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야간반 야외수업에서 건진 값진 것들

2008.03.28 08:59

최윤 조회 수:85 추천:11

야간반 야외수업에서 건진 값진 것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최윤 목요일 아침이었다. 미술치료 수업을 듣고 있는데, 김종윤 회장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에 야외수업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장소는 전주역 근처의 우리회관. 위치를 잘 몰라서 아빠가 그곳까지 데려다 주셔서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가 좀 안되어서였다. 혹시 다른 분들이 일이 생겨 못 오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반가운 얼굴이 등장하셨다. 김 학 교수님이셨다. 인사를 하자 “일찍 왔네?” 하시며 책부터 건네셨다. ‘야외 수업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뒤, 아는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한 분들을 제외한 모두 아홉 명의 학생이 모였다. 밖에서 보니, 더 생기가 있고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들이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 두어 번 만났다고 처음 만날 때보단 확실히 친밀감이 도는 분위기였다. 내 주위에 앉은 선생님들과 간간히 대화를 나눴는데 처음의 낯선 모습은 사라지고 유머가 넘치고 따뜻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의 메뉴는 사슴고기였다. 사슴사골에서부터 녹용주, 사슴고기, 녹혈 등이 나왔다. 원래 작게 먹는 편이라 많이 먹진 못했는데 ‘먹으면 건강해지겠구나. 신랑도 데려올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주 1잔이 주량이던 난 신기하게 4,5잔을 마셨는데도 그리 취하지 않은 걸 보니 ‘녹용주였기 때문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그리 취하지 않으면서도 그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기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음식을 가지고 올 때마다 식당주인은 “이건 금강산에서 가져온 귀한 음식입니다. 그리고 이건…….”하고 이어지자 옆에 있던 어느 선생님은 “이젠 청도에서 금강산까지 내려왔네.”하며 웃으셨다. 나도 발그레해진 얼굴로 킥킥 웃었다. 이어지는 풍족한 음식을 들며 여러 선생님들과 교수님의 이야기도 들으며 시간은 보냈다. 그러던 중, ‘이거 단순한 회식이 아니구나.’라고 느낀 건, 바로 학생들의 소감발표시간이었다. 첫 날 자기소개를 하던 어색함은 사라지고 자신만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다른 선생님들의 소감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인데, 분명 저 선생님과 나는 나이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상황도 다를 텐데, 공감이 갔다고 해야 하나, 선생님들의 말 중 내가 느끼던 생각들이 한 가지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읽는 것은 좋아하나, 쓸 줄은 모르지만 가슴으로 느낀 바를 그대로 쓰고 싶다는 박영순 선생님, 어머니를 떠나보낸 아픈 마음을 글로써 쓰면서 어머니와 재회하는 기분을 느낀다는 배영순 선생님, 그리고  “글을 군것질 삼아 살아왔다.”는 백혜숙 선생님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다른 분들의 말씀도 다 기억에 남지만 유독 이 세 분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 나와 가까운 동기인 박영순 선생님은 처음으로 접한 수필의 세계에 동경과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다. 백지상태에서 나오는 진심을 보여주고 천진스러운 글이기에 공감을 자아낸다. 배 선생님이 어머니를 보낸 슬픈 마음을 글로 써가면서 어머니와 재회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대목에선 내가 처음으로 떠나보낸 강아지이야기를 쓴 내 처녀작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강아지를 잃고서 난 아주 가슴이 아팠다. 난 아주 슬픈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었기에. 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가족들과는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이야기만 나와도 너무 슬퍼하니까. 내가 첫 작품의 소재를 찾았을 때,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우리 강아지였다. 내가 태어나서 그토록 오랫동안 생각하고 느낀 존재는 없었다. 나의 가치관을 바꿔 버린 일이었을 만큼,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적은 처음이었다. 난 고민했다. 이 슬픔을 마음속에만 담아 둘 것인가, 과연 억압하려고만 했던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 놓을 수 있을까하고 망설였다. 하지만 어느 날 꿈을 꾸고 일어나자마자 그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글을 써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난 말도 잘 못하고 표현력이 부족하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재주가 없고 무표정이어서 차갑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난 충분히 좋아하는데 얼굴은 불편한 표정을 짓나 보다. 그래서 난 그런 오해를 한 사람들에겐 편지를 쓰곤 했다. 난 전화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내 표정을 알 수 없는 상대방이 날 오해할까봐서다. 그래서 난 전화를 한다는 말보단 편지를 보내겠다고 한다. 종이에다 한자 한 자 한 자 써가면서 나는 그 사람과 대화를 한다. 편지에선 난 그 사람과 아주 친밀하다. “글 속의 너는 참 재미있으며 다정하다.” 라는 답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 누구에게도 나의 깊은 슬픔을 말로써 표현 못했고 또 말을 하면 왠지 경박해져 버리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하얀 종이에 조용히 내 마음을 담으면서 난 웃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너무 울어버려서 남편이 “네가 쓴 글이 그토록 감동적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내가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내가 강아지에게 느꼈던 사랑, 그리움을 회상했고, 억압하려고만 했던 상실의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며 써내려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거짓말 같이 나의 아픔은 글로 남기면서 승화되었다. 그냥 슬프기만 했던 알 수 없던 감정이 사랑, 그리움, 그러나 포기해야 할 것들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내가 늘 만나길 기도했던 이루어질 수 없던 강아지와의 재회가 나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생겼다. 앞으로도 계속 슬프겠지만, 그 슬픔보다 더 많은 사랑했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글을 쓰며 만나야겠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어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난 내가 가장 열심히 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으로 우리 강아지를 추억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처녀작이 게시판에 올랐을 때 난 조금은 죄책감에서 벗어나 다른 때보다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떨어져 낯선 군산에서 결혼생활을 하는 나에게 백 선생님의 말씀도 가슴에 남았다. 군산에서 아는 사람 없이, 남편만 바라보며 살던 나는 외로운 마음에서인지, 짜증이 나면 모두 남편 탓으로 돌리며 화를 내곤 했었다. 결혼 전에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공상하는 것도 좋아하며, 일기도 쓰고 남는 시간을 보냈는데 결혼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과연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금방 싫증이 났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기 전이나, 피곤하다고 먼저 잠이 들면, 난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백 선생님이 ‘글을 군것질 삼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는 말을 듣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부담 갖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자. 남편에게만 의지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혼자서 하는 법을 익혀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서운했던 마음과 막막했던 내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난 느낌이란 것을 믿는다. 결혼 전, 퇴근 후에 친구 따라 취미삼아 아동학과에 등록해서 다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 번이나 호기심에 찾으려 했지만 그냥 부끄러운 마음에 다음을 기약했었다. 수필 반에서 낸 광고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서 보곤 해서 아는 언니는 “너 수필반에 관심이 많구나?” 하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뒤로만 미루던 일을 지난 2월에 아동학 학위를 받으면서, 이젠 용기를 내야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첫날은 많이 갈등했었다. 모두 완벽해 보여서 내가 겁 없이 이 세계에 뛰어 들었나 하는 두려움으로 기가 죽었다. 하지만 난 낯가림하는 아이처럼 두렵지만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울면서도 자꾸 상대방을 바라보는 아기처럼 103강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강의를 듣기 전, 김학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는데 다행히도 날카롭거나 무섭지 않았다. 부담이 없고, 친밀하게 대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나의 부담감은 많이 줄었다. 난 아직 낯가림이 심한 아기라서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곧 익숙해 질 거라고 자신한다. 난 어려서부터 조금은 특이한 아이였다. 늘 무언가 생각하고 공상을 많이 했다. 그런 나는 이해 받기에는 좀 어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내색은 안했지만 학교 다니거니 직장에 다닐 때도 참 힘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거란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김종윤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직장이나 학교를 떠나 다른 집단과의 교류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 건 아동학과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다. 난 아이를 좋아하는데, 아이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 교류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난 참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들어온 곳이 수필반이었던 것이다. 난 능력도 없고 또 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소한 것을 바라보았을 때, 세상의 거친 면보다는 행복한 면을 더 찾을 수 있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그런 동지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100 퍼센트는 아니겠지만, 남들이 날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을 수필 반 가족들과 같이 나누고, 말이 아닌 글로서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헬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알을 깨고 나와라!” 라는 그 부분이. 작가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겠지만, 마치 이 말은 요즘의 내게 하는 충고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 요즘의 난, 서서히 알을 깨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그 알을 깨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힘들고도,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이다. 과정은 힘들지만 알을 깨고 나왔을 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고, 거기에서 난 진정한 행복을 찾을 것이다. 이런 나의 초심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2008.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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