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2007.02.21 22:43

최민자 조회 수:440 추천:10

               살구
                                   최민자

슈퍼마켓 과일코너에서 올 들어 처음 살구를 만났다. 아늑한 살빛, 보드레한 살결, 바닥에 떨어지면 금세 사뿐 튀어 오를 듯, 탱글탱글한 맵시가 정답다.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살구꽃 피는 마을에 살아본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런지 살구가 반갑다.

살구는 여름의 전령사다. 사월 초쯤 꽃을 피워 6월이면 결실을 낸다. 성숙기간이 짧아서일까. 맛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못하다. 딸기처럼 왈칵 달콤하지도, 사과처럼 선뜻 새콤하지도 않다. 늦봄의 나른한 햇살 맛 같은 온아우미(溫雅優味)한 미각이라 할까.

살구의 피부는 따스하다. 주황도 아니고 살색도 아닌, 모호하고 아련한 빛을 품었다. 눈 오는 겨울 밤, 초가집 문창호지에 배어나던 불빛의 은은함 같기도 하고, 그 불빛 아래 모로 누워있는, 부끄럼 많은 여인의 살빛 같기도 하다. 살구라는 말의 뿌리는 어쩌면‘살’에 잇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밤색이나 수박색, 올리브색같이 과일 이름을 딴 빛깔이 많기는 하여도 살구색만치 사랑스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살구를 좋아한다고는 하나 사실 그리 자주 먹지는 못 한다. 잠깐 나왔다 들어가는 과일이라 못보고 지나가는 해도 있고, 살구를 먹으면 배앓이를 한다던 어릴 적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라 장바구니에 선뜻 주워 담게 되지도 않는다. 먼빛으로만 바라볼 뿐, 가까이 사귀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품게 되는 연연함 같은 것일까. 살구를 보면 반색은 하면서도 어찌어찌 그냥 지나쳐 오고 만다.
  
진열대 위 살구 옆에 오늘은 레몬이 놓여 있다. 작은 스티로폼 사각접시에 레몬은 두 개, 살구는 여덟 개씩 포장되어 있다. 살구와 레몬은 대조적이다. 레몬이 향기로 승부를 건다면 살구는 정감으로 호소한다. 레몬이 산뜻하고 감각적인데 비해 살구는 부드럽고 육감적이다. 야무지고 새침한 도회처녀 같은 레몬 옆의 살구는 솜털 보송보송한 시골색시 같다.

살구는 꽃도 좋다. 살구꽃 하면 고향이 연상 된다.‘살구꽃 피는 마을’‘살구나무 아래서’같은 말들은 살구꽃과 벚꽃을 확연히 구분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아득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바람난 살구꽃처럼’이라는 안도현의 시선집은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서 샀다.‘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라 노래했던 이호우의 시구에도,‘살구꽃이 아름다운 것은 고향을 떠나 본 사람만이 안다.’던 이어령의 글귀에도 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길을 가다가‘살구나무 집’이라 써 있는 간판을 보면 슬그머니 들어가 뒤꼍 툇마루에라도 걸터앉고 싶어진다. 달 밝은 봄밤에는 시골집 토담 옆에 화사하게 기대선 한 그루 살구나무가 되어도 좋겠다.

먹는 재미보다 짜개는 재미가 더 짜릿한 것이 살구인가 한다. 복숭아나 자두는 제 살을 움켜쥐고 놔 주지 않지만 살구는 다르다. 미련 없이 반으로 갈라져 깨끗하게 씨가 발린다. 양쪽 엄지와 검지 사이에 탱탱한 살구를 놓고 살짝 힘을 주며 잡아당기면 도톰한 살집 사이로 야물고 단단한 씨가 빠져나온다. ‘살구씨 속에는 살구나무가 들어있다’는 누군가의 시구대로, 씨앗 속에 웅크린 나무의 꿈을 더듬어보는 내 네 개의 손가락은 순결한 긴장감으로 잠시 행복하다.

을지로 어디쯤에 내가 좋아하는 영국찻집이 있었다. 옷가게와 분식집, 인쇄 공장 같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들어차 있는 길거리 이층에 작은 간판이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었다. 처음 그 집을 발견했을 즈음엔 잡풀더미 사이에 핀 패랭이꽃을 만난 듯 작은 기쁨으로 설레곤 하였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밀 때마다 문 뒤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로 쟁그랑거렸다. 낡은 소파 깊숙이 몸을 부리고 앉아 얼 그레이 살구 맛 홍차를 시키면 심부름하는 처녀아이가 고풍스런 은주전자와 은제 찻잔을 탁자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갔다. 먼지를 담뿍 뒤집어 쓴 타자기, 고장 난 선풍기 사이에 앉아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엔틱 찻잔을 바라보면서 서럽고 진한 재즈의 선율에 취해 보는 것도 내게는 사치스런 즐거움이었다. 여닫이 창문 바깥으로 일렁이는 플라타너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낡고 오래된 것들 사이에 끼어 앉아 천천히 평화롭게 늙어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곳에 정을 붙이게 한 것은 재즈도, 홍차도 은제 찻잔도 아니었다. 언제보아도 한결같은 주인여자의 미소가 그윽한 살구빛을 닮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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