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일본어와 한국말

2008.04.18 08:30

정원정 조회 수:78 추천:8

일본어와 한국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일본통치가 조선천지를 덮고 있던 1940년대였다. 새로 부임힌 조선인 남자 선생은 나이는 18세, 총각이었다. 전주사범학교 양성소를 나왔다는 그는 아침 조회 때 교단에 올라가 일본 말로 첫 인사를 했다. 카키색 윗옷이 품에 맞는 사이즈가 없었는지 헐렁해서 어색해 보인 것 말고는 얼굴은 호감이 갔다. 나는 가슴이 설레어 잔뜩 긴장되었다. 사람은 마음을 열고 몰입하면 뇌의 작용이 영특해지는지 모르겠다. 그 선생의 인사말을 듣는 즉시 외울 수가 있었으니까. 문장으로 하면 몇 줄은 족히 될 터인데 그대로 빠트리지 않고 외웠다. 몇 번 외워 보니 짜임이 아주 조리 정연한 인사말인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외우기가 쉬었던 것이다. 한 번 듣고 외웠으니 내가 생각해도 신통해서 자랑하고 싶었다. 한 번은 밤에 친구들과 무리지어 담임도 아닌 그 선생의 하숙방에 놀러 갔었다. 이야기 도중에 나는, “선생님, 첫 인사말을 저는 외우고 있어요.” 묻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어디 외워 봐.” 설마 했을 것이다. 별 것이나 아는 양 그 자리에서 외웠다. 그 선생은 의아하며 좋아했었다. 나는 결코 머리가 좋은 아이는 아니었다. 산수를 못한 걸로 봐서 그렇다. 사람이 영(靈)이 도는 때도 간혹 있는가 보다. 내나라 말은 헌 신짝처럼 팽개쳐도 상관이 없었지만 일본말은 외운 것만으로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또 한 번은 3학년 때였다. 이야기시간에 소금장수이야기를 했더니 선생은 그 뒤로는 가끔 수업시간이 지루한 듯싶으면 나를 단위에 세우고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게 했다. 반 아이들이 얼마나 일본어를 못했으면 내가 잘한 축에 들었을까. 어떤 애는 이야기 시간에 앞에 나와 일본말로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만 실수로 “나는 도토리입니다.” 라고 말해 버려서 한바탕 웃음꺼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 애는 이어서 말도 못하고 말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상용어가 아닌 남의 나라말이 쉽겠는가. 그 시절 시골에 무슨 동화책이 있었겠나, 남들처럼 할머니가 계셔서 옛이야기를 들려주시기를 했겠나, 나도 이야기꺼리가 궁했었다. 그것도 일본말로만 해야 하니 웬만한 실력은 있어야 했다. 기껏해야 어머니가 구운몽과 박씨전 이야기를 몇 번 들려주신 것이 전부였으니까. 선생은 내가 무슨 이야기 주머니라도 되는지 거듭 이야기를 시켰다. 나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새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이미 한 것이라도 다시 하라고 했다. 한 것을 다시 하기도 하고 억지로 지어서 우려내기도 했다. 일본어가 우리말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일본어를 잘해야 하는 줄 알았었다.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게 있다. 그 시절 집에서는 우리말을 썼지만 학교에서는 조선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일본이 조선에 창씨개명을 단행하고 내선일체를 내세웠을 시국이니 교육지침까지도 철저했었다. 우리 어린애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무엇이나 일본인은 우월하고 조선인은 열등한 줄 알았다. 5학년 때였다. 한 번은 한 반 위의 남자아이가 성가시게 굴어서 대항하다가 얼결에 조선말이 튀어 나오고 말았다. “어! 너 조선말을 했다. 그래도 되는 거냐?” 기세등등하게 다그치는 그 애가 미워서 나는 “그래, 하면 어떠냐?” 그랬더니 당장 교무실에 가서 고자질을 했었나보다. 하학 무렵 일본인 교장은 우리 반 여자아이들을 한꺼번에 교무실로 불러들였다. “여기 있는 학생 중에 누가 조선말을 해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느냐?” “제가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어쩌면 번개 같이 빠르게 교장은 앉았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을 치며 내 뺨을 때리는 것이었다. 얼얼하게 아픈 뺨보다는 괜히 분하고 서러웠다. 교장은 계속 훈시를 하고 나는 훌쩍거리며 시간이 갔다. 나중에는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정직하게 내가 그랬다고 말한 점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교장은 우리 담임이기도 했고 평소에는 푸근하고 좋은 분이었었는데 그날은 엄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일본어만 배우고 일본말을 해야만 했다. 비록 초등학교 수준이지만 나는 일본어라면 글도 꽤 쓸 줄 알고 군 위문편지는 맡아 놓은 내 몫이었는데도 실수를 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어로 썼던 일기 한 쪽이 남아 있는데 제법 문학적 표현을 늘어놓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큰 언니 집에서 육 개월 살다 유월 십일, 산길을 넘어 어머니의 품을 그리며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심정과 힘들어 잠시 길섶에 앉아 바라 본 광경이며, 뉘엿뉘엿 해는 넘어가는데 석양빛을 받은 흰 옷 입은 농부는 곡괭이를 세우고 쉬고 있는 모습을 적었던 문장이었다. 한글은 일학년인지 딱 한 학기를 배웠을 뿐이었으니 까맣게 잊었다. 내 나이 17세에 8.15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 무렵 중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은 한글을 어렵지 않게 배웠을 테지만 나는 중학교에 못 갔으니 혼자 한글을 공부해야 했다. 소설책을 구해 읽게 되었다. 방인근(方仁根)의 단편소설 ‘낙조(落照)’였다. 글씨는 무슨 문자인지 눈에서는 가까스로 알겠는데, 그것도 더듬더듬 겨우 붙여서 한 자 한 자 읽을 정도였지만 목에서 읽혀지지를 않았다. 소리를 안 내도 글씨는 눈과 함께 목에서도 읽는 것이란 걸 뒤에 알았다. 도무지 목이 꽉 막혀서 가슴이 답답한 게 몸부림이라도 칠 지경이었다. 단편 한 편을 겨우 다 읽었는데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문장도 머리에 들어 올 리 없었다. 두 번째 읽으면서 비로소 눈에서도 목소리로도 읽히면서 가까스로 이해가 되었다. 슬픈 대목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렀으니까. 다시 한 번 그 책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요즘 찾아봐도 구할 수가 없다. 수월하게 한글을 깨친 사람은 독학한 사람의 숱한 아픔을 모를 것이다.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열등의식으로 기가 죽어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서러움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지난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은 어렵게 배운 한글, 내 나라 글로 수필을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한 뒤늦은 감격 때문이다. 지금도 컴퓨터가 아니라면 맞춤법은 엉망이지만 말이다. 무엇이나 어렵게 얻어진 것은 귀할 수밖에 없다. 애써 도전해서 얻은 것일수록 허투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나라의 말로 내 생각을 풀어낸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크나큰 하늘의 축복이려니 싶다. (2008.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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