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하현 반달

2007.01.31 13:13

박봉진 조회 수:612 추천: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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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산책길에 하현 반달을 봤다. 얼마 전 추석을 지낸 터라 그때 봤던 보름달은 후덕한 여인의 환한 얼굴이었는데. 그 새 수척하게 여위. 마음속 수심이 박 넝쿨로 엉켜있진 않기를 바라련만. 혹 들어내 보일 수 없는 애틋한 사연들을 적요의 지창으로 가렸을까. 흘러내는 은은함이 냉기 같아 마음 시리다. 눈물 속에 피운 여인의 웃음이 아름답다던데 전설 속 박꽃인양 환했던 그 얼굴은 어느 경점에서 이울었을까.

    보름달은 시성 이백이 읊었던 시가들을 낳았고 상현 반달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같은 동요를 낳았다. 허면, 하현 반달은 무슨 산문을 잉태하고 있은 걸까. 버들잎 띄운 바가지 물을 실컷 들이켜도 갈증이 멎지 않을 그런 산문일지 모르겠다. 그러기로 하현 반달은 애틋한 그리움을 다 풀어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여인의 애련한 옆모습 같다. 왠지 쓸쓸하고 허전해 뵌다. 이 가을에 나는 무슨 열병을 앓고 있는 걸까. 마주봤던 그 모습이 눈에 짚인다. 두뇌 안의 접시 안테나 같은 것으로도 몇 컷 영상으로 마주하는 대담이면 좋으련만 언제나 미흡했던 눈길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불 박힌 망부석인양 지켜본들 그 옆모습도 시각적 한계 탓에 얼마간 상념에 잠겨 있다 눈을 내리 감고 만다.

    달의 상태를 만월로 표준삼아 본다면 LA 근교에서 보는 보름달과 한국에서 보는 그것은 많은 차이가 난다. 원래 음력 문화권인 한국에선 일몰 후 곧장 쟁반 같은 보름달이 동산 위에 둥실 떠올랐다. 다음날 일출 전에 서녘으로 이울었다. 그러기로 주야간 명암이 바꿔지는 때가 맞아떨어졌다. 러나 양력 문화권 LA 근교의 월출은 거반 하루 시차가 날뿐더러 일출기준으론 7-8시간이 앞서기 땜에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보름달은 떠올라있다. 명암이 바뀌는 때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보름 전날이 더 만월에 가깝다.

    하현 반달이 되는 날짜도 조금 일찍 당겨지기 때문에 그 반달을 눈여겨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새벽 미명부터 일출 전까지가 그 반달을 보는 최상의 때다. 이른 아침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이나 아침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만 하현 반달은 그 모습을 한 동안 보여줄 뿐이다. 그나마 가을엔 아침 안개가 자주 몰려오고, 한 낮엔 햇볕이 강열해 뵈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려진 그 무얼 찾는 거 보다는 눈앞에 잘 띄는 것에 먼저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기로 하현 반달은 사람들의 눈에 잘 뛰지 않아도 그만의 사색에 몰두해 있겠다. 어쩜 중년이후의 품이 너른 여인 같아 내 마음이 그쪽에 가까운 모르겠다.

    그 하현 반달이면 인생살이 회로애락과 기복을 다 격어 봤을 게고 더러는 아픔도 따랐으리라. 그래 체념할 줄도, 그리고 평정심을 되찾곤 했을 게다. 오욕칠정 같은 것은 초연한 경지에서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그 심령의 창에서 흘러내는 월광이면 깊어가는 이 가을 허허로운 내 심장 박동도 제대로 충전이 돼가고 있을 것만 같다.

    간혹 사람들은 순수의 마음호수에 침잠해있을 땐 굳이 말을 안 해도 서로 간 은근한 마음의 전의를 흘려서 알고, 눈빛으로도 읽어낼 수 있을 게다. 그만으로도 예사로운 인연은 아니지 않겠는가. 현대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순열조합 연분들이 인간관계의 실상이고 현주소이기도 하니까. 그 중 몇 만분의 일, 확률로도 만나질까 말까할 가려 뽑힘처럼 심령의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면 어떤 보석보다 더 귀하지 싶다.

    그래서 일까. 하현 반달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보면 나는 밀물 같은 안쓰러운 연민에 젖는다. 누구의 말이더라. “그리움은 만날 수 없는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만날 수 있는 그리움이다라는 그 말. 그래 그리움과 기다림은 시종 같은 주파수야지, 혹 엇박자가 돼질 거면 그건 픽션 소재로 한정됐으면 좋겠다. 초승달은 어느 전능한 천사가 잘라낸 손톱을 창공에 버린 거라고 해두자. 그게 말굽 쇠처럼 비워낸 동편 하늘을 차츰 채워 상현 반달이 되었다가 둥그런 보름달이 된다. 하현 반달은 서편 하늘로 그것을 점차 비워 내가다 끝내는 잘라낸 손톱이 반대로 놓이는 그믐달로 이운다. 하지만 짧지 않은 그 기간의 인내를 견딘 그리움과 기다림은 다음 주기로 돌아올 땐 환하게 둥근 보름달 월광이 될 터이다.

    문득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대화가 떠오른다. “네가 날 길들인다면 그건 놀라운 것이 될 거야. 황금색의 밀은 네 생각을 하게 해줄 거야. 그리고 나는 밀밭을 지나는 바람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그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라 그랬을까. 몇 해 전 나는 추석 보름달을 프랑스 국경을 넘어 이태리로 들어가던 투어 차 차창으로 봤다. 프랑스의 벌판과 구릉을 지나가며 황금빛 밀밭과 그 바람의 현장을 두리번거렸다. 부질없을 텐데도 심령의 주파수를 맞춰보니 그 대화는 그리 먼데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려지면 하현 반달은 밀밭이 되고 나는 이미 바람소리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그, 하현 반달은 활활 타올랐던 저물녘 노을, 그 모닥불이 다음을 기약해 다시 둥그런 보름달이 될게다. 그러게 하현 반달에서 볼 수 없었던 그 절반의 인내를 내 마음속에 담고 그리 길들면 좋겠다. 하현 반달의 깊은 속내에 침잠되고 싶다. 우리는 다 재생성 불허의 하현 반달일 테지, 그리 살맛을 더한다면 그것 만으로도 내 잔이 차고 넘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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