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달구벌에서 열린 수필의 날 참관기(2)

2008.07.23 07:53

김길남 조회 수:100 추천:8

달구벌에서 열린 수필의 날 참관기(2)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김길남 프린스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둘째 날은 팔공산으로 갔다. 오늘은 방짜만 보는 날이었다. 방짜란 좋은 놋쇠를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드려 만든 놋그릇을 말하는데 보편적으로 아주 좋은 물건을 이르기도 한다. 처음 들린 방짜유기박물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징을 보았다. 기네스북에도 올랐다는데 지름 161cm에 무게는 98kg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인 이봉주 옹이 1년 걸려 만들었다고 한다. 하도 좋아 보여 한 번 두드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방짜유기는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마을에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이 여러 곳으로 퍼졌다. 남한에서는 안성이 유명한 유기그릇 생산지였다. 그래서 '안성맞춤'이라는 말도 생겼다. 무엇이든지 격에 딱 들어맞으면 '안성맞춤'이라 하였다. 전북 익산에서도 만들었다고 유기그릇 생산지도에 나와 있다. 방짜유기 생산과정은 구리와 주석을 78:22로 섞어 용해 및 바둑 만들기 네팜질 우김질 냄질 닥침질 제질 담금질 벼름질 가질 등 9단계를 거쳐 만든다. 각 단계의 작업과정을 영상으로도 보았다. 주물 놋그릇은 갯토를 가져다 주형을 만들고 암 수 양틀 사이에 쇳물을 부어 식힌 뒤 가질하고 광을 내어 만든다. 다량으로 생산하는 데는 주물이라야 하지만 품질이 방짜와는 비교도 안 된다. 놋쇠의 섞는 비율도 방짜와는 다르다. 혹시 생산도 하여 판매한다면 꽹과리를 하나 사고 싶었으나 파는 물건은 없었다. 훌륭한 박물관을 지어 1,480여 점을 보여 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다음은 동화사를 관람하였다.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된 고풍스런 건물이었다. 강당에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세상은 그대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라는 아주 짧고 멋진 말씀이어서 이것도 방짜라 여겨졌다. 대웅전 앞에서 김학 교수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 웅장한 약사여래 통일대불을 참배했다. 근래에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는데 좌대 높이가 13m, 대불 높이 17m로 전체가 30m인 큰 부처다. 몸 둘레가 16.5m나 되는데 8등분하여 만들었고 약 300톤의 돌이 쓰였다 한다. 둘레 벽에는 금강역사 호법신장 보살상 등 28점을 조각하여 대불을 호위하고 있다. 한 바퀴 돌며 소원을 빌고 성보박물관으로 갔다.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승병을 모아 싸웠다 하고 사용하던 불구가 여러 점 있었다. 전쟁 중에는 승병을 이끌고 많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셨고 종전 뒤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많은 동포를 구했다는 큰 스님이시다. 지하로 내려가니 탱화가 많았다. 아주 큰 괘불을 넣어 보관하는 궤가 있다. 큰 행사 때 신도가 많아 법당에서 예불을 올리기가 어려우면 마당에 괘불을 걸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이 때 사용한 괘불을 넣어 모시는 궤다. 길이가 527cm 세로 56cm 높이 51cm로 아주 컸다. 이렇게 큰 괘불은 처음이었다. 통일대불 앞 계단에서 450명이 모여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사진을 찍는 것은 처음이다. 그저 기념이니까 얼굴이야 나오지 않으면 어쩌랴. 대구은행연수원에서 폐회식을 하였다. 각 수필단체 대표가 나와 소개를 하고 우수 수필 낭송도 하였다. 시 낭송은 여러 차례 들었어도 수필 낭송을 처음 접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유심히 들으니 참 잘 쓴 수필이었다. 노래도 몇 곡 듣고 마지막으로 정목일 운영위원장의 인사로 이번 수필의 날 행사를 모두 마쳤다. 주관한 대구 수필사랑 팀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몇 가지뿐이지만 맛깔스러웠다. 마침 이응백 교수님과 마주앉게 되었다. 노 교수와 자리를 같이한 것도 영광이었다. 키가 작으셔서 탁자가 너무 높은 느낌이었다. 열심히 잡수시니 말씀을 나누기도 어려워 아무 말 없이 먹고 일어섰다. 이 교수님의 방송강의를 많이 들었는데 그 때는 젊으셨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빌었다. 방짜를 많이 본 둘째 날이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책에서만 알았던 원로 수필가를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좁은 내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여자들의 활동이 많다는 것을 느꼈고, 오랫동안 수필에 정진한 분들의 노고도 깨달았다. 생각을 문자화한 것이 글이 아니고, 갈고 닦아 숙성된 글이 수필이란 것을 알 것도 같다.                          (2008.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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