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편지

2007.04.27 12:28

정목일 조회 수:150 추천:9

                                  오월 편지


                                                                    鄭 목일

그리운 이여. 평생 시골에서 살아온 나는 봄이면 무엇인가 선물하고 싶어집니다. 혼자서만 산, 들판, 숲을 바라보는 게 아깝고, 기분과 맛을 느끼기가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그리운 벗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불현듯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그리운 이여.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보시겠습니까? 풀냄새 흙냄새를 맡으며 풀길 흙길을 걸어 들판 속으로 가보시렵니까. 자운영꽃이 지천으로 피어 하늘의 노을이 땅으로 내려와 있는 듯합니다. 묵정밭이나 습지에 깔린 자운영꽃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 삽씩 떠다 보내드릴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풀꽃을 품고 있는 흙을 보십시오. 겨울잠에서 깨어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어놓은 흙의 가슴을 보십시오. 물기 머금은 사랑도 보십시요.

그리운 이여. 버들피리를 만들어 보낼까요. 오월의 숲과 들판은 온통 초록의 나라입니다. 형형색색의 초목들의 잎새엔 자르르 윤기가 흐릅니다. 흙과 물과 햇살과 바람이 함께 나뭇잎에 향유를 발라놓았습니다. 축복과 은총의 빛깔을 내놓았습니다. 버드나무 호드기를 한 번 불어보시지요. 어린 시절과 벗들이 생각나실테지요.

그리운 이여. 숲길을 걸으면 이슬 머금은 엉컹퀴꽃을 만납니다. 가시가 촘촘히 박혀 만져보기 어렵지만 보랏빛 촘촘히 솟은 꽃술 안 수줍은 얼굴에 미소가 어립니다. 순란한 모습 속에 신비로움이 풍겨납니다. 들판에 눈부시게 하얀 찔레꽃 향기는 마음을 황홀하게 해줍니다.

그리운 이여. 보리밭으로 가보시렵니까? ‘빗쭁- 비비롱 빗죵 빗종-’ 종달새는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구름 속에서 꺼꾸로 떨어지며 신비음(神秘音)의 한 음절을 뿌려줍니다.그리곤 이내 투 스텝으로 가뿐히 날아오릅니다. 종달새를 바라보면, 파란 하늘이 열리고 금방 하늘로 날아오를 듯합니다.

그리운 이여. 앵두, 오디맛을 보시렵니까? 과수원이나 비닐하우스에서 기른 게 아닌, 자생으로 자란 열매들을 맛 보시렵니까? 소녀의 입술 빛깔 같은 앵두와 번데기 같은 까만 오디는 요즘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그리운 이여. 두릅, 가죽, 더덕, 치나물 맛을 보시지요. 우리 나라 기후, 물, 흙, 햇살이 키워내고 간장, 된장, 깨소금의 맛이 어우러져 낸 소박하지만 오묘한 봄 미각을 외국에선 어떻게 맛볼 수 있겠습니까. 상긋하고 청신한 두릅맛, 매캐하고 달짝한 가죽나물맛, 씁스레 하면서도 개운한 더덕맛, 상큼한 치나물맛.... 겨우내 산이 낸 담백하고 향긋한 산나물 맛에서 봄기운을 느껴보시지요.

그리운 이여. 묵혀 두었던 매실주도 꺼내 놓겠습니다. 차를 타고 절경 속의 정자로 가서 한 동안이나마 산천의 주인이 돼보시렵니까. 우전차를 들면서 달을 보시지요. 신록과 산능선을 보시지요. 흙들의 숨소리와 훈향을 느껴보시지요.

그리운 이여. 평생 여유롭지 못했고 도움만 받았을 뿐, 은공과 정을 갚을 길 없어 가슴에 품고만 지내왔습니다. 그 여유란 게 갖춰지지도 오지도 않음을 알 듯합니다. 봄이면 이런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무심결에 한 번 오시지요. 눈 앞에 펼쳐진 신록 속으로 우리 다시 태어난 듯 걸어가 봅시다. 오월 신록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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