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후회

2008.04.03 08:40

구미영 조회 수:98 추천:7

후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구미영 남편이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다. 복숭아꽃과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처음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땐 어렸을 적 우리 외갓집 가는 기분처럼 들떴었다. 그런데 갈수록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10년 전, 아니 20년 전, 아니 시댁 입구에 들어섰을 때가 아! 30년 전이던가. 남편의 자동차가 타임머신이 되어 30년 전 시골 마을로 우릴 데려다 놓았다. 100년도 더 되었다는 기와집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거 같았고, 부엌이라고 하는 곳엔 가마솥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가마솥 밑 아궁이엔 열기가 남아 방안을 따뜻하게 했지만 내 머리가 더 뜨거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  21세기라고 말해주는 건 아주버님들의 자동차뿐이었다. 내 머릿속은 채널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때 어떻게 인사를 드렸고 어떻게 우리 집으로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난 21세기형 농부의 며느리가 되었다. 옛날 농부댁 며느리는 새벽밥을 짓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었다. 집안 일은 여자 몫으로 생각했고 논과 밭일까지 그야말로 몸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난 한 달에 두세 번쯤 주말에나 가서 쓸고 닦으며, 어머님이 식사준비를 하실 때 도와드리는 정도밖엔 못했다. 임신중이었던 막내 며느리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주 찾아 오는 게 예뻐 보였는지 시댁에 갈 때마다 어머님은 쌀부터 시작해서 논이며 밭에서 나는 모든 곡식과 야채, 과일들을 바리바리 싸 주시고 용돈까지 덤으로 주셨다. 그러기를 4년. 둘째를 낳고부터 난 농사일을 좀 거들기 시작했다. 거든다고 해봤자 시부모님이 하시는 일의 100분의 1도 안되는 일이었다. 빨간고추와 초록고추는 종자부터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식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추수 후 나락들을 뜨거운 아스팔트에 3일 밤낮 동안 말려야 하고, 그 나락들을 손수 푸대에 퍼 담아 경운기에 실어 창고에 쌓는 것까지 모두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것에 놀랐다. 아이들과 사과를 따면서 그동안 자식들과 손주들 먹일 생각에 바쁜 농사철에도 쉴틈없이 과일을 따고 담으셨을 시부모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고구마를 캐면서 그동안 자식들과 손주들의 겨울 양식이 될 거라 생각하며 바삐 몸을 움직이셨을 시부모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5백 포기쯤 되는 배추를 뽑으면서는 겨울에 자식들의 식탁에 오를 김치를 생각하셨으리라.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힘든 농사일을 어떻게 40년 넘게 할 수 있었을까? 오후 다섯시 전엔 절대 불을 못켜게 하셨고, 쌀 뜬물도 소를 줘야 한다며 버리지 못하게 하신 아버님, 기름 보일러가 있는 방이 있으면서도 기름값이 아깝다며 아궁이를 고집하시는 아버님의 자린고비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손자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으면 기름보일러가 있는 방과 아궁이방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따뜻하게 데워졌다. 24시간 가동된 보일러 방과 온돌방, 아무리 뜨거워도 그 방들은 손자들을 생각하는 당신들의 마음의 온도보다 더 뜨거울 순 없었으리라.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이지만  아버님은 자식들과 손주들한테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아직도 우리 곁을 지켜주신다. 한동안 시댁식구들과의 갈등 때문에 힘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오늘 새벽밭 새벽편지 메일함에 이런 내용이 배달되었다. "해도 후회가 되고 안해도 후회가 되는 게 있습니다. 그건 효도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아무리 못해도 결국 돌아기시면 땅을 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오늘은 부모님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옛 추억을 얘기해 보는 게 어떨까요?" 시부모님이 며느리에게 베푼 사랑이 옛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리밖까지 내동댕이쳐진 구겨진 종이들이 온전하게 펴져서 내게 올 순 없겠지만 그 종이들이 모두 내게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겠다. 그 종이들을 곧게 펼 수 있는 다리미도 마련하고 곧게 펴진 종이를 담을 수 있는 예쁜 상자도 만들어야지. 그러다 보면 그러다 보면 부모님이 베푼 사랑을 내 손자들에게도 전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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