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레박 애환(哀歡)

2007.04.02 01:16

박봉진 조회 수:1160 추천: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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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애환(哀歡)

                                             

    없는 레박을 본다. 안장 없는 말 같다. 누군가에 줄이 잡혀있어야 제대로 서는 두레박. 하다못해 제 줄이라도 바닥에 깔고 있지 않으면 품세도 거북스런 두레박이다. 줄 없는 두레박이 샘가를 떠나 있으면 누가 두레박이라 할까.

    레박은 수세대를 풍미(風味)해왔어도, 육지에 올라앉은 배처럼 하릴없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있다. 반쪽 몸끼리 서로를 맞대야 하늘을 난다는 비익조(比翼鳥)처럼, 두레박은 불완전을 타고나서 그럴까. 장끼라곤 생김새처럼 양 방향 어디로든지 잘 엎어지는 것뿐이다. 그것도 말은 쉽다마는 요즘처럼 아무나 그리 통달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쉽고도 어렵고 어렵고도 쉬운 게 장기가 되는 세상. 그저 눈만 껌벅거려본다.

    레박은 둘 말아 올린 반 원통 함석에다 반원형 나무판을 양쪽에 붙였다. 그 위를 가로지른 막대기에 줄 맬 고리를 달고 있어 품세는 그저 그렇다. 흔한 재질에다 수공을 좀 드린 두레박이다. 산업세대이전 유물로 밀려나 먼지를 쓰고 있는 두레박. 거동은 위태위태하나 그 때문에 샘물을 잘 퍼 담을 수 있었기로, 쇠테 두른 나무물통 두레박이라든지 양철이나 고무로 찍은 들통 두레박들 보다 한때 총애를 받은 두레박이다.

    제부턴가? 깊은 샘에서 물을 퍼 올리곤 하던 두레박이 엉뚱해졌다. 대양을 건넌, 줄 없는 두레박이 예처럼 두레마을, 두레샘가에 모여앉아 딸각거리며 불티를 낸다. 보이지 않는 공간을 난다. 양 손끝이 팽팽히 균형 잡혀있을 때가 살맛났을 두레박들. 줄이 없어져버려 달리 살아갈 방도를 찾아봤던 걸까. 글을 퍼오고 퍼준다. 그림도, 음악도 퍼주고 퍼온다. 두레박들이 토방에 모여 않으면 나름대로 새끼줄을 꼬며 밤을 엮어갔다. 그래저래 찌그러지고 가라앉기도 하는 두레박에 손을 써주는 고마운 두레박도 있다. 자상한 속내만큼 너른 샘물 안에 보름달을 띄워놓고 달 샘의 서정을 나눠주고파 하는 두레박도 있고. 목마른 길손에게 버들잎 띄운 찬물 한 바가지라도 퍼주고 싶은 두레박도 있다.

    레박은 샘과 사람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베틀의 북이다. 인간 직조의 달인이기도 하다. 두레박이 없었으면 어찌 청정 물을 마셨으며, 음식을 조리해 먹었겠는가. 그래 두레박은 샘가를 잊지 못하고 제 줄을 그린다. 샘은 우리네 산실이며 이력의 본향이다. 두레박줄은 또 다른 능력자원이다. 귀한 인연들이 그 줄에 한 올 한 올 씨줄과 날줄로 엮여있다. 두레박이 어찌 스스로 샘가를 떠나며 줄을 풀어버릴 수 있었겠는가. 두레박줄은 복사꽃 환한 새댁들 손에서 주름살 손에 잡혀졌. 언제였나. 시골 마을 샘에 파이프를 꽂아 샘 뚜껑을 닫 , 두레박은 점령군에 무장해제당한 것처럼 줄을 풀 수밖에 없었으리.

    상은 참으로 희한해졌다. 땅속 깊은 곳에 생수로 고여 있던 샘물이 야트막한 산언덕 물탱크에 올라앉았다. 집집마다 봇물 대듯, 두레박을 잡던 손들이 수도꼭지를 매만진다. 깊은 땅속에서 퍼 올리곤 하던 물이 이젠 위에서 밑으로 흐른다. 예부터 퍼 올린 샘물 인심은 후했으나, 흘러드는 봇물인심은 설핏하면 물꼬시비를 벌렸다.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시치미를 떼곤 하지 않던가. 샘 같이 속내 깊은 사람, 샘물 같은 이웃을 어디서 만나며, 사리사리 늘어 뜨려주던 두레박줄 인정은 무엇으로 잡혀주고 받아 수 있을까?

    어지지 않는 샘가풍경을 기억으로만 더듬어본다. 고향마을 샘은 석간수 샘이다. 두레 샘이라 불렀다. 내벽은 암석지반까지 파내려갔다. 샘 둘레의 안쪽은 자연석으로 층층을 쌌고, 지상으로는 허리께 높이까지 빙 둘레 외벽을 쌌다. 그 샘물은 여름날엔 이가 시리도록 차가웠고 겨울날엔 추울수록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렸. 지금도 물동이를 이고 들락거리던 새댁들의 날렵한 맵시가 그려놓지 않은 풍경화로 눈에 아른거린다.

    때는 샘가를 통해 집집 소식을 전해 들었. 동네 길흉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누구네 집 담장안 일까지 입소문을 탔다. 물씬물씬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겼다. 두레박줄도 그 이전엔 장대로 줄을 대신했다. 장대 끝에 두레박을 매달아 물속에 밀어 넣었다가 올렸다. 그러다 새끼줄을 맸다. 프 줄로 갈아맸다. 나일론 줄로 바꿨다. 두레박줄을 새 줄로 갈아맬 때마다 사람들 옷차림도, 일용품도, 삶의 모양새까지도 달라져갔다.

    제는 두레박에 줄이 없다. 연줄 없이 뜨는 연 같. 땅속 깊숙이 내려갈 일이 없다. 샘물 물길이 바뀌었듯, 두레박 길도 수직으로 내려갔다 올라왔던 외길만은 아니다. 손가락 끝으로 깔짝거리면 세상 어디로도 종횡무진 내닫는다. 들이마신 숨을 내쉬어본다. 두레박이 묵시의 말을 한다. “사람을 사귀든, 글을 쓰든, 무엇을 하든, 어떤 일에든 살 푼 미쳐야 한다고.” 두레박처럼 한 우물에 자빠지고 엎어지지 않으면 잘되는 일이 없단다.

    레박에 줄이 매이고, 예처럼 두레 샘 참()물을 퍼 올릴 수 있다면, 첨벙첨벙 얼마든지 자빠지고 엎어지겠다. 무슨 일에든지 살 푼 미쳐서 첨벙첨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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