉)였다. 그 섬에는 독일 라인랜드성의 완벽한 복제품 볼트캐슬(Boldt Castle)이 있다. 이에 얽힌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 일게다. 그것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주인 볼트씨가 지으려했던 미완의 캐슬이다. 그는 십대 때 독일에서 뉴욕으로 이주, 호텔 주방장일을 성실히 해냈고 나중에 호텔소유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유명한 야채요리 드레싱의 대표적 상표 ‘다우전아일랜드’ 드레싱은 볼트씨의 호텔 주방장이 만들어낸 것으로 그의 별장지인 이곳의 지명에서 상표명을 땄다는 것이다.

그는 1893년 가족동반 천섬에 왔다가 주위 경관에 매료되어 하트섬을 구입했고, 120개의 방이 들어갈 11개의 복합건물 캐슬을 지어 아내에게 선물할 계획이었단다. 1904년 공정의 90퍼센트까지 진행되었을 무렵, 그가 섬으로 오던 도중에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는 천섬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하트섬에는 그런 애사와 미완성의 캐슬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 여운의 소리에 귀 기울인 사람이라면 저마다의 생각을 가다듬어보았으리라.

현재는 비영리 기관이 관리하고 있는 하트섬과 볼트캐슬이 내 뇌리의 실타래를 풀어주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때 섬광처럼 스친 말씀의 한 구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것은 우주인의 시선으로 읽혔으면 좋겠다. 애면글면 털고 닦고 매만졌던 애장품들도 결국은 사금파리며 조개껍질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일생이나 부귀영화도 한 낱 물거품일 것이며 절절했던 사랑도 애써 성취했던 것들도 지내놓고 보면 소꿉장난 아닌 것은 없을 터인데 누가 무엇을 완성하며 완성한들 그게 무엇이랴.

섬도 강물도 흐르고, 호수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까지도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며 유영하듯이 알게 모르게 흐르고 있으니 우리들인들 흐르지 않을 수 있을 건가. 흐름은 분별없는 하루하루의 끝인 동시에 맞대어 잇는 거듭됨의 시작인 것을.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나이가 들수록 순정했던 아이 때를 그리는 것도 흐름의 한 물줄기일게다. 그 물의 수위가 춘하추동 꼭 같음은 유속도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왜 정초의 초심이 섣달그믐까지 한결같을 수 없을까. 컴퓨터도 분석과 압축의 정리 프로그램을 해줘야 하듯 생각 속의 천섬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남해안 다도해변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이 오버랩된다.

나도 이만큼 인생의 강물 하류로 떠밀리며 흘렀는데 소꿉짝꿍 은숙은 어느 강변까지 흘러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날은 양지바른 언덕배기였으리라. 눈부셨던 사금파리 소품들이며 곱게 뉘인 풀각시와 황토 밥을 담으라고 속살을 비운 조개껍질들도 꼼지락거렸다. “너는 아빠. 나는 엄마” “응- 응-” 비음 섞인 대답이 한없이 정겨웠다. 그 때의 매미 속 날갯짓 음성이 귓전을 파고든다. 은숙은 내가 난생 처음 친했던 여아였다. 그리고 지금의 형편과는 무관하게 끝날 까지 그 이름 잊혀질 수 없는 여인이지 싶다.

천섬 호변 같은 바닷가, 잔물결을 넘어온 바람인 듯 아슴아슴 무쳐오는 애티 나는 그 음성을 오늘은 마주보며 들어보고 싶다. 그 은숙이 만나진다면 옛날처럼 어미 소 같은 눈매로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곤 할까.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낯가림하는 아이처럼 얼른 얼굴을 돌릴지 모르겠다. 천섬은 저마다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에 어쩜 논픽션보다는 디즈닐랜드의 스몰랜드처럼 동화로 읽어야 제 맛이 나지 싶다. 그리고 쉼 없이 흘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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