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개성, 그 그리운 북녘 땅을 다녀와서

2008.05.27 06:48

공순혜 조회 수:95 추천:7

개성, 그 그리운 북녘 땅을 다녀와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공순혜 2008. 5. 14 오전 1시 30분 어둠의 장막을 뚫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북녘으로 달렸다. 오전 5시 30분 임진각 휴게소에 도착하여 이른 아침을 먹고 오전 6시 30분 임진강역에 도착하여 현대아산 셔틀버스를 이용 도라산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친 시각이 오전 8시였다. 비무장지대에서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데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전 8시 30분, 북측 CIQ(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15분 만에 북측 땅을 밟을 수 있는 수속을 마쳤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면 비자, 관광증, 카메라 검사 등 2시간 동안 복잡한 수속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외국을 가더라도 이렇게 복잡한 입국절차는 거치지 않는다. 우리의 조국산하 북녘 땅을 가는 데는 정말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힘이 많이 들었다. 아무리 먼 해외여행을 해도 한밤중에 출발해본 적도 없었다. 복잡한 수속과 절차를 거쳐 정해진 시각에 버스 13대가 일렬로 줄지어 관광을 시작했다. 첫 관광지는 말로만 듣던 박연폭포였다. 상상과 달리 그리 크고 웅장한 폭포는 아니었다. 북측 안내원 말에 의하면 비가 안와 물이 부족해서 그렇게 웅장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널찍한 바위에 황진이가 머리칼로 썼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슨 글자인지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글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사진도 한 장 찍고 글자도 몇 자 찍어왔다. 박연폭포 옆 고려 때 쌓은 대흥산성 북문을 통해 15분정도 오르니 970년 고려 광종 때 법인국사가 창건했다는 북한보물 323호 관음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이 절 왼쪽 깜깜한 동굴 속에는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유백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1.2m정도의 관세음보살 좌상이 중생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동굴 옆 오른쪽에 한 번 먹으면 10년씩 젊어진다는 약수가 있었다. 나도 한 모금 먹었으니 북녘 땅 관음사에 갔다 온 후광으로 10년쯤 젊어질지 모르겠다. 관음사 올라가는 길 바위마다에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란 찬양글자들이 난무해 얼굴이 찡그러졌다. 통일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노란 육첩반상기인 놋그릇에 음식이 차려졌었다. 반주로 술 한 잔까지 곁들이니 옛 양반가의 마님이 된 듯 흐뭇했다. 고생하며 개성에 온 보람을 느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만 일사불란하게 관광을 해야 했다. 거리나 주민들을 곁눈질하거나 사진에 담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거리거리마다 뙤약볕 아래서 표정 없는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학교가 끝났는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보초 선 군인이나 아이들에게서 땟물이 흐르는 가난을 읽을 수 있었고, 그들이 건네준 경계의 눈빛은 같은 동포로써 애처로울 따름이었다. 벌겋게 벗겨진 산하, 말라 비틀어져가는 보리농사 등 작은 창만 보이는 다 허물어져가는 주택 등 무엇 하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없었다. 오후에는 승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고려박물관 등을 관광하고 개성공업지구도 차안에서 구경했다. 선죽교! 우리 국민이라면 초등학생 때부터 배운 다리다. 상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조금 고풍스러운 조그만 돌다리일 뿐이었다. 거기에 깃들여진 충절의 정신이 국민 모두가 가보고 싶어 하는 마음속의 큰 다리로 만든 것이다. 정몽주의 붉은 핏자국이 묻어있다는 돌은 그때의 그 돌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던가. 고려박물관은 고려시대의 성균관건물과 부지를 이용하여 1988년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려를 품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처럼 보였다. 야외에서 불일사 5층석탑과 개국사 석등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석관과 벽화를 보았다. 죽어서도 함께 있는 왕과 공주는 지금도 사랑하고 행복할까. 기념물 판매소에서 학(鶴)문양이 들어간 아주 작은 주병(酒甁)모양과 촛대청자 두 점을 샀다. 나는 학문양 청자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것도 다 학문양이 들어간 거다. 남한과 북한의 학들이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앞 다투어 날아가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개성공업지구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며 보았다. 그곳에서 우리네 북녘동포들이 일하며 희망을 키우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남녘은 비싸지 않은 노동력을 얻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으니 남북 모두 다 의미 있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생의 협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남북한이 힘을 합해 잘사는 나라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실감해보는 시간이었다. 쫓기는 시간 속에 역사적인 의미가 큰 왕건릉과 공민왕릉, 만월대를 보지 못한 것이 서운하다. 그 유명한 송악산은 생각만큼 아름답거나 크지도 않은 산이었다. 다만 전설 속의 산으로서 개성인삼을 만들어낸 산이라니 개성의 명물로는 손색이 없을 듯했다. 오후5시 북측 CIQ 출경수속을 카메라 검사로 번거롭게 치르고 비무장지대를 넘어갈 때와 같이 15분이 걸려 넘어올 수 있었다. 남측 CIQ 도라산으로 돌아와 입경수속을 마치고 임진강역 셔틀버스를 타고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가슴 설레고 힘들었던 우리네 북녘 땅 개성관광의 하루는 이렇게 마감할 수 있었다.                           (200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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