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주부 9단

2008.06.09 02:55

최윤 조회 수:106 추천:9

주부 9단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 야간반 최윤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라는 것을 내가 체감할 정도이니 우리 경제가 어지간히 위기이긴 한가 보다. 경제적인 감각에선 거의 제로에 가까운 내가 그 위기감을 절실히 느낄 정도이니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군산도 땅값과 아파트 값이 치솟아 나도 무언가 경제적인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을 가지던 중, 좋은 아파트를 분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양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았다. 이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재산이 늘어날 텐데 그 돈으로 무얼 하나, 하며 그야말로 김칫국을 먼저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내 꿈을 깨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가 청약저축을 한달 늦게 드는 바람에 분양 1,2 순위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3순위라도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 접수를 하려는데 1,2순위 신청자가 너무 많아 3순위 접수는 안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대학입시를 방불케 하는 일이었다. 그 순간, 꿈이 깨어진 기분이랄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허탈함 같은 것이 들었다. 허탈감은 예전에도 많이 느껴봤지만 그것과는 다른 새내기 주부로써 느끼는 첫 번째 허탈감이 찾아 온 것이다.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가계부나 겨우 쓰면서 살아왔던 내게, ‘1,2,3순위’란 어렸을 적 전주교육대학부속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추첨을 위해 쓰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위란 말이 내겐 오랜만에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너무 앞선 기대를 했던 것일까? 어차피 내년엔 전주로 집을 옮길 생각이었기에 군산의 땅값이 오르든 어쩌든 그 소란스러움에는 동참하지 않고 싶었다. 그런데 내 적성에 맞지 않았으나 시도해 보았던 작은 나의 투자계획이 실패하자 난 허무함과 더불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까지 나왔다. 아마도 나 혼자만의 재산증식계획이 달성되었다면 그 자랑스러운 결과물을 들고 나를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 으로만 보던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더욱 서운했는지도 모른다. 허탈한 마음에 친구 미선이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예전엔 2시간씩 살인적인 핸드폰 요금이 아깝지 않게 통화를 하던 친구였는데 자꾸 통화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번 핸드폰 요금이 가계부 예산이 초과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혼 5년차인 미선이와 주고받은 통화내용은 누구누구가 평수 큰 아파트를 샀다더라, 재테크를 잘 해서 새 차를 뽑았다더라 하는 말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건만 우린 더 이상 여행 이야기, 책 이야기, 맛있는 차가 있는 카페, 멋있는 남자 탤런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미선이는 통화를 마치며 “윤아, 우리도 이젠 자연스레 이런 말만 하게 되는구나, 참 이상하지?”라고 말했다. 그날 밤, 난 조금 심란한 마음에 컴퓨터를 켰다. 이젠 본격적으로 억척스런 주부의 길로 들어가야 하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 검색란을 눌렀다. ‘재테크 하는 법’ ‘부동산 늘이기’ ‘육아 정보’ 등.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아랍어 같은 문장들을 눈으로는 쫓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전주의 교동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편했던 전동성당, 지친 맘을 달래주던 경기전의 녹음,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한옥마을, 맛도 모르고 멋으로 음미하던 전통 찻집의 녹차의 맛을 떠올리고 있었다. 삭막하던 주변 분위기를 드라마 ‘단팥빵’ 의 O.S.T를 들으며 바꿨다. 일요일 아침이면 밀려오는 단잠을 물리쳐 가며 보던 정말 재밌던 드라마였다. 동심을 느끼게 해 주는 기분 좋은 드라마였는데 그 촬영지가 교동이었다. 퇴근 후 미선이랑 교동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촬영하는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던 드라마 주인공들을 직접 보며 난 그 순간 ‘참 지금 행복하다. 이런 순수한 행복은 이제 없겠지?’하는 생각까지 가졌었다. 난 어느덧 검색란을 모두 지우고 드라마 ‘단팥빵’에 대한 자료며, 교동에 대한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교동에서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도 보면서, 오늘 아파트 구매에 필요한 서류를 떼려고 바짝 긴장했던 마음, 같은 곳의 분양신청을 하는 듯한 옆 아저씨를 보며 가졌던 경쟁심, 그리고 깨어져 버린 주부로서 내 첫 도전의 아쉬움이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결혼한 지 2년 8개월 째. 막 걸음을 떼었지만 난 서서히 나아갈 것이다. 주부 초단이던 내가 주부 9단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서두르지 않고, 나의 세계도 잃지 않으며, 주부의 자리를 사수할 것이다. 약간 억척스러우나 순수함도 잃지 않을 내 미래의 주부의 모습을 그리며, 난 오늘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주부 9단: 살림, 육아 등 모든 가정 일에 뛰어난 주부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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