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옛 어른들의 얼을 찾아

2008.08.13 07:09

김길남 조회 수:84 추천:9

옛 어른들의 얼을 찾아 전주안골복지회관 수필창작반 김길남 전북향토문화연구회에서 무안과 신안지역 향촌 탐사를 한다기에 무더운 여름이지만 따라갔다. 관광버스는 빈자리가 없어 항상 적자이던 결산서가 오랜만에 흑자가 될 것 같았다. 고속도로도 잘 뚫려 무안까지 한 걸음에 갈 수 있었다. 처음 찾아 간 곳은 무안군 삼향면의 초의선사 유적지였다. 들어가는 길이 잘 포장되어 찾아오는 길손을 편하게 맞아주었다. 뒷산을 보니 바위 봉우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다른 산들은 거의 흙산인데 이 산 꼭대기만 바위가 뾰족뾰족하여 선비가 쓰는 정자관 같았다. 초의선사 생가 터라는데 배산임수의 지형에 산봉우리가 범상치 않아 큰 인물이 나올 법한 형국이었다. 이 산의 정기를 받고 선사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선사께서 산봉우리에 가부좌하고 앉아 찾아오는 중생을 엷은 미소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계단을 올라갔다. 울타리 가에 핀 나리꽃이 방긋 웃으며 맞았다. 생가와 기념전시관, 차문화관, 사당, 일지암 등이 알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사당 안을 들여다보니 스님의 영정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합장하고 예를 올렸다. 생시라면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붙잡을 것 같았다. 전시관에는 손수 쓰던 물건과 책이 많았고, 차문화관에는 우리나라 전통 차에 대한 문헌과 다기 등이 전시 되어 있었다. 초의선원은 차에 대한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일지암(一枝盦)의 편액 글자 중 암(盦)자를 몰라 애를 태우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뚜껑암(盦)자였다. 처음 보는 글자여서 알 수 없었지만 나의 무식함을 드러낸 꼴이다. 여러 명이 갔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초의선사는 1786년(정조10년) 4월 5일에 태어났다. 15세에 나주 운흥사에서 벽봉 민성스님께 의지해서 출가하였다. 해남 대흥사에서 완호스님의 구족계를 받았으며 초의(草衣)라는 법호도 받았다. 초의는 풀 옷을 뜻한다. 베옷을 입고 욕심 부리지 말고 살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으리라. 스님은 평생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경전을 배우고 범(梵)자를 익혔다. 탱화를 잘 그려 당대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글씨도 명필이었고 단청도 훌륭했다. 차 문화 부흥을 위하여 동다송과 다신전을 펴내기도 했다. 50세에 현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선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배불정책으로 배척받던 시절에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 사대부와 교분을 나눴으며 조선 후기 한국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승이다. 우리나라 차 문화에 이바지한 분으로만 기억했었는데 시와 글씨, 그림, 탱화, 단청 등에도 탁월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저서도 동다송, 다신전, 일지암 문집 등 9가지나 되었다. 스님으로만 알려질 인물이 아니고 문화에 끼친 공로가 더 큰 분이었다. 시간이 있으면 차 한 잔 마시며 선사의 얼을 더 더듬어 보고 싶었지만 갈 길이 바빠서 서둘러 나오려니 아쉬웠다. 새로 놓은 연육교를 건너 압해도로 갔다. 섬이지만 다리가 놓여 차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와보는 섬이라 새로웠다. 갯벌이 아주 넓어 산업기지나 식량 생산에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밭농사가 대부분이고 논도 더러 있었다. 참깨와 무화과를 많이 재배하였다. 따뜻한 곳이라 얼어 죽지 않으니 무화과가 잘 자라는 듯싶었다. 면 규모의 섬인데 옛날에는 압해고을이었다. 신라 때 당나라에서 대승상 벼슬을 하던 대량군 정덕성이 유배를 와서 압해 정(丁)씨의 시조가 되었고, 아들 4형제가 정씨의 파조가 되었다 한다. 정씨 시조묘를 참배한 뒤 후손의 설명도 들었다. 어쩌다 죄를 지어 머나먼 이곳까지 유배와 살았으니 한이 많았으리라. 그래도 우리나라 정씨의 시조가 되었고, 후손이 총리와 장관 등을 지냈으니 보람도 컸으리라 여겨졌다. 송공항으로 갔다. 연육교가 생기면서 인근 섬으로 가는 뱃길이 새로 열린 항구다. 목포에서 갈 때보다 1시간이 빠르다 하니 섬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마침 배가 떠나려는데 승용차도 여러 대 싣고 있었다. 지금은 바다에 다리를 놓는 일이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 큰 섬은 거의 육지와 연결 되지 않았던가. 앞으로 제주도도 다리로 연결할지 모른다. 생산성만 있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군산열도도 모두 곧 다리로 연결 된다니까. 목포에 가서 점심을 먹은 뒤 유달산을 잠깐 둘러보고 무안 일로읍으로 갔다. 우리나라 품바의 발상지였다. 길가에 돌로 된 비가 서있을 뿐이다. 인간문화재라 형태로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품바는 1980년대에 김시라가 각색 연출하고 정규수가 출연하여 인기를 얻었다. 4,000여회 공연을 하였고, 우리나라 품바의 1대가 되었다 한다. 장타령은 언제 들어도 구성지고 재미가 있다. 가사가 우습고 세속을 풍자하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 한다. 더구나 가무잡희가 곁들여져 재미를 더하니 좋아하는 게 각설이 타령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각종 축제가 열리는 곳마다 품바가 빠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화산백련지를 찾았다. 백련축제가 열려 구경꾼들이 많았다. 넓은 주자장이 다 차서 주차할 곳이 없었다. 1935년에 처음으로 이 마을 노인이 백련 12포기를 구해 저수지에 심었다. 그 날 밤에 하늘에서 학 12마리가 내려와 연잎에 앉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그 뒤 노인과 마을 주민들이 정성껏 가꿔 10만 평 저수지가 백련으로 뒤덮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은 백련이 핀 곳은 일부분이고 안 핀 곳이 더 많았다. 꽃 한 송이를 곰곰 살펴보니 미녀와 같았다.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반쯤 내밀고 방긋 웃는 모습이었다. 산들바람과 애기 연꽃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연못 둘레에 돌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꿨으며 정자도 짓고 길도 내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백련지가 되었다. 육교와 뜀 다리도 있고 온대 식물원과 분수 및 폭포도 있었다. 식물원에는 양털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처음 보는 선인장도 있어 신기로웠다. 접목 기술이 빼어나 별스런 선인장도 다 만드는가 보다. 한 바퀴 돌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반쯤만 돌았다. 어린 마음이 되어 뜀 다리도 건너보았다. 연못 가 정자에서 선배 몇 분과 친구랑 술을 한 잔씩하며 백련 향에 취했다. 옛날 선비들의 화전놀이도 이런 기분이겠거니 싶었다. 서늘한 바람에 웃음소리도 높으니 무엇이 부러울까. 시끌벅적한 곳이지만 즐겁게 쉬다가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 2008. 7.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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