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추왔재

2007.03.16 23:07

강숙련 조회 수:228 추천:8

              얼추왔재

                                 강숙련

  뒷산은 숨겨둔 애인처럼 애틋하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느날 부싯돌에 불 튀듯 눈이 맞았으니 이게 웬 열병인가. 나는 느껍고 귀한 마음으로 그를 대한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미안함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더욱 살뜰하게 탐미한다. 애인을 곁에 두고 홀대했으니 그 무심함이 송구할 뿐이다.

  그는 은근슬쩍 멋을 부린다.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치장으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조심조심 모습을 달리하지만 이미 시작된 관심은 그것마저 다 감지하고 있다. 어디 저 혼자만 그런가. 연애란 서로를 자기에게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것. 고운 물이 드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 나도 어느새 단풍이 된다.

  뒷산의 능선을 타면 나의 연애는 무르익는다. 누군가가 등산로의 곳곳에 아름다운 우리말로 푯말을 세웠다. 마치 긴 여행길의 표시판처럼 푯말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동안 그 어여쁜 우리말에 매료되어 더욱 열심히 뒷산을 오르내렸다.

  뒷산은 애인이요 남편은 동행이다. 쏜살배기에서 시작하여 얼추왔재까지 오르면서 줄곧 그런 생각을 하지만 조금도 죄스럽거나 부도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남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터, 우리는 삶의 동반자요 동업자다. 그러고 보면 뒷산과 남편과 나는 삼각관계인 셈인가. 어디선가 트라이앵글의 칭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장끼 한 마리 푸드득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 놈보다 우리가 더 놀란다. 어떤 날은 후닥닥 달아나는 산토끼나 청설모도 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한다.

  쉴참마루를 지나 엉금비탈을 아등바등 기어오르다 보면 산 허리춤에 이른다. 잠시 숨을 쉬고 신발 끈을 다시 졸라 맨 후 깔딱거리를 정복해야 한다. 여기쯤이 제일 험한 길이다. 마치 인생의 보이지 않는 고비 길을 힘겹게 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등산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길은 험하지만 아직 괜찮다. 이제 겨우 시작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 스물이나 서른이었을 적엔 삶 자체가 다분히 도전적이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보다 동경과 의욕으로 팔팔하던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등산로의 초입에서 지쳐 버리면 안 된다. 갈 길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문제는 헉헉 숨 턱을 넘을 때부터다. 과연 숨이 턱에 닿는다. 큰 바위를 쪼아 만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보면 울창한 송림 속엔 바람 한 점 없다. 어디 쉬어 갈만한 곳이 없나 두리번거려 본다. 하지만 그런 여유조차 없다. 좁다란 등산로는 두 사람이 비켜가기에도 버겁다. 헉헉 숨 턱. 그 이름만큼 힘든 과정이다. 내 인생의 마흔 고개쯤 되는 셈인가. 너나없이 중년의 고개를 넘을 때는 힘이 든다. 사는 것이 고해라고 했던가. 지친 심신을 달래 주려는 듯 미륵을 모신 암자가 길손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기에서 쉬어 가는 등산객은 별로 없다. 석가가 입멸한지 56억7천년 후 중생을 제도하려 나타난다는 미륵이여, 갈 길이 바쁜 중생의 발걸음을 이쯤에서 멈출 수 없나니 굽어 살피소서.

  아차 하는 사이 되 내리막이다. 여기에 들어서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줄곧 숨을 몰아쉬며 정상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와서 마주하게 되는 내리막 산길. 그것은 느닷없는 일과 맞닥뜨린 기분이다. 마치 살만하다 싶을 때 암 선고를 받아 절망하는 머리 희끗한 어떤 남정네의 심정이랄까. 되 내리막은 복병처럼 나타난 장년의 위기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든 경우도 있다. 이제 발걸음을 늦추어야 한다. 잠시 오던 길을 되돌아보고 저기쯤 보이는 황금빛 정상을 향해 숨을 고르기도 해야 한다. 이 고개를 넘고 나면 다시 오르막이다. 힘을 내라. 고지가 바로 저기 아닌가.

  드디어 얼추왔재에 이른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다 왔다. 체감온도라는 말이 있듯 체감거리라는 말을 대본다. 하지만 얼추 온 것과 다 온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퍼뜩 마음의 눈을 뜬다. 고3 아들이 현관을 들어서고 있다. 어깨가 천근이다. 이럴 때의 부모심정은 깔딱거리가 된다. 아들의 기분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가 엇갈리는 깔딱거리. 아들은 막 엉금비탈을 아등바등 기어오르다 되 내리막을 탔을 것이다.

  아비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아들의 등을 다독인다.
  “얼추왔재? 힘 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9 5월 편지 정목일 2007.04.27 150
38 문향 그윽하신 그대여 글방 사람 2007.05.10 633
37 돌절구 / 손광성 손광성 2009.12.13 765
36 산타바바라의 파도 정목일 2007.04.26 217
35 노을벽 정목일 2007.04.08 229
» 얼추왔재 강숙련 2007.03.16 228
33 꽃밭에 앉아서 강숙련 2007.03.16 341
32 푸른 손 정목일 2007.02.22 151
31 꼬리를 꿈꾸다 최민자 2007.02.21 394
30 살구 최민자 2007.02.21 440
29 바람, 바람, 바람 최민자 2007.02.21 210
28 씨암탉과 장모 김학 2007.02.17 209
27 돼지고기 반근 정성화 2007.02.12 384
26 바다 손광성 2007.02.11 166
25 아름다운 소리들 손광성 2007.02.11 283
24 장작 패기 손광성 2007.02.11 407
23 돌절구 손광성 2007.02.11 245
22 풍경소리 정목일 2009.11.18 558
21 찬란한 이 가을에 김 학 2007.02.07 170
20 연하장 유감 하길남河吉男 2007.02.07 168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214,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