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그리운 어머니

2008.04.28 07:06

조규열 조회 수:100 추천:7

그리운 어머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조규열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중략),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중략), 어머님의 희생은 지극 하여라” 언제 듣거나 불러도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노래다. 교직에 있으면서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제자들에게 효도하라며 가르치고 함께 불렀던 노래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지금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오늘은 정말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다. 오늘은 말씀 한마디 못하시고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9주년이 되는 기일이다. 어머니는 정도 많으시고 자식들 생각에 주무시는 것도, 잡수시는 것도 잊을 수 있다던 분이셨다. 그런데 얼마나 원망이 크셨으면 지금까지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으실까?  어머니의 지병이나 아픔도 전혀 모르고 항상 베풀어 주시는 사랑에 눈과 귀가 멀어 지냈으니 우리 자식들은 죄인이랄 수밖에 없다. “어머니, 어머니의 큰 사랑에 머리를 숙여 사죄하오며 자식들이 모여 이렇게 기제사를 올리오니 아버지와 손잡고 오셔서 감읍하소서!”    우리 어머니는 키가 작으시고 얼굴이 갸름하시며 약해 보였지만 동년배의 다른 분들보다 강단이 있으셨다. 인정이 많으셔서 자식들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시고 여린 마음으로 어려움과 걱정을 혼자 가슴으로 안고 사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 8남매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허리 펴실 날이 없으셨다. 모두 객지에서 사니 생신이나 명절 때 아니면 찾아뵙지도 못했으니 불효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5남매가 결혼한 뒤에는 ‘남매 계’를 조직하여 양친 부모님의 생신 때면 주말을 이용해 찾아뵙고 선물과 용돈을 드렸었다. 늘 당신의 고달픔이나 외로움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식들 잘 되기만 빌며 종손 집안의 수많은 일들을 챙기셨다.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뒤 혼자 지내면서도 갈 때마다 채소며 양념과 고향 특산물을 챙겨주셨다. 내가 부모 되어서도 흉내 내지 못하는 게 바로 어머니의  자식사랑이다.    1999년 3월 중순의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갑자기 우리 집에 전화를 거셨다. “얘야, 갑자기 기운이 빠지면서 다리에 힘이 없어 주저앉았다.”   “그냥 방에 들어가셔서 옷 입으시고 가만히 누워 계셔요.” 라고 말한 뒤 한 동네에 살고 계신 숙모님께 전화를 해서 급히 부안읍내 종합병원으로 모셔 응급조치를 부탁했다. 이모 기일이라 새벽에 집에서 목욕하시다가 벌어진 일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가 들렸다. 조반도 잊고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차를 몰았다. 병원에 당도하니 이미 입은 다물고 눈은 감긴 채 숨만 호흡기로 대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 아침에도 청천벽력 같은 날벼락이 내리친단 말인가! 급히 앰뷸런스로 전북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모셔서 수술을 의뢰하였다. 마음은 급한데 의사들은 태연하게 순서를 기다리라는 소리만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몰라주니 그때처럼 의사들이 얄미울 때는 없었다. 자식인 나는 어머니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뇌동맥류수술’을 받았다. 뇌 속의 핏줄이 꽈리처럼 부풀어  언제 터질지 모른다며 위험한 수술이라고 했다. 호흡만 있을 뿐 무의식상태에서 수술이 4시간 넘게 진행되었으니 그 초조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나마 회생여부는 환자의 의지와 체력에 달려 있으니 지켜보라고만 했다. 긴 시간과의 싸움이라 생각되어, 간병을 위한 근무조가 편성되고 교대로 병원에 드나들었다. 의식이 회복되고 말 한마디라도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간호하였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이럴 때 기적 같은 신약이나 의술이 개발되어 잠자고 일어나듯이 신통력이 나타날 수는 없을까? 4주간의 치료 결과는 기계적으로 드나드는 의료진들의 시선과 주고받는 대화로 짐작할 뿐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호하는 가족들도 지치고 회생에 대한 기대도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강단이 있고 온갖 역경과 고난을 몸소 이겨냈던 분이니 소중한 생명의 질긴 끈을 놓아버리지 않으시리라는 우리의 믿음과 기대도 무너지는가? 맥은 갈수록 약해지고 숨소리까지 조용해지니 허탈감이 들었다. 가슴만 타들어가고 장남으로서 일찍 어머니의 건강을 챙기지 못한 죄스런 마음으로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렇게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인정이 넘치셨던 분이 이렇게 냉정하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 가운데는 불교신자도 있고, 독실한 기독교신자들도 있어서 불철주야 기도를 하건만 그것도 허사란 말인가? 입원 한 달 만에 의사의 포기선언에 따라 우리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 한줌의 미련도 남기지 마시고 편안히 가시길 비는 가족 모두의 기원 속에 이날 밤 11시 45분 끝내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석탄백탄 타는 데는 연기라도 나지만 이내 마음 타는 덴 아무 것도 보이질 않네.” 당신이 어쩌다 혼자소리로 읊조리던 노래 가락이 떠올랐다. 부모의 아픔과 한이 깊은 줄도 모르고 지낸 바보 같은 나 자신이 미워지고,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알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팠다.    “너희 8남매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잘 살아야 한다.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남에게 베풀며 살아라.”그 마지막 말씀이 아스라이 들리는 것 같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신 어머니의 베풂과 사랑의 일생을 본받아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어머니! 저희들은 저마다 자기 일터에서 맡은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고, 남매간에 화목하게 지내며, 손자손녀들도 잘 돌보며 살아갈 것이니 편히 잠드시옵소서!”                                   (2008.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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