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나를 위한 만찬

2008.04.23 13:38

오명순 조회 수:68 추천:7

나를 위한 만찬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목요야간반 오명순 이른 아침 잠이 깨었지만 선뜻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어젯밤 꿈속을 드나들었던 모든 일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해서다. 요즘 밤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꿈을 많이 꾼다. 상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애써 떨쳐버리고자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흠뻑 들이 마셨다. 점점 다가오는 햇살이 나를 어루만질 때 새들이 바삐 아침인사를 건넨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혼자서 맞이하는 아침이 어제오늘이 아니건만 오늘 따라 유난히 말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쓸쓸하다. TV를 켰다가 금세 꺼버렸다. 이대로 조용한 아침을 즐기기 위해서다. 컴퓨터도 켜지 않기로 했다. 게시판, 메일을 읽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선 아침식사를 해야지. 나만을 위한 멋진 식탁을 차리기로 했다. 멸치를 듬뿍 넣고 된장을 살짝 풀어 쑥국을 끓였다. 콩나물을 삶아 찬물에 헹구어 사각사각하게 무치고 불미나리는 고추장과 된장을 넣고 무쳐서 예쁜 접시에 담아놓았다. 하루 한 개씩 먹어야 한다는 계란도 부쳐 준비하고, 식초에 절인 마늘 몇 쪽과 오이는 썰어 새콤하게 버무리며, 이틀 전 새벽 2시(?)까지 담았던 배추 생김치도 썰었다. 냉동실의 조기도 한 마리 구웠다.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정성들여 준비한 것들을 다른 밑반찬들과 함께 식탁에 가득 차려 놓았다. 왕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오직 나만을 위한 밥상이다. 이렇게 가끔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을 위한 식탁을 차리고 싶었다. 내가 나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2년쯤 전부터다. 15년 가까이 사업을 한답시고 매장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아침이면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서둘러 사업장으로 나가다 보면 식사를 제대로 할 리 없었고, 점심 저녁 또한 고객에게 맞추다 보면 제 시간에 먹지도 못할뿐더러 서서 대충 먹기 일쑤였다.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겨서 내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름대로 옆도 뒤도 안 보고 그저 앞만 보고 살았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잘 살 줄 알았다. 사업이 확장되어 나아지자 남편은 밖으로 돌고 IMF와 맞물려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엄청난 일이 닥치자 두문불출하고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숨어 지내는 그 사람이 정말 미웠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였다. 얻어맞는 것도 나였고 감당해야 할 몫도 내 차지였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세월이 약이 된 것이다. 다 잃은 것 같았지만 아직 남은 게 있었다. 아이들과 내가 건강하다는 것, 정말 가장 소중한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고, 이제 아이에게 미안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먹는 소리가 들릴까봐 제대로 씹지 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렇게 5년여 숨죽이며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힘들었던 숱한 날들을 잘 견디고 살아 온 내가 대견하고 고맙다. 이제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 보상하고 싶다. 흐뭇하게 아침을 먹고 커피를 준비했다. 빨리 식지 않도록 속이 깊은 머그잔에 커피를 탔다. 커피잔을 들고 창 가까이 다가섰다. 작은 숲의 나무들이 어느 사이 초록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아침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오늘의 이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려거든 나를 먼저 사랑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나. 나의 몸을 아끼지 않고 너무 혹사시켰다. 화가 나면 더 많이 먹어 위를 불편하게 했고,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미친듯이 일을 해서 잊어버리려 몸을 괴롭혔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 피할 수 없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일을 해야만 했다. 그 결과 나의 몸은 옐로우카드가 아닌 레드카드를 자꾸 내밀며 경고장을 보내왔다. 자기를 좀 알아달라고, 사랑해달라고, 손을 내밀고 발을 구르며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껴 주고, 사랑해 주려고 한다. 맛있는 것도 먹여 주고 예쁜 옷도 입혀 주고 손톱에 메니큐어도 발라 주고 머리에 에센스를 발라 오래 쓰다듬어 주고 힘내라고 보약도 챙긴다. 비밀이지만 며칠 전에 예쁜 수가 놓아진 속옷을 샀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나를 위해서 샀다. 분홍색, 노랑색, 하늘색.^^^^ 거울앞에서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웃음을 보내자 거울속의 나도 행복한 듯 웃었다. 검은색 어두운색 옷들이 빨간색도 입고 환한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를 업고 다니는 발을 위하여 다 닳아야 바꾸어 주던 구두를 이제 계절 따라 바꾸어 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가 나를 더 사랑하니까 나 외에 다른 사람도 더 사랑스럽다. 그리고 누가 알아 주지 않고 보아 주지 않아도 행복하다. 어깨가 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의 몸과 내 영혼이 기뻐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지난 일은 다 잊겠노라고 고맙다고 한다.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잘 참아 주어서 내가 더 고맙다고 나도 말해 주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그렇게 살자고 서로를 다독여 주었다. 오늘의 나를 위한 만찬은 끝나고 활기찬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하루를 시작했다.                               (2008.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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