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벽

2007.04.08 10:22

정목일 조회 수:229 추천:10

                                   노을벽
                                                               鄭 木 日

사방으로 노을의 벽이 치솟아 있다. 언제쯤이었을까. 태고의 침묵과 명상 속에 노을은 그대로 화석이 된 것일까. 가장 아름다운 때를 맞춰 호홉을 정지시키고 눈을 감아버린 것일까.  하늘이 아닌 바위들이 붉은 빛을 토해내 노을을 만들 수도 있을까. 신이 무수한 돌기둥들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그려놓은 모습을 본다.

언덕 위에서 눈 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하고 신묘한 노을 벽을 바라보고 있다. 노을이란 저녁이 오기 전 태양의 마지막 정열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숨결이다. 하루의 신화이며 수채화 한 폭이다. 노을은 아름다운 고별사 같다.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공허와 적막이 사방을 채우게 된다.

노을을 바라보고 탄성을 자아내지만, 그 속에 비감과 허무가 깃들게 마련이다. 아름다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꽃이 지지 않고 미인이 늙지 않고 노을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생명이 내는 광채요 향기이다. 보석이 아무리 아름답고 값지다 해도 흔한 풀꽃에 비유할 수 없다.

노을에 끌리며 감탄하는 것은 이별의 미학이 아닐까. 사라지는 것들의 영혼과 진실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 집착, 그리움을 접고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노을처럼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잠시 후 사라질 노을의 아름다움을 애석하게 여긴 하늘이 거대한 협곡에 돌기둥을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세우고 사라지지 않는 노을을 그려놓았다. 영원의 화폭에 그려진 노을을 ‘그랜드 캐년’이란 이름을 붙여놓고 있었다. 이곳엔 두 번째로 온다. 첫 번째는 10년 전쯤인데 경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신이 큰 도끼로 협곡을 위에서 아래로 찍어내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듯했다.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다. 처참하고 아릿한 신음과 고통이 느껴져 오는 듯했다. 땅위에서 올려다 볼 때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까마득하게 위로 치솟은 돌기둥들에 누가 핏빛의 물감을 뼈 속까지 칠하여 놓았을까. 찬탄과 경외감 속에서 하늘과 그랜드 캐년의 모습을 올려다보던 기억이 난다.

한 대상일 지라도 바라보는 각도와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시간과 공간, 보는 사람의 기분과 관심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나는 언덕 위에서 크랜드 캐년을 내려다보고 있다. 도박의 도시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언덕이다. 그랜드 캐년의 영혼이 보이는 곳이다. 땅의 깊이, 하늘의 깊이, 태고의 깊이가 맞닿아 있는 곳이다. 골짜기의 지층이 핏빛 물 흐름 같기도 하다. 위에서 보면 깊이가 되고, 땅에서 보면 돌출이 될 것이다.

핏빛의 노을은 퇴적층의 나이테이다. 태고의 적막과 원시의 순수와 계곡의 연륜이 드러나 있다. 나무처럼 목리문(木理紋)을 가슴에 안고 있는 것일까. 퇴적층 한 줄의 무늬는 얼마의 세월이 집약된 것일까. 영원의 빛깔을 보여주고 있다. 노을의 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황금빛, 분홍빛, 초록빛이 섞여 있다. 장엄의 벽인 듯하고, 황홀의 벽인 듯하고 깊이에의 외경을 지닌 침묵의 벽인 듯하다. 신과 자연과 인간이 만나 영원의 대화를 나누는 곳으로 적합한 곳이다.

하루의 마지막 집중력을 기울려 삶의 의미를 비쳐놓고 사라지는 노을, 그 순간의 안타까움  과 황홀감과 아쉬움에 눈물이 나는 아름다움의 극치, 노을 벽을 바라보면서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사라지지 않는 노을을 만들어 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길과 삶을 떠올려보게 하려는 것일까. 노을 벽에 둘러 싸여 얼굴이 붉어짐을 느낀다. 나는 무엇으로 한 줄이라도 노을빛의 무늬와 색채를 남겨 놓을 것인가.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한 사람이라도 아름다워 찬탄이나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인가. 노을 벽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눈을 감는다.
오래도록 노을 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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