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암탉과 장모

2007.02.17 20:57

김학 조회 수:209 추천:5

씨암탉과 장모

  옛날 장모와 요즘 장모의 사위사랑은 몹시 달라진 것 같다. 백년지객(百年之客)이라는 사위가 찾아오면 옛날 장모는 씨암탉까지 잡아 대접했지만, 요즘 장모는 겨우 식당에서 삼계탕이나 한 그릇 사 주면 그만이다. 장모의 사위 사랑도 세월 따라 그렇게 변하는 것일까?

농경시대의 씨암탉은 살림밑천이었다. 암탉은 날마다 달걀을 낳고, 주인은 장날에 그 달걀을 내다팔아 자녀들의 연필과 공책을 사주거나 학비에 보태기도 했었다. 또 봄이 오면 암탉은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켰다. 옛날 장모는 그렇게 소중한 씨암탉까지도 잡아서 사위대접을 했던 것이다.

농경시대의 닭들은 닭장에서 살면서 낮이면 넓은 마당에서 자유롭게 풀잎이나 풀씨, 벌레, 곡식낟알 등을 쪼아 먹고, 어른 닭들은 한가롭게 데이트를 즐기며 살았었다. 그렇게 노닐다가 수탉과 암탉이 짝짓기를 하더라도 외설스럽거나 남세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닭들이 어느 때부턴가 부화장에서 떼거리로 태어나고, 대규모 양계장의 계사(鷄舍)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주인이 사다주는 사료만 먹고, 밤이면 대낮같이 밝은 백열등 불빛 아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살게 되었다. 해병대 훈련 같이 힘든 닭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겠는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속담도 농경사회시절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요즘 닭들은 죄도 없이 양계장의 계사에서 갇혀 산다. 그러니 개가 닭을 쫓을 리도 없고, 개가 쫓지 않으니 닭이 지붕으로 도망갈 필요조차 없다. 사실 요즘 닭들이 날갯짓이나 제대로 할 줄 아는지도 모르지만…….

닭!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닭은 이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가운데 열 번째에 해당하는 동물로서 사람과 아주 가까운 가축이다. 사람이 닭에게 집과 먹이를 마련해 주면, 닭은 사람들에게 새벽마다 시각을 알려주고, 달걀을 낳아주며, 심지어는 자신의 몸까지 바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돈을 벌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헌신적이던 닭들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다. 닭들의 비극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게 아닐까.

닭들이 죽어가고 있다. 병들어서 죽고, 고향과 외가를 잘못 두어서 억울하게 죽기도 한다. 조류인플루엔자가 몰고 온 비극이다. 지난해 11월 익산시 함열 어느 종계사육장에서 6천여 마리의 닭이 떼거리로 죽어서 원인을 밝혀보니 그게 바로 무서운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였다. 닭 병이 발생한 그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이내의 닭과 오리 수만 마리가 살처분(殺處分)되었다고 한다. 그 질병에 걸린 닭이야 죽어 마땅할지 모르지만, 건강하고 멀쩡한 닭과 오리까지 죽어야 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병아리가 되고 싶은 꿈을 간직한 달걀까지도 땅에 묻혀야 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또 그 질병이 발생한 지역의 종계장(種鷄場)에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간 병아리와 달걀까지도 모두 수거하여 땅에 묻었다니 그들이야말로 외가(外家)를 잘못 둔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처음엔 닭이나 오리뿐만 아니라 그 지역 내의 돼지와 개, 고양이까지도 모두 죽이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 계획이 취소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전라북도 익산에서 김제로 번지더니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북상했다. 이러다가 전국으로 번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그곳에서도 반경 3킬로미터 이내의 닭과 오리 그리고 달걀까지 모두 생매장될 것이니, 이러다 우리나라에서 닭이 멸종되는 건 아닌지…….

건강한 닭들과 달걀들이 항의 한 번 못하고 생매장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삼계탕이나 닭도리탕, 백숙, 튀김 닭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보시(布施)할 기회도 없이 죽어야 하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병아리가 되고 싶은 꿈을 펴지 못한 채 땅에 묻혀버린 달걀의 운명은 더 슬프다. 아니 그보다 더 억울한 것은 오리의 죽음인지도 모른다. 닭 때문에 죽어야하는 오리들의 비극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까, 구천을 떠돌게 될 그 닭과 오리들의 원혼(冤魂)을 누가 어떻게 위무해줄 것인가.

“나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인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생을 반성하는 시구(詩句)를 남긴 시인이 있었다는데, 닭이나 오리에게는 그런 조사(弔辭)를 남긴 글쟁이도 없어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2003년 12월에는 충북 음성에서 발생하더니 10개시‧군 18개 농장으로 번져 무려 5백만 마리의 닭과 오리들이 생매장되었고, 그 다음해 2월에는 충남 연기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종식선언을 했으나 3월에 경기도 양주에서 다시 발생했으며, 경남 양산에서는 야생까치에게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또 2005년 3월에는 북녘 땅 평양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여 21만 마리의 닭을 매몰하거나 소각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조류인플루엔자는 비자 없이도 국경과 휴전선을 멋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재주까지 가진 모양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사람을 염라대왕에게 데려가는 저승사자는 으레 검정색 옷을 입는데 이번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건강한 닭과 오리들을 포대에 넣어 땅에 묻는 사람들은 모두 흰옷차림이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잔인한 살생을 하다니……. 용케 살아남은 닭들이 자기 종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면 훗날 닭과 오리들은 흰옷 입은 사람을 얼마나 두려워할까. 백의민족의 후손인 우리들은 앞으로 닭이나 오리들과 좋은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14세기 유럽에서는 급성전염병인 페스트가 크게 번진 일이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유럽 일대를 휩쓴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1/4인 2,500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러나 그때도 페스트가 발생한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3킬로미터 이내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오직 예방과 치료에 힘썼을 뿐.

이번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뒤처리를 하는 걸 보면 지나치게 잔인하면서도 손쉬운 방법만을 택한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람이나 닭, 오리도 같은 자연의 일부이고, 조물주가 만든 피조물인데 사람과 동물 사이에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다. 무턱대고 반경 3킬로미터 이내의 닭과 오리를 잔인하게 생매장할 일이 아니었다. 감염된 닭은 눈물을 머금고 죽이더라도, 건강한 닭과 오리들은 약을 먹이고 주사도 놓아주며 살리려고 힘써야 하지 않았을까. 생매장된 닭과 오리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이명처럼 귀에 들리는 성싶다. 옛날 장모와 요즘 장모의 사위대접이 달라지자 닭들이 더 푸대접을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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