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 앉아서

2007.03.16 22:54

강숙련 조회 수:341 추천:8

               꽃밭에 앉아서
                                                              
                                  강 숙 련

  스무 살 무렵에 내 나이 마흔이나 쉰을 상상하며 끔찍해 하였던 적이 있다. 정말이지 환갑·진갑을 맞게 될 것이 남의 일 같았다. 한술 더 떠서, 꽃으로서의 인생은 끝장이라고 지레 호들갑을 떤 것 같기도 하다. 지는 꽃의 안타까움을 못 견뎌 조바심쳤던 게다. 왜 그랬을까. 자신과 패기로 만만했던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러나 마흔을 넘겨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도 내게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도록 설레고, 봄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면 자신도 모르게 자지러진다. 끝장은커녕 지금이야말로 꽃다운 향기를 낼 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발아기와 개화기를 넘긴 만개의 절정이랄까.

  여자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도 근래의 경험이다. 얼굴에 기미나 주근깨가 살짝 깔린 모습이 보기에 그다지 싫지 않다. 산전수전 겪고 난 뒤의 ‘내용’이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굴곡을 돌아가다가 생긴 그림자가 꽃잎에 어리는 햇빛의 농담(濃淡)처럼 자연스러워 보일 뿐이다.

  잘생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리스 조각 같은 황금분할의 구조미를 겸비하였다면 미인으로서 금상첨화다. 게다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까지 갖추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절대가인을 쉬 만나랴. 내면의 미는 차치하고, 우선 밖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미의 척도를 갖다대며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미인관이다.

  미인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이 아닌 이상 제 나름의 눈으로 평가할 일이다. 결혼적령기의 남녀는 제 눈의 콩깍지가 기준이다. 믿거나 말거나 몽룡의 애간장을 녹였던 춘향이가 실제로 살짝곰보였다는 이야기도 있음에랴.

  내가 선호하는 미인의 조건은 눈빛과 목소리다. 흔희들 안광(眼光)이라고 하는 눈의 정기를 높이 산다. 거기다가 조금 낮은 듯, 너무 빠르지 않은 듯, 강약이 분명한 목소리의 미인에게 곧잘 매료당한다. 보이는 얼굴이 화질(畵質)이라면 목소리는 음질(音質)이다.

  아무리 뛰어난 미인이라도 나이를 먹으면 주름살이 깊어지고 피부가 탄력을 잃어 볼품이 없어진다. 왕년의 미스 코리아가 그저 그런 평범한 아낙이 되어 버리듯 세월은 미인을 질투한다. 게다가 험한 세상 목청 꺾을 일이 많다보니 좋은 목소리를 유지하기도 그리 쉽잖다.

  그러나 본인이 특별한 일로 자포자기하거나 정신을 놓아 버리지 않는 한 눈빛과 목소리만은 대체로 오랫동안 사람의 인상을 지키게 된다. 껍데기에 불과한 육신이 다소 망가졌다하여도 알맹이가 살아서 반짝이면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것이 잘 조화된 사람이 내 기준의 ‘미인’이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보이는 눈으로나 이성의 눈으로는 읽어 내기 어려운 것도 마음의 눈으로나 감정의 눈으로는 읽을 수 있다. 흔희들 ‘통하는 것이 있는 사이’라는 말을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하는 CF 음악처럼 차마 말로 하지 못한 것까지 너끈히 해내는 것이 눈빛이다.

  빛나는 눈, 살아 있는 눈에다 근사한 목소리를 더한다면 아름다운 꽃에 빼어난 향기를 갖춘 셈이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좋은 목소리. 그것은 마치 꽃밭에 앉아서 향기를 맡는 것과 같다. 후각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동물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후각이라던가. 사람의 향기를 눈과 귀로 느낀다.

  허나, 반짝인다고 다 좋은 눈은 아니다. 살아 있다고 다 좋은 눈빛은 아니다. 시기와 질투로 바쁘게 움직이는 눈이나 탐욕과 분노로 빛나는 눈은 주위를 불안하게 한다. 하이에나처럼 목표를 향해 무섭게 발광(發光)하는 눈초리도 피하고 싶다. 삶에 대한 의욕과 용기로 살아 있는 눈이라야 좋은 눈이다. 마음이 고와야 눈빛도 곱다는 말이다. 깊은 눈빛으로 탁하지 않은 음성으로 가만가만 다가오는 사람에게 나는 종종 반하고 만다.

  누구에게나 이십대는 눈부시고 찬란한 장미화와 같다. 겁 없이 오만하고 표독스러운 시기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 같고, 잘나고 최고인 것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제는 수수한 꽃이 좋다. 절이 삭아 더욱 부드러워진 눈빛과 음성에 마음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모여 있을 때 더 돋보이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새 나의 봄이 다 가고 있다. 이제는 지는 꽃도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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