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손

2007.02.22 19:22

정목일 조회 수:151 추천:8

푸른 손 -鄭木日-

3월엔 봄비가 되고 싶어.
얼어 붙었던 나뭇가지에 내려서 말하고 싶어.
손 잡고 싶어. 눈맞춤 하고 싶어. 귀엣말로 부드럽게 속살거리며 .
훅훅 입김을 불어 넣으며 말하고 싶은 걸.
뼈 속으로 스민 한기를 녹이면서 살갗이 터지는 고통과 외로움을 모두 벗겨주고 싶어.
빗방울 하나 씩으로 가지에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되고 싶어.
그리운 말로, 설레는 말로 굳은 가지와 마음 속으로 수액이 되어 흐르고 싶어.
늑대처럼 울부짖던 바람에도, 꿈쩍도 않던 나무에게 생명의 음표들을 달아주고 싶어.
툭툭 깨어나 잎눈이 되는 생명의 말. 새롭게 피어나는 말.
생명의 향유를 가져다 언 몸에 뿌리고 쓰다듬어 줘야지.
방울 방울 가지에 맺혀 꽃눈이 되고 잎눈이 되어 산과 들판을 물들이고 싶어.
세상을 초록으로 바꿔놓고 싶어.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찾아가고 싶은 걸.
봄비가 내린 후의 산빛을 보고 싶어. 얼굴을 씻어낸 숲의 얼굴을 보고 싶어.
맑고 신비로운 빛깔이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생명의 향연.
막 몸을 푼 임산부의 표정에 감도는 평화로움-.
산과 들에는 어머니의 젖내가 풍기고 있어.
잠을 깬 흙들이 가슴을 펴 심호흡을 하고 있어.
짐승의 발톱같이 날카롭던 바람은 아기의 머리결처럼 부드럽게 닿아오지.
봄비가 내린 후면 눈맞춤할 게 많아. 불쑥불쑥 솟아난 새싹들-.
아기의 잇몸을 뚫고 돋아난 새하얀 치아같은 -.
자운영, 민들레, 할미꽃들의 빛깔을 좀 보아.
구멍에서 나와 행렬을 지어 햇빛속으로 기어가는 개미떼들을 보아.
어린 풀숲에 벗어놓은 뱀의 허물을 좀 보아.
논 속으로 뒷다리가 생길락 말락한 올챙이들을 보렴.
나뭇가지를 물어와 둥우리를 고치는 까치부부.
나뭇가지에 가느다란 줄을 매달고 대롱거리는 곤충의 번데기를 보아.
실보다 더 가냘픈 줄에 매달려 꿈꾸는 곤충의 번데기 -.
마른 잎을 돌돌 말아 알을 숨겨 놓은 걸 보아.
따스한 온기와 숨결이 느껴지고 있어.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은 알들에서 숲의 노래가 들리고 있어.
날개가 푸드득거리고 있어. 내 일을 남들이 모르듯이-.
봄이면 해마다 되풀이하는 대지가 깨어나는 숨소리를.
대지가 몸을 푸는 빛깔, 향기, 소리들은 세상을 생명의 신비에 넘치게 하지.
3월엔 봄비가 되고 싶어.
깨어나는 모든 생명체에게 노래가 되고 빛깔이 되고 싶어
.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봄비가 되었으면.
마른 가슴을 적셔 꽃눈과 잎눈이 되게 방울방울 움들이 피어나게
. 그 움들이 푸른 산이 되게. 초록세상이 되게. 한 번이라도 봄비가 되었으면 해.
따스한 입김과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
고통의 신음을 지워주는 기도가 될 순 없을까.
설움을 풀어주는 노래가 되어 찾아갈 순 없을까.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슬픔을 주는 비였을 뿐이야.
공연히 우울에 젖게 하고 몸을 떨게한 빗방울이었을 뿐이야.
이제 봄비였으면 해. 한 방울의 봄비. 봄비로 가 닿고 싶어. 너에게 -.
외로운 이웃에게 파란 손을 내밀고 싶어.
땅 속 깊은 곳에 묻힌 씨앗들에게 말하고 싶어
. 내 생명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리고 싶어.
3월이면 봄비가 되고 싶어. 너에게 닿아 꽃눈이 되고 싶어.
잎눈으로 피어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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