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개에 따라붙은 부정어를 생각하며

2007.01.31 13:52

박봉진 조회 수:485 추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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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보면 웃음이 난다. 장난감을 물어다놓고 있으나마나한 몽당꼬리를 꼼작거리며 나를 빤히 올려본다. 교태가 이만한 애첩이면 누가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있으랴. 쏜살같이 내달았다가도 곧 그 자리에 갖다놓는다. 그러다가 한 순간 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얼굴이 단다. 창조주는 먼저 동물들을, 나중에 사람을 만들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아지는 태어나 이레만 지나면 눈을 뜰뿐더러 빨리 성장해서 짝 짖고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지만 사람은 그러지 못하다.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내렸다하더라도 사람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편파몰이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맨하탄의 아들네 집에 가면 독일혈통의 중견 ‘헬멘’과 아침저녁 산책을 나다닌다. 그 이름이 ‘헬멘헷세’의 약칭이라니 대문호와 동행하는 산책인 셈인데 어찌 무덤덤할 수 있으랴. 걸으면서 말로, 눈빛으로, 줄을 늘였다 당겼다하면서 속마음을 나눈다. 그의 생각을 내가 다 알 순 없지만 그가 필요한 한도의 내 말은 다 알아 듣는다. 만약 내게 줄이 매였다면 그는 맹인 인도 견처럼 나를 이끌 테지. 하면 ‘헬멘’과 나를 이은 리쉬(Leash)는 어떤 연줄일까?

고층 아파트를 나와 횡단도로 하나를 건너면 이어지는 길은 수목이 울창한 도심 공원안의 뉴욕시장 관사 앞을 돌게 되고, 물살이 빨라 넘실대는 허드슨강변 길로 이어진다. 도시와 강 풍경이 일품인 전망 좋은 곳에 있는 ‘개 놀이터’에 들어선다. 리쉬는 풀리고 서로를 잘 알아보는 개들은 저네들끼리 냄새 맡는 것으로 인사를 나누고 공놀이와 뜀박질을 즐긴다. 원형극장 둘레 같은 높다란 의자에 앉으면 무슨 개 이름의 엄마와 아빠들이 붐빈다. 그들은 낯선 내게 인사를 건넨다. 그 때는 나도 ‘헬멘’의 할아비라고 내 소개를 할 수 밖에 ...

개와 함께 나다닐 때는 꼭 리쉬를 해야 하고, 비닐봉지를 준비해 다니다가 실례하면 즉시 치워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다. 인생길 걷다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좇고 좇길 때가 왜 없겠는가. ‘헬멘’이 앞서가고 내가 뒤따르면 나는 “개보다 못한 놈”, 나란히 가면 “개 같은 놈”, 내가 앞서면 졸지에 나는 “개 보다 더한 놈” 소리를 듣게 되고 만다. 사람들은 항상 개 입장보다는 자기 본위로 개를 폄하하기 일쑤다. 이렇게 개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때도 있는 걸보면 그래도 개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긴 있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리쉬에 선두 개 한 마리를 앞세우고 뒤에 한 마리 그리고 양 옆에 한 마리씩 도합 네 마리를 붙여서 걷는 사람도 있었다. 어릴 때 칙칙폭폭 기차놀이가 꼭 저랬으리라. 사람이 나이를 먹어도 저렇듯 개와 함께 지내다보면 동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렷다. 자못 흥미로워 알아봤더니 돈을 받고 개를 걸려주는 전문 개 걸리란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오는 데는 반시간이면 족하다. 마리당 15달러씩이라니 한 번 행차에 60달러라. 한 낮 8회만 개를 걸려도 4시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운 그깟 일로 일당 480달러. 한달에 21일만 쉬엄쉬엄 자기 운동 겸해서 걸려도 월수입 만 달러. 한화로는 천만 원이 넘는다. 이거야 말로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것”처럼 일거양득 아닌가. 나는 좀 들떠 아들에게 말했다. “얘, 나 은퇴하고 별일 없으니 너희 곁에서 개 걸리나 좀 해보련다.”

아들의 대답이 영 생뚱맞다. “개 걸리라고 아무나 하는 줄 아세요?” “그럼, 그것도 라이센스(License)가 있어야 하는 거야?” 아니란다. 그보다 엄청 더 어렵다고 했다. 고층 빌딩에 사는 뉴요커들은 조금이라도 자연 친화적이기를 원해 개와 함께 살아야하기 때문에 개는 주연배우 급 가족이란다. 그 개님을 지극 사랑으로 우대할줄 아는 사람이 쉽지 않거니와 비운 집안을 맡겨도 아무 탈 없을 만큼 완벽하게 크레딧(Credit)이 검증된 사람이어야 한단다. 인심이 그리된 것은 사람들 스스로가 저지른 과오이거늘 어찌 개에게 야속하다 할 수 있으랴.

사실, 요즘 사람이 개보다 나은 점과 개가 사람보다 나은 점을 대비하면 평행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오래전 숯장사 이야기가 떠오른다. 화물차에 숯을 가득 실어다 대구에 불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단다. 사과밭 중간 길에 들어섰을 때 잘 익은 사과들이 차를 스쳤다. 보는 사람도 없던 터라 아예 화물칸에 올라서서 수북이 사과를 따 내렸다. 그 때였다. 난데없이 큰 개 한 마리가 훌쩍 뛰어올라 앞발을 그의 양 어께에 척 걸쳤다. 꼼짝달싹도 할 수 없어 오금이 저렸다. 이글거리는 개 눈을 피해 얼굴을 돌리려면 어느새 개 주둥이가 그쪽을 막고 으르렁거렸다. 멀찍이서 다가서는 노인의 말이 들렸다. “그 개는 말을 다 알아들어. 이 놈아 잘못을 빌어라. 그러지 않으면 살아 못 돌아갈 줄 알아라.” 다급했다. “개님, 죽을죄를 지었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사이다.” 덜덜 떨며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는 개 같은 사람도 그리 흔치않을 게다. 그만하면 군자 칭호는 못 들을지 모르지만 괜찮은 사람 축에 들 듯 싶다. 개는 혹 사람 됨됨이를 몰라보는 실수는 할지라도 속이거나 배반은 하지 않는다. 허우대는 개가 핥다놓은 죽사발처럼 멀쩡하면서 금수보다 못한 빛 좋은 개살구가 얼마나 많던가. 개는 자기를 돌보는 주인에 대한 충견노릇은 그렇다 쳐도 멀리 팔려갔어도 주인을 그리워하며 죽을지경에 이르면서도 그 집을 찾아왔었다는 실화가 어디 한 두 건이던가. 사람보다 나은 개를 개보다 못한 사람이 야박하게 내쳤다는 대목에선 껑껑 신음 같은 개 울음이 뼈 속까지 파고들지 않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이 개를 빗대어 만든 말들은 참으로 맹랑하다. 대개 일본사람들은 ‘짝퉁’을 ‘가라’라고 가짜임을 밝혀서 말한다. 노래방의 오케스트라가 진짜가 아닌 가짜라고 가라오케라고 하는 것처럼. 그 같은 말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떤가. ‘짝퉁’표현이나 부정적 이미지는 죄다 개에게 씌워놓았다. 참꽃(진달래)과 개 꽃(철쭉꽃), 나리와 개나리, 그리고 개구쟁이, 개 차반, 이루 말할 수 없다. 하기야 품위를 지켜야 할 높은 분이 “깽판을 쳐도” 무엇만 되면 괜찮다고 말하는 판국이니 그저 기가 차다. 일례를 든다면 가난한 사람이 격식을 맞춰내지 못하고 치른 잔치를 개 잔치라고 했듯, 잘 치러져야 했을 행사가 중구난방 식으로 시끄러웠다면 개판이었다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깽판이라면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막무가내 행패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물론 그것을 본말로 쓴 것은 아니었지만 바야흐로 세상 돌아가는 것이 개판 정도라도 유지된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요 근래 “죽 쑤어 개 좋은 일 시켰다.”는 위인은 손가락에 꼽히지만, 허리띠 조리며 만든 개떡을 개에게 주었다는 사람은 없는 듯 하다. 모기장속에 모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 있듯, 개떡은 개가 먹는 떡이 아니라 사람이 먹고 연명한 떡이기 때문이리라. 개떡은 겨나 밀기울 보리 따위로 만든 그야말로 볼품없는 짝퉁 떡이다. 참(찰)떡은 찹쌀이 원료인 인절미를 말함인데 찰떡궁합처럼 찰진 응집력이 있어 한입 베어 먹으면 오래 속이 든든하다. 그렇지만 개떡은 시금털털한 그 맛에다 근기는커녕 먹어도 금세 배고픈 떡이다.

지금도 덴마크 사람들의 연회 식단에는 우리네 한식차림의 간장종지처럼 예의 그 개떡접시가 꼭 놓인다고 한다. 옛날, 그네들 조상들이 개떡을 먹으며 거칠기 짝이 없는 박토를 지상의 옥토로 일구었던 것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라고 한다. 자기의 말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했던 분이 보리떡 다섯 개로 운집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았더란 이적의 떡도 실은 개떡의 원형이지 않은가. 개밥에 도토리는 개에게도 쓸모없다. 개떡은 비록 짝퉁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먹기 위해 살기보다는 살기위해 먹었을 구원의 참 떡이었던 것을!

허울 좋은 그 무엇보다 개님 아니면 개떡으로 불릴 수 있으면 더없이 좋으련만-. 언감생심 그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주제에 내 말이 말 같잖다면 개가 먼저 하품을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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