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탐진강의 돌베개 찾아 떠난 친구에게

2007.01.31 13:48

박봉진 조회 수:482 추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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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나 이제 자유인 되어’ 그 유고집 속에 미리 ‘고별사’를 써놓아 멀리 떠나 살고 있는 내게도 작별의 정을 나누려 했나보다. 그와 나는 40여 년 지기이긴 해도 만난지가 오랜데 평소 그의 말씨처럼 익숙한 채취가 물씬 목안을 축였다. 6척 거구에 병치레 같은 것은 해본 적 없고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건장했던 그가 먼저 떠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먼동이 트기 전 천지에 자욱한 안개 속 길을 자꾸만 뒤돌아보면서... 아무도 모를 미지의 저쪽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인생의 여정을 눈 내리는 겨울밤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던가. 세월과 이별은 부르지 않아도 온다더니 한세상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이하면서 어울렸던 가족들, 친지, 선후배들과 착실한 작별의 아쉬움을 나눌 여유도 없이 이대로 떠나야만 한다. 예정된 이별이었음에도 왜 그리 작별의 인사와 저간의 자세한 사정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였던가?”

친구여! 우리는 6.25전란이 휩쓸고 간 50년대 후반 그 춥고 배고팠던 시절 고등학교 교정에서 만났지만 졸업 후 당신은 대학 재학 때 사법고시에 합격, 검사로 진출했기 때문에 항상 우리 동기들의 선두주자였지요. 그러나 우린 같은 모임 회원으로 자주 만나지 않았소. 어느 날 약속이 그리되어 사복은 입었지만 금 서릿발 모자와 견장이 번쩍거릴 대단한 사람들의 접대를 받는 자리에 나도 끼게 되어 친구의 지위만큼 과분한 응대를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 때는 우연인줄 알았는데 직장에 무슨 일이 생겨 다시 그들과 상면하게 되었을 때 나를 기억해주는 응대를 통해 친구의 우정어린 배려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이민 올 때 그러니까 78년 연초였네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추억 만들기라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연과 또 김포공항 출입국 관리 선에도 전갈을 보내 만약을 대비해놓고 환송해주지 않았소. 건장한 체구에다 호방한 웃음이 트레이드마크이지만 한없이 소탈한 성품과 순진한 눈매를 언제 어디서 만나라고, “추억은 인생을 두 배로 살게 한다.” 그 인용구는 어떻게 정리하라고, 다급한 사정을 조금도 내색 안하다가 그리도 홀연히 떠났소.

해군 법무관 시절 앳된 예비신부와 함께 벚꽃이 구름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던 군항도시와 온 산이 진달래 꽃물이었던 장복산 기슭을 거닐기도 하며, 진해만의 파란 물빛을 바라보고 장래를 설계하던 때가 아련한 슬픔처럼 느껴진다고 술회하면서 사랑하는 부인의 손을 어찌 놓으셨소. 성가한 아들 며느리들 앞에선 “매일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 녹음 짙은 산야, 흰눈 덮인 들판 그리고 늘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 앞에서 오늘의 나는 여전히 어제의 나다.”라고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시키며 뼈 속까지 저렸을 애련함 고이 접고 떠날 수 있었나요.

위암 선고를 받고 수술 후, 한 때는 건강해 보였으나 6개월 뒤의 확인 검사 때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어 앞으로 남은 생명이 불과 6개월 정도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했지요. 그 지독한 항암 치료를 견디어내면서 남들이 눈치 챌세라 마지막 공직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직무를 일일이 챙겼지만 그것이 한낱 허명과 헛것에 이끌린 것임을 신앙을 통해 체득하고 “다 늦어 철이 든 모양이다.”라고 담담히 술회한 것이 이리도 내 가슴에 아픈 침이 되는지요.

그 때 우리 친구들은 그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그 친구 요새 내왕과 소식을 딱 끊고 있는 걸보니 아마도 서너 차례 입각할 뻔했던 법무장관 자리에 너무 연연했었나 봐”라고 차마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을 반찬 삼았으니 말입니다. “속절없이 다가오는 제한 시간을 외면할 수 없다. 일생동안 내가 이 세상에 머물면서 남긴 흔적은 무엇인가? 소중한 분들과의 인연, 아름다운 추억, 힘겹게 일궈낸 인생의 이랑들을 그대로 지워버리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되뇌다가 회한 한 방울 삼키고 침묵할 독백인걸요. 친구는 술회처럼 “화려하지도 남루하지도 않았던 일생”을 되돌아보며 깜박깜박 소진되어가는 생명의 촛불 아래서 일생에 두 번째이자 유고집이 된 ‘나 이제 자유인 되어’를 집필하느라고 마지막 심지를 돋우어 태웠겠지요. 그것을 읽는 내 입안도 바싹바싹 졸아들었습니다.

그 유고집 머리말엔 “새로 가는 길은 미지의 세계이다. 두렵고 황홀하기도 하고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이 세상 순례자들이 가는 길은 생사가 엇갈려도 생전에 제일 애틋하게 경험했던 그 영역의 길을 따라서 가는 거지, 생판 낯선 길을 갈수는 없을 것이외다. 유고집을 살펴봐도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떠난다거나, 어둠의 들을 밟는다거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찬 희망의 들판으로 걸어가련다.”라고 일관되게 경험적인 세계를 말했으니 그럴 것만 같아요. 빙설이 잠시 녹는 계절, 물안개 가득 피어나는 북극권 어디쯤의 피안이 아니라 인생의 바닥 점을 치고 새 출발했던 그 시원을 찾아 가는 길일 것입니다.

남부(영등포)지청 검사시절 관내의 수도국 대단위 부정사건을 인지했던 것은 해양의 부빙처럼 그 아래는 정치권과 이권과 직속 고위선 까지 결빙되어있는 워낙 큰 덩치와 마주쳤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로운 열정이 물러설 수도 몸 도사리며 어물쩍 넘길 수도 없지 않았소. 대양에서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부딪쳐야 했던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귀양지 땅 끝 고을 장흥지청 가는 길은 온종일 기차에 시달려야 했고 구절양장 같은 아치산 고개를 넘을 때는 자동차 멀미까지 가세해서 외로운 유배객의 목젖을 더 붓게 했다지요. 그러나 일년 남짓 유배 생활은 친구에겐 진주알을 머금고 키운 진주조개로 거듭나게 했던 것입니다.

울고 들어왔다가 울고 나간다는 곳이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이고 인심이 아니던가요. “시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탐진강은 장흥의 명물 중 명물이다.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강 밑바닥의 돌멩이가 하얗게 다 들여다보이고 피라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정겨웠다. 나는 여름날 탐진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창안한 피서 방법으로 즐거움을 만끽했다. 강물의 깊이가 적당한 장소를 골라 돌베개를 만들어 가슴 위로 물이 찰랑찰랑 내려가게 하고 코에 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돌베개의 높이를 맞춘 다음, 밀짚모자를 얼굴에 덮고 누워있으면 그 즐거움은 그저 그만이었다.” 친구여 28년 동안 검찰조직에서 청장년시절을 고스란히 헌신했지만 그 때처럼 한가로이 넉넉한 자연의 품에 안겨 새 출발의 여력을 쟁였던 데가 있나요?

회오리쳤던 격동의 시대, 친구가 맡았던 주요 보직인 인천과 서울 검사장, 검찰 공안부장, 대검 중앙수사부장, 대구와 부산 고등검사장 등과 처리했던 유명 사건들은 바로 한국의 근대 역사였습니다. 부천 경찰서 문기동 경찰관이 시위 조사를 빌미로 여대생 권인숙양을 성 고문했다는 사건은 진실규명과 정권 차원의 축소은폐가 맞서 일파만파의 파고를 넘겨야 했던 것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또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어떻고요. 부검의사 등에게 회유와 협박 그리고 사건을 조작 왜곡한 막강한 조직에 대해서 메스를 대고 총수인 치안본부장을 구속시켰던 것은 권선징악의 주제를 다시 한번 일깨운 사례일 것입니다.

그러나 몸담은 조직과 그 위쪽의 인맥은 철옹성처럼 단단했나 봐요. 이른바 학연 지연에서 비롯된 성골검사(경북 고) 진골검사(대구 경북) 그룹엔 인연이 없었고, 도미검사(경남 고) 도다리검사(부산 경남) 그룹에도 끼지 않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몇 차례씩 내신에 올랐고 심지어 비밀리에 업무인계도 주어졌지만 그 고위직은 정의감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검사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키워 그 능력과 자질을 검찰 내부의 상사나 선배들로부터 인정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어떤 외적 배경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친구의 지론인데 자타가 인정할 만큼 요건이 성숙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자리에 나아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직자 개개인은 제각기 정부다.” 이것이 소신과 책임을 중시하는 선진국의 개념인데, ‘검사 동일체’니 ‘동반 순장’이란 전근대적 관행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사법고시 동기생이나 후배가 법무장관이나 검찰총장으로 발탁되면 본인의 사정과 의사는 아랑곳없이 그 동기 이상 기수는 조직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위해 모두 현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니-.

친구를 유배지로 내몰았던 옛 상사의 쓸쓸한 퇴임 때 도리어 그를 진심으로 위로했던 친구에게 들려준 그분의 말 “나는 이제 game set 인생인데 뭘” 아옹다옹 인생은 저마다 game set를 향해 달려가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그 조직 사회의 기류는 그것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지 싶습니다.

친구는 투병 중이었으면서도 ‘한국 형사정책연구원’ 원장실 창문을 열어놓고 청계산을 바라보며 독서에 몰입하고, 우면산을 등지고 앉아 살아온 세월을 관조하던 것이 마지막 추억이 될 것으로 예감하고 있었다고 하였지요. 그 무렵 또 한번의 해프닝, 법무장관 발탁을 위해 건강 조회가 왔을 때 친구가 올렸다는 그 기도가 내 마음을 숙연케 합니다. “주님! 저에게 출세보다는 건강과 힘을 주시고, 큰일보다는 작은 선을 행케 하시며, 부귀보다는 지혜를 갖게 허락하시고, 명예보다는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겸손을 갖게 해주시옵소서......

내 친구 고 김oo 검사를 추모하면서 나도 언젠가 한번은 탐진강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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