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절구 / 손광성

2009.12.13 11:07

손광성 조회 수:765 추천: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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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장안평에서 오래된 돌절구를 하나 사왔다. 몇 달 전부터 눈여겨 두었던 것이라 싣고 오는 동안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서도 뒷문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예쁜 색시 가마 태워 오는 신랑의 마음이 이러지 싶었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흠흠! 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음에 살며시 와서 안기는 것이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다. 잘 빠진 안성 유기 술잔처럼 오붓하고 반만 핀 튤립같이 우아하다. 얼핏 보면 범상한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다.

앞쪽 운두는 살짝 낮추고 뒤쪽은 그만큼 높였다. 앞을 낮춘 것은 앞턱에 절굿공이 부딪히는 것을 막을 요량인 것 같고 뒤를 높인 것은 확 속에 든 곡식이나 가루가 밀려서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듯싶다. 그 때문에 약간 기우뚱하지만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은 범위 안에서의 파격이고 보니 그 불균형이 오히려 단조로움을 깨는 효과를 내서 놀라운 생기와 여유를 연출해 내고 있다.

배는 너무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홀쭉한 것도 아니다. 잉태한 지 네댓 달은 좋이 되어서, 눈에 거슬리게시리는 아니고 보기 좋게만 알맞추 부른 그런 여인의 배 같다.

운두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선이 조용히 내려가는가 하면 어느 새 다리께쯤에서는 저고리 깃선처럼 동그스름하게 휘어진다. 이 휘어진 선이 다시 한 번 빠른 속도로 꺾이면서 직선으로 되돌아간 채 서서히 바닥까지 내려가서 멈춘다. 직선이 주는 날카로움을 곡선이 부드럽게 감싼다. 두 다리의 직선과 복부의 부드러운 곡선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오묘한 아름다움. 마치 토르소를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흔한 토르소가 아니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나 될까말까한 그런 드문 기회가 아니고는 볼 수 없는 토르소. 그러니까 미의 여신상이거나, 아니면 풍요의 여신상 같은 그런 토르소라는 이야기이다.

선은 부드럽지만 고려자기처럼 애조를 띤 것은 아니다. 이조자기처럼 튼실하다. 절제하면서도 사람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그런 선이다. 가락으로 치자면 진양조는 아니고 중몰이거나 중중몰이쯤이나 될까? 웃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삼화령(三花嶺) 협시보살 두 분 가운데서 왼쪽에 서 있는 애기보살의 웃음만큼이나 무구하다. 소박한 듯 단아하고 단아하면서도 속이 따뜻한 여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슬며시 다가가서 지긋이 안아 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기찬 물건을 만들어 낸 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석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주를 자랑한 흔적도 없고 돈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다. 도무지 계산속이 보이지 않는다. 열흘도 좋고 한 달도 좋다. 마음 속에 잠든 고운 님을 모셔 내듯, 그런 정성으로 쪼아 낸 작품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듯 구구절절이 사람의 마음을 잡고 놓지 않을 리가 없다. 어찌 보면 어떤 착한 머슴이 마음 속으로 흠모하던 주인집 젊은 마님을 위해 만든 것도 같고, 또 어찌 보면 길을 가던 나그네가 하룻밤 묵은 주막집 여주인의 정이 하도 따스워서 그냥 떠날 수는 없고, 마음의 한 자락이나마 남기고자, 한 조각 한 조각 쪼아서 만들어 놓은 것도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이 지긋해서 결혼한 한 지아비가 첫 애기를 잉태한 아내의 몸매가 하도 대견스럽고 고마워서 이렇게라도 돌에다가 옮겨 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절실한 마음에서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 편의 정겨운 시 같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은근하고 은근하면서도 다정한 저 표정과 몸매. 한 남자가, 그것도 20대는 아니고 30대쯤 되는, 뭘 좀 알기는 아는 나이가 된 남자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나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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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절구를 보고 있으면 가끔 갓 시집온 셋째 형수님이 생각날 때가 있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방안이 훤하다던 중매장이 할머니 말씀처럼 달덩이 같던 형수님은 늘 절구통 옆에서 뭔가를 찧고 계신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어린 나를 귀여워해 주셨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6ㆍ25때 헤어져야 했다.

갑산으로 가신다고 떠난 형님은 석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폭격은 날로 심해지고, 우리는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형수님은 친정으로, 나는 아버님이 계신 둘째형님 댁으로 가고 있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밭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는 거기서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자나무가 나오고 그 정자나무만 지나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 뒤통수에 자꾸만 마음이 씌었다. 내가 막 정자나무 뒤로 사라지려는 순간 멀리서 형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되련님, 몸 조심하셔요……아버님 말씀도 잘 듣구요…….

나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저녁 해를 등지고 계시리라.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울고 계실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바로 어제 일 같다. 그러나 벌써 마흔하고도 또 네 해가 지나고 있다. 험한 세상 어떻게든 살아 계시기나 했으면 싶다.

나는 이 돌절구를 현관 입구에 모셔 놓았다. 굳이 그렇게 한 것은 드나들면서 자주 눈맞춤이라도 하는 동안에 내 마음도 그처럼 오붓하고 단아해지리라는 믿음에서이다. 그리고 거기에 늘 맑은 물을 담아 둔다. 기도하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저승 갈 때는 누구나 빈손. 나도 언젠가 이 돌절구를 누구에겐가 주고 가기는 가야겠지마는 다 주어 버리기는 싫고, 그 아름다움만이라도 내 눈 속에 고이 간직해 두려고 한다. 저승 가서도 심심하면 우리 집에서 늘 하던 버릇대로 가끔씩 꺼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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