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그리움

2008.03.25 14:44

배영순 조회 수:102 추천:15

그리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우너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배영순   겨우내 메마른 가지엔 물이 오르기 시작했고, 남쪽에선 꽃바람이 불어왔다. 난 연례행사처럼  조금만가면 꽃들의 잔치를 보리라 기대하면서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 쪽 길로는 1년만의 나들이다. 이 길도 많이 변했다. 꼬불꼬불하던 길들이 대부분 반듯해졌다. 어느새 여기저기 무더기로 떼를 지어 피어난 노란 산수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구례였다. 이제부터 굽이굽이 때 묻지 않은 섬진강을 따라 서서히 달렸다. 봄꽃이, 봄바람이 내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섬진강, 그곳엔 섬진강 용왕님이라 불리던 백제 선생님이 계셨다. 난 20대 중반에 섬진강이 경유하는 곡성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요즘처럼 컴퓨터도, 마땅히 나에게 맞는 놀거리도 없던 자그마한 시골에서 퇴근 후, 무료해서 나는 서예를 배우기로 했다. 수소문해서 찾은 분이 백제선생님이셨다.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머리가 하얀 노신사였다. 훗날 백발이 새치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선생님께서는 다리에 기브스를 하고서 어린애마냥 천진난만한 웃음을 웃고 계셨다. 다음 날 난 그의 제자가 되어 퇴근 후 선생님이 입원하신 병원으로 가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한때 한전에 근무한 적이 있지만 당시엔 작품활동만 하고 계셨다. 한학뿐만이 아니라 역사에도 조예가 아주 깊으신 서예가이자 한학자이셨다. 화엄사, 선암사 등 강원에서‘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해서 그의 제자 중엔 스님들도 많았다. 입원하신 병원으로 쫓아다니며 서예를 배우는 나의 열정은 퇴원 후 읍에서 10여 리 떨어진 선생님 댁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배우는 열정으로 이어졌다. 선생님 댁을 방문해서 알게 된 그분의 삶의 모습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커다란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문 바로 옆에 사랑방이 있었다. 스님제자가 손수 만들어준 고목 차상과 멋진 다기로 녹차를 마시면서 담소도 나누고 공부도 했다. 커다란 사방 벽은 어쩜 선생님께서 어린시절부터 평생 보아왔음직한 고서들로 빽빽이 차 있었다. “이 한 권이 논 한 마지기 값이었어!” 노끈으로 꿰매진 노란 고서를 꺼내면서 말씀하시곤 했다. 커다란 마당 건너 가족들이 생활하는 집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시골 농가였다. "돈을 돌같이 보라!"는 선생님의 철학이 그의 집에 고스란히 전해져서 그의 식솔들은 희생양처럼 그 가르침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돈을 돌같이 보라!"는 선생님의 철학은 그의 문하생들로 하여금 수강료대신 막걸리를 대접하게 했지만 백결선생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본 후 난 쌀 등 주식을 집으로 보내드리곤 했다. 이름없이 음지에서 살아가던 선생님은 그 후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선생님 이야기가 방송되자 그 고을에선 유명인사가 되었고 가난하다고 비웃던 이웃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내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할 때 내 주례를 맡아주셨던 선생님은 5년 이상 나의 절친한 벗이자 인생 상담가였다. 결혼 후 난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바쁜 일상으로 선생님을 잊고 살았다. 어느 날, 며칠동안 가끔 선생님이 꿈에 보여 전화를 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이미 몇 개월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 어머니가 떠나가실 때와 같은 슬픔과 공허가 밀려왔다.“선생님!”하고 부르면 언제라도 막걸리에 절은 텁텁한 목소리로 “어! 배 선생, 별일 없고?” 이런 답이 올 줄 알았는데. 난 당시 객지에서 선생님과 종종 막걸리를 한 잔 들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에 경탄하면서 나는 인생도 얘기하고, 때론 논쟁도 하면서 아버지처럼 선생님을 따랐다. 그를 따르는 제자와 후배 중엔 시인, 소설가 등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무리 중에 나도 있었다.“우리 배 선생도 언젠가는 봇물처럼 뭔가가 나올 거야.”그 무리들에게 웃으면서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러나 선생님을 만난지 거의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난 예술애호가일 뿐이다. 아니, 현실에 얽매여 바쁘게 살다보니 오히려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나 할까.   이제는 사라져 간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시내버스마저 그리움이 되어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니 내가 살아온 세월도 만만치 않았나 보다. 선생님과의 추억 또한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깜찍한 베레모를 쓰고 언제나 반짝이는 구두에 한복이든, 양복이든, 멋지게 차려입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으시던 선생님, 선생님의 부음을 받고 섬진강가에 자리한 그의 고향 마을을 찾았다. 선생님은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산 중턱에 누워계셨다. 무덤가엔 아직도 겨울의 잔설이 남아있었다. ‘선생님!’ 속으로 조용히 불러 보았다. “자식!”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시는 것 같았다. 그립다. 그 시절이, 그 선생님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보지 말고 가진 것을 볼 때 행복이 있다고 하셨다. 아이들 공부마저 돈을 투자한 만큼 거두어 드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황금만능 시대에 돈을 돌같이 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이 말에 공감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하루가 다르게 새롭고, 멋진 상품이 쏟아지며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은 시대에 정신병자 취급이나 당하지나 않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순수한 자연인이 있기에 세상은 살맛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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