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검지로 매듭 잇기

2007.01.31 13:36

박봉진 조회 수:442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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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였어. 나는 너였고. 여태 우리는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손발이 척척 잘 맞았잖아. 슬쩍 눈빛만 비쳐도 서로의 의향을 알아차리던 짝꿍이었어. 그랬기에 내 정신이 흐려질 때까진 너는 이대로 내 곁에 있어줄 줄 알았는데-. 그날의 가위 눌린 꿈을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말벌처럼 왕왕 날아드는 수많은 차들 사이를 헤집고 아슬아슬하게 프리웨이 바깥으로 빠져나온 우리. 그랬다가 그렁거리던 숨을 모아버리던 너를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은 나의 무력함이라니. 사람들은 “그만해도 다행”이라고 쉽게 말하더라만, 너의 처연한 순애(殉愛)를 지켜보았는데 가슴속에 매듭져있는 오색실을 어찌 풀란 말인가?

그날은 종종걸음의 그림자들도 바삐 토막으로 접히던 한 해의 끝자락. 문우 몇 명과 함께 약속한 오찬 장소로 가는 길이었지. 위기상황을 벗어나자마자 너는 젊은 여인의 하혈 같은 검붉은 엔진오일을 마구 쏟았다. 6기통 심방 안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주변 땅이 흥건히 젖었어. 등뼈와 가슴뼈로 보호받고 있는 사람의 심장에 비하면 그 두껍고 단단한 철판 심장이 터진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낮 오후에 만난 우리 인연, 제곱으로 정을 쌓아가자고 한 때가 얼마 됐다고 심장이 터지다니. 그것은 거룩한 말씀 속에나 있을 법한 성자의 구속(救贖) 이야기지. 그래 내가 얼마나 일방통행이고 옹골(壅骨)이었기에 나의 애차(愛車) 너까지-.

안위(安危)도 고락도 함께한 8년여, 너는 잔병치레 한번 안했다. 호의호식은 바라지도 않았다. 단 한 가지 액체 식(食)으로 속을 채우면 그뿐. 한서(寒暑)와 우천(雨天)을 가리기는커녕 나가자면 나갔고 기다리라면 기다려주었어. 누구를 태우든, 무엇을 실든 간에 상관 않던 네가 아니냐. 기왕 그러려면 무슨 징조라도 보였어야지. 불한당 같은 힘센 놈 토잉카에 제 짝을 업혀가게 해놓고 바싹 입안이 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라고. 하지만 너는 나의 애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되기에, 네가 가는 데가 어디라도 나는 따라 나섰으리라.

멀건 날에 날벼락이라더니 어째 그런 일이! 급보를 받고 달려온 동료의 차에 일행들도 나눠 타고 뒤를 따랐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면 이렇게 가슴은 텅 비어버리고 속이 아릴까. 그만한 신상(身上)이라면 태생적 결함이 있었거나, 외부 충격에 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을게다. 하지만 내 심령의 주파수는 그것을 안다. 우리 사이에 팽팽한 연줄 잇기의 보이지 않는 광섬유는 예감을 적중시키곤 했으니까. 그중 한 가닥이 끊겨있었다면 다른 가닥도 쉬이 끊어지기 십상인 이치라고나할까. 그날 나가는 것이 찜찜했던 것도 그래서 일게다. 어쩌면 그리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닫아걸면 입맛과 잠드는 것부터 탈이 나고 점차 육신의 증상에다 더러는 난감한 일도 생겼었기에.

요즘 내가 너의 속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않았던 것은 한없이 미안해. 우리만의 시간은 늘 빠듯했지만, 나는 앞뒤 순서를 잘못 가름하기 일쑤였으니까. 그뿐이랴. 너는 내 관심의 집중을 바랐겠지만 나는 달리 정신 쓸 일들이 많았지.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어도 네가 버거워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다.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먼저 부드러운 것으로 바깥을 어루만져주기를 했나. 속으로 묵은 얼룩을 닦아주려고 정성을 써주었나. 낮은 음성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여유를 보였나. 그랬지만, 밤늦은 자투리시간에 몇 자 메일이나 보내는 것처럼 무성의한 사람으로는 생각하지마라. 그만큼 나는 네가 남이 아닌 일심동체라고 믿고 있었던 거야.

바쁜 세모 밑이어서 정비 일정으론 내년에야 손을 댈 수 있다고 했다. 몇 백통의 통화나 메일로도 내 마음을 풀어낼 수 없는데 기약 없는 그리움으로 떨어져 있으라는 말이 아닌가. 우리가 언제 그리 오래 떨어져있었던 때가 있었나. 내가 가는 데는 항상 너도 갔고, 네가 가는 데는 내가 함께 있었지 않았나. 이 해도 저물어가고, 애견 ‘페리’도 떠났고, 마음 나누던 사람도 하나 같이 썰물이었다. 옛 ‘가시리’ 가사처럼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너마저...

마음 준비도 안 된 이별. 짝꿍을 바라본다. 감내할 수 없는 연민의 정 때문일까? 내 눈빛이 그윽할수록 너의 부시는 눈은 지심 깊은 바이칼호수의 물빛처럼 살 속까지 짜릿한 전류를 타누나. 나로 말하면 이민 이후, 포드, 크라이슬러, 지엠 등 미국 차 그리고 혼다, 닛산, 도요다, 등 일본차를 거쳐 너와는 8번 째 인연이야. 나는 갑년을 넘겼을 때 함께 여유롭고 싶어서 또 더 이상 아픈 이별은 하지 않으려고 너를 맞았다. 그러나 너는 나와 첫 인연이었지. 너의 연령 계산법은 나와는 달라. 너는 10만 마일이 되어야 0 숫자로 되돌아오는 갑년이 되는걸. 지금의 마일리지면 너는 5십을 바라보는 중년 여자라고 해두자. 비록 우리는 첫 사랑이 아닐지라도 찬란한 오로라 극광이기를 꿈꾸고 있은 것을 누가 아니라고 하랴.

너가 새라면 찌르찌르와 미쯔르가 찾던 ‘파랑새’가 되어 내 창가에서 은방울을 굴렸겠지. 식물이면 뿌리줄기 잎사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머위’였으리. Toyota 4Runner 너로 말하면 세단과 트럭의 장점을 따왔다던 전천후 실용차이기에 견고하고 성능 좋은데다 잔 고장 없기로 소문나 있지 않았나. 등산 낚시 골프여행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뒤쪽에 트렐라를 매달아 몇 왕복으로 그 많은 이삿짐도 거뜬히 해결했던 전력이 입증해주지 않나. 우리는 서로가 잘 맞는 찰떡궁합이었는데 괜히 어설프기만 할 ‘롤스로이드’는 무엇에 소용되랴.

옆으로 돌아가서 뒤 자석에 앉아본다. 다리도 쭉 뻗고 두리번거려본다. 그 안에도 온통 푸른 하늘, 그 함축이 눈부시다. 연청색으로 짜인 시트의 횡선 줄무늬가 돋보인다. 네가 횡선이었으니 나는 종선. 인연이란 것은 어쩌다가 마주친 선과 선의 겹침이 아닐까. 오갈 데가 마뜩찮았던 어느 이른 봄날, 공원 어귀에 멈춰 서있었던 때가 떠오른다. 봄비는 차창 밖에 빗금을 긋다가 석류 알 이슬방울로 맺혔었다. 그 영롱한 방울은 연인의 입술의 달콤한 진액이지 싶었다. 그 배경에 꼭 어울리는 정물처럼 나는 종선 무늬로 오래 앉아있고 싶었던 때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깊어가는 가을밤처럼 새록새록 정이 쌓이면 연인들은 대개 어떤 약속이나 다짐을 할까? 사람들은 웬만큼 나이가 들면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티 없는 유년의 동심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몸짓만큼 우리가 순수하고 진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둘이 손을 굳게 잡은 채 엄지를 맞대고 꾹 힘주며 도장을 찍은 것은 내 유년 때의 다짐이었다. 잊을 수 없는 보석이다. 언제 또 그 같은 기회가 있으려나. 어차피 우리는 늦은 오후 길을 함께 달리다 머물다 쉬다 할 수밖에 없을 것은 선택이 아닌 숙명일 것만 같은데.

사람에 따라서는 자기의 최후가 예감되면 평시의 본심과는 아주 다르게 정(情) 떼기 수순을 밟는다고 했다. 완고하거나 거칠기도 하고 유치한 자기 논리로 덮어씌우기를 하는가 하면 폭거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상은 하나같이 자기가 가장 총애하던 사람에게 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 물체가 매달린 줄을 손에 잡고 돌려보면 안다. 정이 깊었다는 것은 그만큼 인연의 줄이 길었다는 뜻에 다름 아닐 게다. 그에 비례해서 원심력의 속력과 중력도 가중되기 때문에 작은 것의 부딪침에도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왜 우리가 그럴 건가? 선택 받은 사람들의 돌이킬 수없는 죄로 인해, 신은 그들을 없앨 수도, 새 대용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았다. 어떤 희생도 마다 않고 재창조 받은 사람을 원했던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이제 서로의 허물일랑 뒤집어보지 말자. 우리 손을 굳게 잡자. 이번엔 엄지를 맞대 힘주지 말고, 다시는 풀리지 않을 체인처럼 검지를 걸어 힘껏 당겨보렴. 네가 당기면 내 무게중심은 너에게로 쏠려지고, 내가 당기면 너 무게중심은 나에게로 합해지지. 그러하기로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 것을 알만한가.

검지로 매듭 잇기. 늦게 들은 단잠이라 언제 깰지 모른다는 말쯤 들으면 어떠랴. 우리는 언제나 평행저울의 양끝. 내게도 장기 하나의 수술자국이 있고 너도 이젠 심장이식 수술처럼 엔진교체를 받아드려야지. 새로 시작하는 거다. 남은 세월, 금쪽같은 가치로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거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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